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의대 본과4년 김성재

"3개월 전에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나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아들은 이 세계로 전생을 한 것 같으니까..."
하야마 미오는 3개월 전 하나뿐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시간의 끝에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다소 코믹해 보이기도 한다. 갑자기 트럭에 치여서, 다른 세계로 전생하고, 세상을 구하고 돌아온다는 아들이 즐겨 읽던 만화의 서두를 보고서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던 고등학교 동창을 떠올린 것이다.
"우리 아들이 죽었어. 하지만 우리 아들은 이 세계 전생을 한 것 같아. 넌 학창 시절부터 그런 만화를 봤잖아. 다시 돌아올 방법을 찾아줘."
본 만화의 장르는 판타지가 아니라 드라마다. 등장인물들은 이 세계를 넘나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표지 속에서 상복을 입은 채 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하야마 미오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차분하다.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죽지 않고 이 세계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노라고 믿고 있다. 방어기제 부정(Denial) 혹은 합리화(Rationalization)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는 이 세계로 가는 방법을 닥치는 대로 모색하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은 안락하다. 현실에서도 말이다. 나 역시 회피를 즐겨 한다. 내 인생의 신조는 오로지 건강과 행복이기에 귀찮고 복잡한 것은 미루고 나중에 생각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현재만을 살아간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산다. 주로 기분이 좋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쉽게도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각력과 심폐지구력이 없다. 결국 모든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저주로 남아 삶을 황폐화하고, 언젠가는 더 크게 몸집을 불려 필연적으로 다시 등장한다. 특히 밤에.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은 후회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미래. 회피는 회피일 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은 필연이다. 사실은 괴롭다.
하야마 미오 역시 이 세계로 향하는 방법을 찾으며 울기도 웃기도 하지만, 결국 극단적인 상태로 치닫게 된다. 그녀는 영원히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떠올린다.
"아, 이거? 죽으려는 거 아니야. 이 세계 전생하려는 거지"
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그의 동창 도바라 토모타는 지난 며칠 동안 미오의 이 세계 연구를 도운 장본인이다. 이 세계 전생이라는 소재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그녀에게 외친다.
"이 세계는 없어요. 저는 그 세계를 정말 좋아해요. 제게 있어서 이 세계란 구원이고, 꿈이고, 근사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 세계가 꿈만 같은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어요"
방어기제가 붕괴한 미오는 몹시 괴로워하지만, 작품에서 최초로 감정을 한껏 드러내며 울부짖는다. 죄책감, 고통, 절망. 댐이 개방되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듯 분출되면 그 후에 남은 것이 있다.
나를 위해 이곳에 달려온 토모타, 그와 함께 이 세계를 연구한 허무맹랑하지만 즐거웠던 시간.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인 자연,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했던 기억. 이들은 미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고통만이 그녀의 전부가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미오는 그간 진실로부터 도망쳐왔다. 과연 미오가 아들이 이 세계에 살아 있다고 믿었던 시간은 '회피'이기 때문에 그른 것이었을까? 나는 조금 다르게 그 시간을 '휴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미오는 훌륭한 방어기제를 펼쳐 우선 자신의 신체를 안정시켰다. 이 세계의 존재는 미오에게 당장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었다. 밥을 먹게 해주었고 잠을 자게 해주었다.
그렇게 번 시간 동안 토모타와 함께 웃을 수 있었고, 그 기억이 다시금 그녀를 지지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녀는 본인도 모르게 다시 살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이 세계가 가짜임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미뤄뒀던 숙제를 하듯 감정을 고통스럽게 소화했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흔들거리면서도 끝내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측은하면서도 숭고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미오는 아들이 없는 이 세계가 이미 이 세계로 느껴지기에 새로 시작해야겠다고 말한다. 비록 모든 것이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그녀에게 다음이 주어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감당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린다. 영원한 회피란 없기에 언젠가는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투쟁의 과정이 무결할 필요는 없다.
완벽하지 않아도, 극적이지 않아도, 평범한 우리는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중요한 것은 보급이다. '무조건 회피'가 아닌, '일단 휴식'하는 것.
삶은 장기전이기에 우리의 전술은 휴식과 보급을 고려해야만 한다. 체력을 안배하고 마음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괴로운 것 말고도 우리의 삶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이런 핑계를 대고 또 복잡한 것으로부터 달아난다. 고민해야 할 일이 많지만 운동을 하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목욕탕으로 향한다. 개운하게 나오면 우유 한 잔 마시고, 집에 와서 나른하게 만화를 읽는다.
이 순간이 영원한 낙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토모타의 말처럼 현실에 이상향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내색 없이 지쳤을 나의 정신과 육신을 달래려 '휴식'한다. 나약한 나는 그래야만 다음 날 전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
물론 모두의 상황과 방식은 천차만별이니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때론 괜한 마음 졸임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는 그저 잘 먹고 잘 잤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