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원장, 업무정지 행정소송에서 이겼지만 상처 뿐인 승리
* 신분 보호를 위해 해당 원장의 지역명을 바꿨음을 알립니다.
"꿈에도 몰랐지. 철의 여의사 사건으로 유명했던 그 사람이 내게도 나타날 줄이야…"
'실사계의 저승사자'. 광진구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김 원장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실사팀을 이렇게 기억했다.
2007년을 떠들썩하게 한 '강압적인 현지조사' 논란을 뉴스로 봤지만 이런 일의 당사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사건은 심평원 직원의 서면 수납대장 원본 요구를 거절했다가 업무정지 1년 처분을 받은 김 모 원장이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의료계의 이슈로 부상했다.
김 모 원장은 2011년 행정법원과 대법원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내며 심평원을 이긴 '철의 여의사'로 떠올랐지만 5년간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질 정도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광진구의 김 원장 역시 이런 뉴스를 접하며 이제는 강압적인 현지조사가 없어졌겠거니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문제가 터진 건 2011년. 갑자기 복지부의 현지조사 위임장을 가지고 4명의 심평원 실사 직원이 들이닥쳤다.
"먼지가 날 때까지 터는 게 현지조사"
17년간 아무런 조사를 받지 않은 김 원장은 당황했다. 왜 자신이 이런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실사팀은 3일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의원을 아예 점유하다시피 했다. 환자들 역시 수근대기 시작했다.
어쨌든 3일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달라는 자료를 다 줬다. 조사에 착실히 임했지만 도는 점점 지나쳐 갔다.
영수증부터 검사지까지 점차 제출 항목을 늘려갔다. 나중엔 쉴 공간이 필요하니 수면실까지 내달라고 요구했다. 전자차트 기록도 필요하다고 해서 모든 DB를 USB에 담아 넘겼다.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자 실사 팀은 조사 기간을 2일 더 연장했다.
김 원장은 "털어서 아무 것도 없으면 현지조사를 마쳐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아니라 무조건 건수를 잡겠다는 분위기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지조사 5일째. 마지막 날 문제가 터졌다. 실사 팀장이 의원에서 운영하는 실제 장부를 달라고 했다.
김 원장은 실제 장부는 없고 이미 프린트를 해놓은 수백여 페이지의 '외래 완료 환자 목록'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다.
수진자명부터 처방일수, 급여총액, 본인부담금, 진료비, 비급여, 카드수납액, 청구액 등 모든 자료가 외래완료 환자 목록에 기록돼 있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실갱이가 계속됐다. '실제 장부'를 내놓으라는 압박이 먹히지 않자 팀장은 본인부담 수납대장 제출을 거부했다는 내용이 담긴 사실확인서를 가져오더니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나 그냥 갈테니까 고생 좀 해봐!"
서명을 거부하자 팀장은 환자 목록 페이지를 집어던지며 "나 그냥 갈테니까 고생 좀 해봐"라고 고성을 내질렀다.
김 원장은 귀를 의심했다. 성실하게 자료를 제출했는데도 반말로 마치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몰랐다.
화가 났지만 실사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참고 넘겼다. 그렇게 일단락된 줄로만 알았다.
6개월 후. 복지부에서 한통의 편지가 날라들어왔다. 내용은 청천벽력 같은 업무정지 처분 1년. 자료 미제출에 따른 조치였다.
황당한 것은 실사팀의 이중적인 잣대다.
전자차트 DB를 제출했지만 전자서명이 없다는 이유로 자료로 인정하지 않은 반면, 비슷한 시기 분당 Y의원의 경우는 전자차트 DB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1년의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다는 말을 들었다.
억울했지만 소송 밖에는 길이 없었다. 실사팀장이 "고생 좀 해봐"고 한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1심에서는 패소했지만 다행히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져 1년의 업무정지 집행을 보류시키는데 성공했다.
김 원장은 "철의 여의사 사건이 의료계에 알려진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내가 당한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실사를 당한 과정에서 마치 인생의 패배자와 같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호소했다.
조마조마한 순간이 지나고 올해 6월 김 원장은 2심에서 승소를, 10월 31일에는 대법원에서 업무정지처분을 취소하라는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법원은 기록 제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는 점을 인정, 김 원장의 손을 들어줬다.
김 원장은 승소 소식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기쁨도 잠시. 최근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분당 Y산부인과가 결국 폐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자료 제출의 적정성을 따졌다는 이유로 분당 Y산부인과는 업무정지 1년 처분을 받고 폐업을 하게 됐다"면서 "해당 산부인과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승소한다고 해도 결국 상처뿐인 승리"라고 하소연했다.
김 원장은 "이제는 더 이상 강압적인 실사에 당하는 의사들의 사례가 없어야 한다"면서 "실사의 부작용으로 인해 의료인이 생업을 포기하는 일을 막기 위해선 최종 확정판결 이후 업무정지 처분을 집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처벌 근거를 만들기 위해 본인부담 수납대장의 제출을 거부했다는 사실확인서에 서명하라는 식의 강압적 실사는 사라져야 한다"면서 "만일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괘씸죄에 걸린 채 1년간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