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페인으로 간다
파스텔 톤의 도시 리스본(1)
조형진 가이드로부터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사를 1시간 넘게 듣다보니 창밖이 밝아오고 버스 앞 유리창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버스가 서면 비가 멎을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나라를 구한 분과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스페인과의 국경을 이루는 타호강을 건너 포르투갈로 들어간다.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니 세비야의 호텔을 떠난 지 1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시차가 있어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1시간 늦게 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고속도로는 스페인과 또 다르다. 구비가 많지 않아 곧게 뻗어있고, 스페인에는 볼 수 없던 하이패스가 설치되어있다. 하이패스를 최초로 개발한 나라라고 한다. 테주강에 걸려 있는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에 들어 설 무렵 날씨가 갠다.
과거 독재자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라고 부르던 이 다리는 카네이션혁명을 기리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4년 4월 25일, 40년을 넘게 이어진 살라자르 정권의 독재와 해외식민지에서 이어지는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대하여 반발한 좌파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살라자르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오는 군대의 앞에 작은 소녀가 막아섰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는 순간, 소녀는 카네이션을 내밀었고 군인은 꽃을 받아 총구에 꽂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주면서 지지를 표시했고, 결국은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은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아시아로부터 들여오는 향료와 브라질에서 발견된 금과 귀금속 등이 유입되면서 호황을 맞이했지만, 국내 산업기반이 없어 영국으로부터 소비재를 수입해야 했다. 결국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영국으로 나가고 말았다.
1807년 나폴레옹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략하였고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했다. 19세기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혁명, 전쟁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당했다.
1910년 10월 5일에는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노동자 투쟁과 소요 사태, 재정위기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1926년 군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1928년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32년에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살라자르는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 이스타두 노부 (신국가체제)를 수립하여 국가재정을 회복하였지만, 파시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의 사회적 분위기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읽을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만큼이나 정확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전문헌학 수업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손에 넣은 책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끌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찾아간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체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27쪽)"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의 서문의 일부이다.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본 유혹적인 햇살이 그레고리우스의 발길을 붙들어 아마데우의 행적을 뒤쫓게 한다.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비밀경찰의 감시에 리스본 시민들이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는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아마데우가 졸업식장에서 라틴어로 한 연설문의 한 구절이다.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가면서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리스본시가 파스텔톤의 도시'라고 하는 표현이 그렇게 안성맞춤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70살이 되던 해 집을 팔고 세계를 떠돌면서 살고 있다는 린과 팀 마틴 부부는 보헤미안 같은 삶의 이야기를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에 담았는데, 포르투갈이 마지막으로 소개된다 .
첫인상이 이스탄블과 샌프란시스코를 합친 것 같았다는 린이 테주강에서 페리를 타고서 바라본 리스본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빨간색 다리 위로 뜬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리스본은 파스텔 색의 웨딩케이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린이 리스본을 샌프란시스코에 비유한 것은 아마도 4월 25일 다리가 금문교와 같은 사장교인데다가 교각이 빨간 페인트로 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버스가 다리를 지나 호시우(Rossio)광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면서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을 떠올렸다. 리스본은 7개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라서 길이 굽이굽이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봄이 되어 길가에 꽃화분이라도 늘어놓으면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이 오히려 부러워할 것만 같다.
리스본의 명동이라는 호시우광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광장 부근에 있는 먹자골목의 한 식당에서 포르투갈의 전통음식 바깔라우(Bacalhau)를 먹었다. 바깔라우라는 이름의 염장한 대구를 재료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요리를 이르는 것 같다. 우리가 먹은 바깔라우 요리는 염장한 대구살을 부숴 양파, 계란 그리고 감자 등과 잘 으깨서 만든 음식이었는데, 살을 부순 탓인지 양념이 잘 배어서 대구살의 퍼석한 식감을 느낄 수 없다. 식당에 따라서는 짠맛이 강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곳 식당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찾는 탓인지 많이 짜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에는 꼬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까지 걸어갔다. 호시우광장에서 꼬메르시오 광장까지 이르는 지역은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반에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면서 건설된 지역이다.
당시 세 차례의 강진이 이어지고 이어서 11경에는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세 차례나 테주강을 거슬러 해안을 덮쳤다. 지진이 있은 직후 사망자가 10만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시간이 경과되고서는 2만5천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시민들이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한다.
건축비평가 니콜라스 시라디는 '운명의 날'에 리스본 대지진을 전후한 리스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격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잠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로 해안가를 덮쳤던 테주강이 잔잔해진 뒤에야,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은 리스본의 종말을 경고한 예언들을 기억해냈다.”라고 시작한 서문은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최후의 날-당대 사람들은 리스본 지진을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1755년 11월 1일은 최후의 날에 다름 아니었다. 땅과 바다, 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리스본을 돌이킬 수 없는 폐허로 만들었다."라고 마무리된다.
조형진 가이드로부터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사를 1시간 넘게 듣다보니 창밖이 밝아오고 버스 앞 유리창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버스가 서면 비가 멎을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나라를 구한 분과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스페인과의 국경을 이루는 타호강을 건너 포르투갈로 들어간다. 스마트폰의 시계를 보니 세비야의 호텔을 떠난 지 10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시차가 있어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1시간 늦게 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고속도로는 스페인과 또 다르다. 구비가 많지 않아 곧게 뻗어있고, 스페인에는 볼 수 없던 하이패스가 설치되어있다. 하이패스를 최초로 개발한 나라라고 한다. 테주강에 걸려 있는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에 들어 설 무렵 날씨가 갠다.
과거 독재자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라고 부르던 이 다리는 카네이션혁명을 기리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4년 4월 25일, 40년을 넘게 이어진 살라자르 정권의 독재와 해외식민지에서 이어지는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대하여 반발한 좌파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살라자르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오는 군대의 앞에 작은 소녀가 막아섰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는 순간, 소녀는 카네이션을 내밀었고 군인은 꽃을 받아 총구에 꽂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주면서 지지를 표시했고, 결국은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은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아시아로부터 들여오는 향료와 브라질에서 발견된 금과 귀금속 등이 유입되면서 호황을 맞이했지만, 국내 산업기반이 없어 영국으로부터 소비재를 수입해야 했다. 결국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영국으로 나가고 말았다.
1807년 나폴레옹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략하였고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했다. 19세기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혁명, 전쟁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당했다.
1910년 10월 5일에는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노동자 투쟁과 소요 사태, 재정위기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1926년 군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1928년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32년에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살라자르는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 이스타두 노부 (신국가체제)를 수립하여 국가재정을 회복하였지만, 파시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의 사회적 분위기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읽을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만큼이나 정확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전문헌학 수업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손에 넣은 책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끌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찾아간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체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27쪽)"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의 서문의 일부이다.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본 유혹적인 햇살이 그레고리우스의 발길을 붙들어 아마데우의 행적을 뒤쫓게 한다.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비밀경찰의 감시에 리스본 시민들이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는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아마데우가 졸업식장에서 라틴어로 한 연설문의 한 구절이다.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가면서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리스본시가 파스텔톤의 도시'라고 하는 표현이 그렇게 안성맞춤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70살이 되던 해 집을 팔고 세계를 떠돌면서 살고 있다는 린과 팀 마틴 부부는 보헤미안 같은 삶의 이야기를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에 담았는데, 포르투갈이 마지막으로 소개된다 .
첫인상이 이스탄블과 샌프란시스코를 합친 것 같았다는 린이 테주강에서 페리를 타고서 바라본 리스본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빨간색 다리 위로 뜬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리스본은 파스텔 색의 웨딩케이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린이 리스본을 샌프란시스코에 비유한 것은 아마도 4월 25일 다리가 금문교와 같은 사장교인데다가 교각이 빨간 페인트로 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버스가 다리를 지나 호시우(Rossio)광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면서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을 떠올렸다. 리스본은 7개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라서 길이 굽이굽이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봄이 되어 길가에 꽃화분이라도 늘어놓으면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이 오히려 부러워할 것만 같다.
리스본의 명동이라는 호시우광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광장 부근에 있는 먹자골목의 한 식당에서 포르투갈의 전통음식 바깔라우(Bacalhau)를 먹었다. 바깔라우라는 이름의 염장한 대구를 재료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요리를 이르는 것 같다. 우리가 먹은 바깔라우 요리는 염장한 대구살을 부숴 양파, 계란 그리고 감자 등과 잘 으깨서 만든 음식이었는데, 살을 부순 탓인지 양념이 잘 배어서 대구살의 퍼석한 식감을 느낄 수 없다. 식당에 따라서는 짠맛이 강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곳 식당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찾는 탓인지 많이 짜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에는 꼬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까지 걸어갔다. 호시우광장에서 꼬메르시오 광장까지 이르는 지역은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반에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면서 건설된 지역이다.
당시 세 차례의 강진이 이어지고 이어서 11경에는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세 차례나 테주강을 거슬러 해안을 덮쳤다. 지진이 있은 직후 사망자가 10만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시간이 경과되고서는 2만5천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시민들이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한다.
건축비평가 니콜라스 시라디는 '운명의 날'에 리스본 대지진을 전후한 리스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격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잠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로 해안가를 덮쳤던 테주강이 잔잔해진 뒤에야,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은 리스본의 종말을 경고한 예언들을 기억해냈다.”라고 시작한 서문은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최후의 날-당대 사람들은 리스본 지진을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1755년 11월 1일은 최후의 날에 다름 아니었다. 땅과 바다, 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리스본을 돌이킬 수 없는 폐허로 만들었다."라고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