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한국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 김재혁 센터장
오래전 전공의 때 일이다. 같이 근무하던 인턴 선생님들이 전공의 시험을 위해 모두 병원에 없던 상태였다. 보통 인턴선생님들은 동맥혈 검사, 심전도 검사 등 비교적 간단한 술기와 검사를 시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간혹 술기 중에 식은땀이 날 만큼 힘들기도 하다. 이날은 인턴선생님들의 부재로 응급실에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의사들만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중증 환자들이 많았다.
나는 응급환자들의 진료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위해 최대한 몸놀림을 빠르게 했다. 물론 환자를 진료하는 일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처방을 먼저 입력해야만 수액이나, 진통제 주사라도 투약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들어오는 환자들을 빠르게 초진 하는 것이 응급실에서는 중요한 일이다.
계속 실려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땀은 비 오듯이 흐르고,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50대 남성이 가슴을 움켜쥐고,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들것에 실려왔다. 나는 바로 심전도 검사 장비를 가지고 환자에게 다가가서 "가슴이 아프세요? 언제부터 그러셨어요?"라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환자는 아프다는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심전도를 체크하기위해 협조가 잘 안되는 환자의 상의를 힘겹게 젖히고, 심전도를 붙여야 하는데, 여전히 환자가 몸부림을 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에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여기 CPR 이요~" 라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패혈성 쇼크가 의심되어 검사 진행중이던 다른 환자에게 심정지가 발생한 것이다.
앞의 환자는 급성심근경색이 의심되는데 협조가 잘 안되어 검사는 지연되고 있고, 뒷편의 환자는 당장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야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응급구조사에게 "미안하지만 여기 심전도 좀 찍어줘요~" 급하게 소리 친 후, 심정지가 발생한 환자에게 뛰어갔다. 기관 삽관을 시행하고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환자가 눈앞에서 사망하는 것은 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진료하는 의사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얼마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던 중, 심전도 검사를 시행한 응급구조사가 결과지를 들고 옆에 와서 보여주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면서 흘깃 쳐다보아도 심전도상 명확하게 급성심근경색 소견이 보였다.
심장마사지를 하다 잠시 교대를 하고, 심장내과에 전화로 급성심근경색 환자가 있음을 알린 후, 다시 심폐소생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전공의로서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나 스스로는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현행법상 의사와 임상병리사 외에는 심전도를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은 바쁘다. 대형병원의 커다란 응급실에는 많은 환자, 의료진들로 북적거린다. 앉아서 진료를 받기도 하고, 복도에 누워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들어갈 곳 조차 없는 경우도 있어 병원 밖에서 대기해야하는 환자들도 종종 발생한다. 그것도 생사가 오가는 환자들로 가득 찬 상태로 말이다.
응급실이 분주한 것은 비단 대형병원만의 일이 아니다. 응급실이라고 하는 곳은 작은 병원이라고 마음이 편안할 수 없는 공간이다. 설령 환자 수가 적다 하더라도 중증 환자가 어느 순간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경우에 따라 내원하여 안정적으로 진료받던 환자의 상태가 급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단 한명이라도 위중한 환자가 발생한다면, 응급실의 모든 의료진은 초긴장 상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최대한의 집단적 집중력과 팀웍을 발휘해야 한다. 환자가 나빠질 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을 다시 검토하고, 모든 가용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력, 장비, 시설 등 그 어떠한 것이라도 환자를 살리기위해서는 충분히 활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면, 의료진은 기도 확보를 하고, 산소를 투여하며, 혈관 확보를 해야하며, 동시에 흉부 X-ray, 심전도, 혈액 채혈 등 긴급한 검사들을 시행한다.
이는 단계적으로 시행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과정이 늦어질수록 환자는 위험할 수 있기에, 최대한 신속하게 시행하는 것이 응급의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렇게 신속한 처치를 위해서는 능숙하면서도 많은 인력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응급의료를 바라본다면, 응급 상황에서의 의료종사자들의 각 직역 간의 법적인 경계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수 밖에 없다. 과연 환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행위를 시행하는 주체를 어떠한 자격으로 구분 짓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환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서 말이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를 해 본다면 심폐소생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심폐소생술은 엄연히 의료행위이다. 그것도 갈비뼈 골절, 장기 손상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의료행위이다. 그러나, 만약에 의료행위이기 때문에 의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할 수 없다면 어떨까? 병원 밖에서 발생하는 심정지 환자는 모두가 치료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사망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심폐소생술과 같은 처치는 의사, 간호사, 응급구조사는 물론이고, 의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적극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의료에서 전문성은 당연히 중요하다. 자칫 서투른 지식과 술기는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특히 침습적인 처치를 시행하는 부분에서는 더욱더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심전도와 같은 비교적 검사가 어렵지않고, 최종적으로 의사가 반드시 확인해야하는 검사 수행의 주체를 직역의 경계선으로 나누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규정들은 상대적으로 인력이 부족한 지방 병원 응급실에서는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만약 전공의 때, 심전도를 누군가 대신 찍어주지 않았다면 그 흉통 환자는 어찌되었을까? 별로 생각하고 싶지않은 상황이다.
의료는 매우 다양한 전문가들이 협력해야만 적절한 치료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의료시스템의 최종적인 목표는 환자의 생명이다. 그렇기에 법과 제도는 모든 의료의 전문 직역 간의 이해관계를 넘어, 오로지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