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예 위해 골프도 포기했어요"

장종원
발행날짜: 2005-03-15 06:20:03
  • 중앙의대 신경외과 김영백 교수

중앙대병원 신경외과 김영백 교수
구로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탄지 20여분이 채 지나지 않아 황량한 벌판에 멀쭘히 서 있는 KTX 광명역이 찾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인데도 이런 공간이 있나 싶다.

그 곳에서 다시 5분 정도 차를 타자 덩그라니 집 두채가 나란히 있는 김영백 교수(53, 중앙대병원 신경외과)의 작업실을 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에 3~4시간이라도

그의 작업실에는 세계 각지에서 수입해온 커다란 나무들과 근처 산에서 주워온 나무들이 한데 모여 있었으며, 학회 등으로 외국에 갈때마다 구입해 들여온 목공예 기계들이 눈에 띄었다.

대방동 지하 조그만 창고에서 이쪽으로 작업실을 옮기게 된 것은 2~3년전의 일. 군산의 어머니가 광명으로 오시면서 그 한켠에 작업실을 꾸렸다.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나무들이 쌓여져 있고, 범상치 않은 나무 의자들이 눈에 띄었다. 의대 교수의 작업실에 나무가 있는 이유는 그가 목공예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목공예 작품과, 나무 재료들을 소개하면서 즐거운 웃음이 떠나지 않는 김 교수. 그에게 목공예는 특별한 존재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또 너무 행복해 보였다.

여기저기서 구해온 작업 재료인 나무들.
중앙대병원의 기획실장. 신경외과 교수. 학회 재무이사, 척추포럼 운영, 노인신경의학회 학술이사, 중앙대병원 신우회 회장. 직함이 너무 많고 너무 할일이 많았지만 꼭 일요일에는 이 곳을 찾아 3~4시간이라도 작업을 한다.

고작 그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의 분량은 얼마되지 않지만, 그것만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애정을 갖고 있다. 목공예가 일주일을 사는 힘이라는 것. 김 교수는 "아무리 바빠도 토요일에는 일을 끝낸다"면서 "골프를 좋아했지만 목공예를 위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shaker funiture를 꿈꾸며

김 교수가 목공예를 시작한지는 이미 10여년이나 됐다. 그러나 목공예를 꿈꾼지는 그보다 더 오래된 일. 대학을 건축공학과로 갈 생각도 했었으나 아버님의 뜻에 따라 의대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취미로서 목공예를 할 수 있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한다면 다양성을 추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어려서부터 너무나 하고 싶었던 일을 뒤늦게 찾은 것은 10년전. 직접 배워본 적은 없지만 외국의 서적을 구입하고 외국 인터넷 사이트들을 뒤지면서 틈틈히 공부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목공예의 저변이 넓지 않기 때문에 나무 구입부터 하나하나가 어려운 일이었다. 재료로 쓰이는 나무를 소량으로는 수입할 수 없어 수입업자를 찾아 다니며, 부탁하거나 버려지는 나무들을 사오기도 했다.

김영백 교수가 직접 제작한 작품들. 자연적인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렇게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나무 구하기도 어렵지 않고, 가끔 실수를 하긴 하지만 어느정도 작업의 노하우도 얻었다.
작품도 쌓여가고 있다. 작은 액자에서 부터 시작해 이제는 점차 규모가 커지고 있다. 테이블도 만들고, 탁자도 만들고, 이제는 가구에도 관심이 간다.

김 교수는 특히 셰이커 퍼니처(shaker furniture)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셰이커 퍼니처는 미국의 셰이커 교도들이 만든 가구로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것. 자신도 자연미를 강조한 스타일을 추구하고 싶다.

"목공예도 아이디어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새롭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필요하죠. 요즘 독창성이 화두라고 하는데 자연적인 것만큼 독창적이고 다양성이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든 탁자에 오일을 바른 후 20분간 두었다가 마른 헝겊으로 닦아 내면 나무의 빛깔이 아름답게 살아난다고 한다.
은퇴하면 목공예에 본격적으로 심취

좀 더 본격적으로 일을 준비하면 전시회도 해보고 싶어한다. 그는 하나의 테마를 잡아서 하겠다는 생각이다.

김 교수는 언제일지도 모를 은퇴 후의 생각까지 품고 있다. 아내와 함께 미국의 오레곤 주로 목공예와 관련한 연수를 2~3년 갖다올 생각이다.

이후에는 국내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모아 동호회를 만들고, 재료를 공동구매하고 만드는 작업들을 해보고 싶어한다. 2만불 시대가 오면 목공예의 저변도 그만큼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이야 생활이 빠듯하니깐 여유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오겠죠"

김 교수의 작업실을 방문한 그날. 김 교수는 새로 이사한 여동생에게 선물할 탁자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오일을 바르고 헝겊으로 다시 닦아내 나무의 질감과 색감을 살리는 작업이다.

열심히 테이블을 손질하면서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 김 교수의 모습에서 그가 의사가 아닌 목공예가의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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