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다.
교집합부분은 두사람이 같이 생활하면서 생긴다.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는 교집합이 없다.
같이 생활을 하는 가족이라도 교집합의 크기는 다 다르다.
교집합의 크기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결정한다.
나는 그 사람과 교집합이 0.5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0.1이라면 나와 그의 교집합은 0.1이다.
교집합의 크기가 (+)면 비교적 괜찮은 관계다.
(-)이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된다. 가족들간에도 남보다 못한 관계가 비일비재하다.
팀에서도 마찬가지다.
팀장과 각 팀원이 가지는 교집합크기가 다 다르다.
팀원끼리도 마찬가지다.
저 팀원, 저 팀장이 계속 같이 근무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고 그 팀원, 그 팀장과 같이 일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수치한 분이 스티븐 코비S.Covey다.
코비는 교집합부분을 감정계좌emotional bank accounts라 했다.
은행계좌는 한번에 왕창 거액을 예금하고 찾지 않으면 유지되는데 감정계좌는 한번에 크게 늘리기 힘들고 유지하기도 힘들다.
오히려 '매몰찬 한마디'로 단번에 (-)통장이 되는 수도 있다. 감정계좌의 크기 결정도 상대방에게 있다.
나는 그에게 잘 한다고 하는데 그는 냉냉하다면 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배고픈데 극장가자고 하는 꼴이다.
코비가 이론적이라면 신경숙은 현장의 목소리였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내게 '아하'하는 깨달음을 주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의 양, 크기와 밀도가 다 다르다는 깨달음이었다.
치매걸린 엄마가 지하철에서 사라지자 늘 엄마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엄마의 나이도 정확히 모르는 것부터 시작한 이야기다.
엄마의 모든 소망과 꿈을 먹고 자란 큰아들, 친구처럼 의지하며 무람없던 큰딸, 자식 기르는 기쁨을 알게 해준 작은딸, 평생 살림의 책임을 떠안기며 밖으로만 돌던 아버지, 엄마의 부재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아프게 쏟아낸다.
가족이지만 엄마와 다 다른 감정계좌를 가지고 있는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코비에게 '대인관계의 크기를 그림으로 그려서 확인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신경숙은 내게 '사람간의 관계의 양, 크기 뿐만 아니라 밀도'까지 가르쳐 주었다.
나의 대인관(view)은 '엄마를 부탁해'를 읽기전과 읽은 후로 나누어 진다.
나는 지금도 '엄마를 부탁해'책을 책꽂이에 두지 않고 책상위에 두고 있다.
붉은 책은 나에게 메시지를 계속 던져 주고 있다.
출근하기 전에
출근하면서
일하면서
퇴근길에
살펴볼 사람을 찾는다.
나는 코비와 신경숙을 만나고 난 다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왜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을까?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 왜 사람들이 내게 관심이 없을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