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 박경철 (신세계 연합클리닉 원장)
장자가 제자를 데리고 산길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목수가 그 옆에 있었지만 베려고 하지 않았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묻자 , 목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
장자는 산에서 내려와 친구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는 기뻐하며 하인을 시켜 거위를 잡아 요리하게 하였다, 하인이 주인에게 물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을 모르는데 어느놈을 잡을까요?" ,"울 줄 모르는 놈을 잡아라"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렸지만, 친구분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무 쓸모가 없지도 너무 쓸모 있지도 않겠다, 도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도(道)와 덕(德)"을 타고 소요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명예도 구하지 않고 허물도 짓지 않고 때로는 귀한 용이 되었다가, 때로는 천한 뱀이되어, 대세에 따라 더불어 변화해 갈 뿐 그 무엇이던 외곬수로 추구하지 않는다,
한번은 올랐다가 한번은 내려가는 조화의 원칙을 행위의 원칙으로 삼는다, 만물의 근원을 소요하며 사물을 사물로 부릴 뿐, 사물에 의해서 사물로 부림 당하지 않는다면 무슨 화가 스며들 수 있겠는가 .... 재주가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누구나 복만 받고 화는 당하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대개 유가에서(儒家) 도가를(道家)를 공격 할 때, 자주 사용되는 장면이다. 얼핏 보기에 장자는 이 말에서 기회주의적 처세를 말하고 있다. 너무 쓸모가 있어도 곤란하고 너무 쓸모가 없어도 안되는 것, 복지부동에 불편부당의 적당주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오독(誤讀)이다.
장자는 여기에서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해때문에 상처받지 않아 진정으로 "화를 면할" 수 있는 사람의 경지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道와 德을 타고 소요하는"사람이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의하여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이며, 또 이사람은 " 늘 모든 것에 능동적이지 피동적이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장자는 이 대목에서 신선들이 사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구름똥을 갈긴 것이 아니다.
그는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음으로서 이해로부터 상처 받지 않음"을, 또 " 도와 덕으로 사물을 부림으로서 사물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경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의료계가 몸살을 앓는 이유도, 해답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없을까?
예를들어 지난주에 흉부외과의 심장 수술과 신경외과의 뇌수술, 진단검사의학과의 검사항목의 수가가 일부 인상되었다. 그러나 이 몇개 항목의 수가를 인상하는 당국자의 마음이 "거 봐라, 우리도 인정 할 것은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깔려있거나, 수가 인상을 바라보는 해당의사들의 마음이 "형편이 눈꼽만큼이라도 좀 나아지겠구나"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소요의 경지가 아니다.
더우기 이것을 환영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살림이 좀 좋아지겠다거나, 혹은 전공의 모집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따위의 일차원적 생각이 전부라면, 이것은 백숙 신세가 두려워 억지로 우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거위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지금 지방 중소도시에는 흉부외과 의사가 없다.
심장수술이야 돈만 있으면 서울이던 미국이던 어디던가서 받으면 그만이지만, 누군가가 지방에서 교통사고로 심장을 다치면 이 불행한 사람은 살아 날 길이 없다. 지방병원의 경영자 입장에서는 간단한 문제는 일반외과의사에게 맡기고, 심각한 손상은 대도시로 혹은 큰 병원으로 후송하면 그만이다.(또 그것이 경영의 논리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치료 시간이 늦어져서 죽어가는 억울한 원혼들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필자가 있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방 전체에서 흉부외과 응급수술이 가능한 흉부외과 의사가 배치된 병원은 단 한 곳, 그나마 그것도 평일에 한해서다.
사실 심장 수술의 수가를 인상하는 것은 일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안은 자칫하면, 심장 수술을 독점하다 시피하는 일부 메이져 병원들과, 주류 의사들의 논리에 매몰되어 본질을 외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그 엄청난 심장수술의 수가가 압구정동 쌍꺼풀 수술의 2/3 도 안된다는 실로 어이없는 현실에 대한 단일 사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왜곡되고 잘못 짜여진 의료대계를 바로 잡는 출발점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그리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장자의 논리로는 "이해를 이해로 여긴 것" 이며," 머지않아 더 큰 화를 입을 지도 모른다"
당국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10년후에 국내에서 심장수술을 못하게되면 외국의사 수입해서 하거나, 심장수술 환자들은 전부 싱가포르로 보내자는 논리를 펴더라도, 차라리 그것이 "도 와 덕"의 관점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면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죽어가는 억울한 몇명을 구하기 위해, 전체 시스템을 바로잡는 번거러움과 '재정부담'을 안느니 차라리 몇몇 수술의 수가를 인상함으로서 "도리 道理"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무를 베이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말려죽이는 선택"을 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감기나 관절염 치료"나 하면서 "보험재정이나 갉아먹는 공적"으로 몰아세우는 개원가에서, 외국보다 낮은 수가 덕택에 의료기관 문턱이 얼마나 낮고, 그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그나마 조기에 관리되고, 발견되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세상에 의료기관과 권력기관의 문턱이 낮은 일이 왜 나쁜 일 이란 말인가..? )
이 모두가 당국자는 당국자대로 병원 이용률을 낮출 궁리에만 매달리고, 의사는 의사대로 환자 수 지키기에만 목을 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점은 쌍방이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미국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들도 이해가 얽히면 미국의 사례를 운운하고,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 자들도 자신의 이해가 걸리면 일본의 제도를 운운하면서 자기 합리화에 근거한 궁색한 논리들을 펼친다.
그것은 모두 공공으로 포장된 자기이해의 논리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논리보다 의료의 논리야 말로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해때문에 상처받지 않아야.."하며. "사물(제도)을 부릴 뿐 사물에 의하여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의사들도 우선 눈앞의 이해를 버리자, 그리고 우선 당장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인술에 근거한 정정당당한 "도 와 덕"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자,
아울러 정부도 정부대로 속마음은 비용절감이 지상목표이면서, 겉으로는 "개혁으로 위장하는" (겉으로는 약자를 위하면서, 실제로는 약자만 골라죽이려는) 선동 논리를 버리고 어느것이 진정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인가라는 관점에서 당당하게 "도와 덕"으로 상대하라.
그리하면, 양자의 길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야 누군가가 가슴을 다치거나, 뇌혈관이 터졌을 때, 그가 강원도 어느 국도변이나, 서해안 변산반도의 어디쯤 , 혹은 경북의 어느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이 죽어가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
장자는 산에서 내려와 친구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는 기뻐하며 하인을 시켜 거위를 잡아 요리하게 하였다, 하인이 주인에게 물었다.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을 모르는데 어느놈을 잡을까요?" ,"울 줄 모르는 놈을 잡아라"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렸지만, 친구분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너무 쓸모가 없지도 너무 쓸모 있지도 않겠다, 도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도(道)와 덕(德)"을 타고 소요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명예도 구하지 않고 허물도 짓지 않고 때로는 귀한 용이 되었다가, 때로는 천한 뱀이되어, 대세에 따라 더불어 변화해 갈 뿐 그 무엇이던 외곬수로 추구하지 않는다,
한번은 올랐다가 한번은 내려가는 조화의 원칙을 행위의 원칙으로 삼는다, 만물의 근원을 소요하며 사물을 사물로 부릴 뿐, 사물에 의해서 사물로 부림 당하지 않는다면 무슨 화가 스며들 수 있겠는가 .... 재주가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누구나 복만 받고 화는 당하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대개 유가에서(儒家) 도가를(道家)를 공격 할 때, 자주 사용되는 장면이다. 얼핏 보기에 장자는 이 말에서 기회주의적 처세를 말하고 있다. 너무 쓸모가 있어도 곤란하고 너무 쓸모가 없어도 안되는 것, 복지부동에 불편부당의 적당주의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오독(誤讀)이다.
장자는 여기에서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해때문에 상처받지 않아 진정으로 "화를 면할" 수 있는 사람의 경지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道와 德을 타고 소요하는"사람이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의하여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이며, 또 이사람은 " 늘 모든 것에 능동적이지 피동적이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장자는 이 대목에서 신선들이 사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구름똥을 갈긴 것이 아니다.
그는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음으로서 이해로부터 상처 받지 않음"을, 또 " 도와 덕으로 사물을 부림으로서 사물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경지"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의료계가 몸살을 앓는 이유도, 해답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없을까?
예를들어 지난주에 흉부외과의 심장 수술과 신경외과의 뇌수술, 진단검사의학과의 검사항목의 수가가 일부 인상되었다. 그러나 이 몇개 항목의 수가를 인상하는 당국자의 마음이 "거 봐라, 우리도 인정 할 것은 한다"라는 마음가짐이 깔려있거나, 수가 인상을 바라보는 해당의사들의 마음이 "형편이 눈꼽만큼이라도 좀 나아지겠구나"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소요의 경지가 아니다.
더우기 이것을 환영하는 입장에서도 우선 살림이 좀 좋아지겠다거나, 혹은 전공의 모집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따위의 일차원적 생각이 전부라면, 이것은 백숙 신세가 두려워 억지로 우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거위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지금 지방 중소도시에는 흉부외과 의사가 없다.
심장수술이야 돈만 있으면 서울이던 미국이던 어디던가서 받으면 그만이지만, 누군가가 지방에서 교통사고로 심장을 다치면 이 불행한 사람은 살아 날 길이 없다. 지방병원의 경영자 입장에서는 간단한 문제는 일반외과의사에게 맡기고, 심각한 손상은 대도시로 혹은 큰 병원으로 후송하면 그만이다.(또 그것이 경영의 논리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치료 시간이 늦어져서 죽어가는 억울한 원혼들은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필자가 있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방 전체에서 흉부외과 응급수술이 가능한 흉부외과 의사가 배치된 병원은 단 한 곳, 그나마 그것도 평일에 한해서다.
사실 심장 수술의 수가를 인상하는 것은 일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안은 자칫하면, 심장 수술을 독점하다 시피하는 일부 메이져 병원들과, 주류 의사들의 논리에 매몰되어 본질을 외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그 엄청난 심장수술의 수가가 압구정동 쌍꺼풀 수술의 2/3 도 안된다는 실로 어이없는 현실에 대한 단일 사안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왜곡되고 잘못 짜여진 의료대계를 바로 잡는 출발점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그리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장자의 논리로는 "이해를 이해로 여긴 것" 이며," 머지않아 더 큰 화를 입을 지도 모른다"
당국자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으로, 10년후에 국내에서 심장수술을 못하게되면 외국의사 수입해서 하거나, 심장수술 환자들은 전부 싱가포르로 보내자는 논리를 펴더라도, 차라리 그것이 "도 와 덕"의 관점에서 나오는 주장이라면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작 죽어가는 억울한 몇명을 구하기 위해, 전체 시스템을 바로잡는 번거러움과 '재정부담'을 안느니 차라리 몇몇 수술의 수가를 인상함으로서 "도리 道理"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무를 베이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말려죽이는 선택"을 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 "감기나 관절염 치료"나 하면서 "보험재정이나 갉아먹는 공적"으로 몰아세우는 개원가에서, 외국보다 낮은 수가 덕택에 의료기관 문턱이 얼마나 낮고, 그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그나마 조기에 관리되고, 발견되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세상에 의료기관과 권력기관의 문턱이 낮은 일이 왜 나쁜 일 이란 말인가..? )
이 모두가 당국자는 당국자대로 병원 이용률을 낮출 궁리에만 매달리고, 의사는 의사대로 환자 수 지키기에만 목을 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점은 쌍방이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미국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들도 이해가 얽히면 미국의 사례를 운운하고,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 자들도 자신의 이해가 걸리면 일본의 제도를 운운하면서 자기 합리화에 근거한 궁색한 논리들을 펼친다.
그것은 모두 공공으로 포장된 자기이해의 논리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논리보다 의료의 논리야 말로 "이해를 이해로 여기지 않으므로, 이해때문에 상처받지 않아야.."하며. "사물(제도)을 부릴 뿐 사물에 의하여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의사들도 우선 눈앞의 이해를 버리자, 그리고 우선 당장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인술에 근거한 정정당당한 "도 와 덕"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자,
아울러 정부도 정부대로 속마음은 비용절감이 지상목표이면서, 겉으로는 "개혁으로 위장하는" (겉으로는 약자를 위하면서, 실제로는 약자만 골라죽이려는) 선동 논리를 버리고 어느것이 진정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인가라는 관점에서 당당하게 "도와 덕"으로 상대하라.
그리하면, 양자의 길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야 누군가가 가슴을 다치거나, 뇌혈관이 터졌을 때, 그가 강원도 어느 국도변이나, 서해안 변산반도의 어디쯤 , 혹은 경북의 어느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이 죽어가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