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일류' 제도는 '제자리'

발행날짜: 2025-12-15 05:00:00
  • 의료산업2팀 김승직 기자

정부가 연일 'AI 3대 강국' 도약을 외치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를 출범시키고, 2027년까지 민간합동으로 65조 원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목표다. 바야흐로 AI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지표가 된 세상이다.

하지만 의료 분야에선 얘기가 다르다. 국내 의료 AI 기업들의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수익성 문제로 신음하는 현실이다.

실제 국내 대표 의료 AI 기업들의 성적표를 보면 루닛은 지난해 대비 매출이 100% 넘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수백억 원대 영업손실을 기록 중이다. 뷰노와 딥노이드, 제이엘케이 등도 적자 폭을 줄이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는 이들 기업의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제도다. 의료 AI 시장 진입 관문인 '신의료기술평가'는 녹록지 않은 데다가, 혁신의료기술로 지정돼도 비급여나 선별급여를 받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다.

평가 유예 제도를 통해 일부 비급여 처방이 가능해졌지만, 일선 현장에선 '과잉 검사'라는 환자들의 시선까지 감내해야 한다. 명확한 급여 기준이 없으니 환자에게 비용을 청구하기도, 병원이 비용을 떠안기도 애매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의료 AI 기술은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일각에선 미국과 견줄 정도의 기술력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 국내 기업들은 최근 시카고에서 열린 북미영상의학회(RSNA 2025) 등 글로벌 무대에서 뇌졸중, 암 진단 솔루션을 선보이며 호평받았다. FDA 인허가 건수도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기술적 완성도도 검증됐다.

문제는 이런 혁신 기술을 현장에 적용할 '파이프라인'이 막혀있다는 점이다. ChatGPT 등 생성형 AI는 이미 일선 개원가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의료 AI는 지지부진하다.

국내 의료 AI 기업들이 해외 진출에 목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내수 시장만으로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헐값에 공급되는 소프트웨어를 해외에서만 비싸게 팔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내수 시장에서 합리적인 가격 모델이 만들어져야, 이를 근거로 해외에서도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대한민국 의료 AI는 이미 강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정작 제도가 관련 기업의 글로벌 선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

그럼에도 정부 정책은 여전히 산업 육성이라는 '개발' 단계에만 머물러 있는 모양새다. R&D 자금을 쏟아부어 기술을 고도화해 놔도, 정작 시장에서 쓰이지 못하면 사장될 수밖에 없다. 기술 개발에는 수조 원을 쓰면서 정작 기술 활용을 위한 국민건강보험 재정 투입에는 인색한 것이 정부 정책의 현주소다.

정부의 태도 변화가 시급하다. 기술 개발이 전반전이라면, 시장 안착을 위한 제도 정비는 후반전이다. 전반전만 잘 뛰고 경기를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혁신 기술에 대한 합당한 보상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AI 선도국의 자세다.

기술은 이미 준비됐다. 이제 필요한 건 정부의 요란한 구호가 아닌, 현장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가 정책이다. 의료 AI가 전시용 기술이 아닌 의료 현장의 필수재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구조적 뒷받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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