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경제팀 김승직 기자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후 그의 원고 일부를 엮어 편찬한 이 책은 토론에서 반드시 이기는 법을 다루고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다루는 방법은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 전제와 확증 편향으로 상대방의 말을 차단하거나 말싸움·인신공격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해 판정승을 노리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토론자가 대화를 포기하거나 격분해 욕설을 내뱉으면 청중은 그 상대편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지난 22일 간호계가 의료계에 제안한 생중계토론회 내용을 보면 이 책이 떠오른다. 이 토론회는 간호법에 반대하는 보건의료직역들을 겨냥한 것으로 그중에서도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콕 짚었다.
간호법 표결에 앞서 직역 간 토론회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엔 적극 동의한다. 하지만 간호계가 제안한 토론회 주제가 간호법 표결을 앞두고 꼭 논의해야 하는 내용인지는 의문이다.
이 토론회는 '간호법과 존엄한 돌봄 활성화의 걸림돌은 과연 누구인가'를 주제로 ▲국민 의료서비스 강화와 의대정원 확대 필요성 ▲간호법은 왜 부모돌봄법인가 ▲현행 의료서비스는 과연 부모돌봄에 최적인가 등의 내용을 다룬다.
간호계 주장처럼 현행 의료서비스는 돌봄에 적합하지 않고 간호법이 해법이 될 수도 있다. 국민 의료서비스 강화를 위해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토론회가 의료계를 설득하기 위함이라면, 간호조무사·응급구조사·요양보호사·방사선사·보건의료정보관리사 등 소수 직역이 간호법 반대하는 이유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의료계가 13개 보건복지의료연대까지 구성해가며 이에 반대하는 이유는 간호법 제정 시 대부분 소수 직역 업무가 간호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간호계는 이 같은 우려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간호법 이전에도 업무 침탈을 경험해왔던 직역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들을 외면한 채 의사와 간호법 생중계토론회를 진행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말한 대로 '토론자가 아닌 청중을 설득하기 위함'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소주제로 의사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의대 증원을 넣은 것도 '상대가 화를 내면 바로 거기에 약점이 있는 것'이라는 구절을 충실히 이행한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간호법으로 인한 소수 직역 일자리 강탈 우려를 뒤로 한 채 부모돌봄을 내세우는 것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따지고 보면 소수 직역들 역시 모두 누군가의 자녀거나 부모다. 돌봄은 존엄한 가치지만 이들의 생업보다 앞설 순 없다.
토론의 사전적 의미는 더 나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협력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서로의 주장의 우위를 결정하기 위한 콜로세움으로 변질된 것 같다. 이 같은 우려의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소수 직역과 간호계의 토론이 이뤄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