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 박경철 (신세계 연합클리닉 원장)
<고정칼럼 집필자 소개> |
인터넷에서 필명'시골의사'로 통하는 박경철 외과전문의는 국내 최고의 사이버애널리스트로 MBN 주식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으며 주식시장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날카로운 분석력을 인정받고 있다.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촌놈이 주말에 과천 현대미술관 구경을 갔다
미술관 입구로 들어섰다. 어떤 작가의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입구에는 큰 글씨로 "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본다"라고 쓰여 있었다.
필자는 작품을 감상하기도 전에 이 슬로건 속에 숨겨진 폭력성을 확인하고 말았다.
그 속에는 "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봤다"라는 작가의 오만 방자함이 있었고, 그것은 필자와 작품사이에 건널 수없는 선을 긋고 있었다. 필자는 입구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이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봤다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무엇일까?" 차라리 " 나는 내가 본 그대로를 본다" 혹은 "나는 차창에 비친 세상을 본다" 정도로 슬로건을 삼았어도 나의 어깨는 한결 가벼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필자는 예술에 관해서 그리 큰 조예는 없다, 그러나 그 작가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술이 아닌 "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였다. 자리를 옮겨 상설미술관에 전시된 내노라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살펴보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지겨운 진술의 흔적들을 여기저기서 발견 할 수 있었다.
예술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는가? 그렇다면 감상자는 작가의 의식을 읽어 내야만 한다는 과중핱 짐을 숙명적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무엇을 파악해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고, 다만 염원 할 뿐 이라고 말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염원이 색채속에 강하게 녹아 있으면 강요보다 더 무거운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이쯤에서 필자는 1964년 "마르셀 뒤상"의 변기를 떠올린다.
뒤상은 시중 어디에서나 구입 할 수 있는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 함으로서 파격적인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당연히 그를 향해 기성화단의 평자들로부터 온갖 비판과 구설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행위의 저변에 있는 그의 예술관은 그가 왜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예술가들이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과 비윤리성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의 작품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으며 , 감상자들이 그것을 해석하는 과정을 가짐으로서 창조를 보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나는 예술가의 "매개적인 측면" 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뒤상이 공격한 것은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대중을 무시하는 예술가들의 무모한 독주였고, 이러한 독주는 예술의 영역 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 부딪힐 수 있는 일상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독주속에서 작가정신과 장인정신은 독단과 맹목으로 변질되고, 대중은 한낱 미천한 것들, 뭘 모르는 것들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뒤상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술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이지만, 기존에 애써 무시되어왔던, 관객의 역할과, 관람자의 눈빛, 그들의 잊혀졌던 목소리 를 부활 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엄숙한 전시회장에서 일단의 예술가들을 향해 " 에라 니들은 변기통이다.. " 라고 당당히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한 독주는 예술에만 있는것이 아니라, 정치,경제, 우리의 일상의 모든 구석에 널려있는 것이다.
필자는 다시 이쯤에서 " 애써 무시되어 왔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
아울러 우리에게 강요되어진 관객의 역할과, 잊혀졌던 목소리에 대해서 . 그리고 우리를 세뇌하려는 "진술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를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고민하자..
그리고는 , 전시회에 출품된 변기통에 대해, 야료하고 딴지를 거는 "기성 이라는 이름의 누런 주둥이"들을 향해, 관객임을 거부하는 대한민국의 의사들이 각자의 고추를 곧추 세우고, 오줌발을 한방 시원하게 갈겨버리는 퍼포먼스를 벌려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