강윤희 전 식약처 임상심사위원
필자는 89학번 학력고사, 95년 의사국시 출신이다. 필자와 유사한 세대에 의대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게 뭘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1989년 학력고사는 수학 난이도가 최악(최상?)이었고, 1995년 의사국시는 합격률이 64%에 불과했던 해이다.
필자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고3 담임선생님은 다음날 학력고사를 위해 서울로 가는 필자를 불러서 '너는 답안지만 제 시간에 내면 합격할 것이니 제발 답안지를 제 시간에 내라'고 조언해 주셨는데 그 때는 '원, 별 말씀을 다하시네'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학력고사 시험장에서 수학시험 객관식 문제를 다 풀었을 즈음, 그러니까 주관식은 하나도 풀지 못한 시간에 감독관 교수님이 20분 남았다고 알려주셨다. 주관식은 문제지에 그대로 정신없이 풀고, 객관식을 OMR 카드에 부랴부랴 옮기는데 종이 울렸다. 그런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선견지명이 있으셨을까!
의예과를 마치고(예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필자의 2022.2.21 '의예과 폐지가 아니라 도리어 활성화해야' 칼럼을 참고하기 바람), 본과에 가니 소위 시험족보라는게 있었다. 고등학교에도 없었던 시험족보가 대학교에 있다는게 황당했던 필자는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교에 와서 자존심이 있지, 족보는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덕분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해부학, 기생충학은 교수님들이 강의하면서 의학용어로 영어를 사용하셨는데 시험문제는 한글로 출제됐다. 그러니까 satorius 가 넙적다리빗근, Taenia solium 이 갈고리촌충, 뭐 이런 식이었다. 당연히 시험을 망치게 됐다. 약리학은 정말 어려워서 고생을 했는데 시험을 마치고 나니 동기들이 희희낙낙이어서 물어보니 거의 100% 족보 그대로 나왔다고 하기도 했다.
교수님들에 대한 배신감 같은 걸 그 때 조금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예과 때 좋았던 성적은 수직하강하게 됐다.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족보를 조금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임상교수님들은 족보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족보를 거의 보지 않던 필자가 크게 덕을 본 시험이 1995년 의사국시였다. 필자가 한 선배에게 국시 준비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으니 다 합격하니까 공부할 필요 없고, 예방의학 등 몇과목은 혹시 과락(과목 탈락)이 될 수 있으니 이런 과목만 시험보기 전에 잠깐 보면 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국시 족보를 거의 보지 않았다. 시험보기 몇일 전에 예방의학 등만 잠깐 족보를 살펴보았을 뿐. 그런데 국시 1교시를 보는데, 감독관 교수님이 제일 앞줄에서 시험을 보고 있던 필자에게 슬쩍 '문제가 많이 어렵니?' 라고 물으셨다. 표정이 상당히 긴장한 표정이셨다.
하지만 필자는 어렵고 쉬운 것의 기준이 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뭐 괜찮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1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니 일부 동기들의 얼굴이 사색이 돼 있었다. 국시가 완전히 족보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 해 의사국시 합격률은 64%에 불과했고, 병원의 인턴수급이 부족해서 의사국시 최초로 추가시험이 있었다.
이번 의사국시 위원장이 의사국시 기출문제를 공개하면 안된다는 쓴소리를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국시 문제를 10년 이상 공개하면서 의대가 국시 합격을 위한 족집게 학원이 됐다고 꼬집었다. 참 부끄러운 현실이지 않은가? 필자는 이 위원장의 의견에 깊이 공감한다.
물론 국시위원회에서 기출문제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의대생들 암기력이 워낙 좋으니 기출문제는 정리되고 알려질 수 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 아예 기출문제를 공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또한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각 의대 교육의 정체성이다.
의사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되지 않고, 국시합격률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의대에서 아예 본과4학년들을 대상으로 국시준비를 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의대 교육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최근 의예과를 없애고 본과6년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것도 의대교육의 본질을 의사를 키우는게 아니라 그저 방대한 의학지식을 집어넣고 보겠다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으니, 이미 의전원 제도로 망쳐버린 의대교육을 다시 한 번 망치는 일은 제발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제 지식의 1등은 의미가 없다. 솔직히 필자는 모든 분야에서 1등이라는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식 분야에서의 1등은 더더군다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학력고사를 1등하고, 서울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현 국토부장관이 현 대통령의 정책본부장 시절 처음 내세운 공약이 백신부작용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책임제였는데, 아직까지도 바뀐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지식 분야의 1등이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년 의사국시부터는 1등을 발표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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