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우 학생(가천의대 예과 2학년)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 시즌2가 시작됐다. 첫 방송을 보니 의과대학에 막 입학하고 앞으로 의학을 배움에 들떠 의료와 관련된 무엇이라도 시청해야겠다는 마음에 슬의생 시즌1을 보았던 작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들에게 따뜻한 의술을 베푸는 소아외과 교수 안정원을 보며 가지게 된 소아과에 대한 관심과 99즈 5인방의 밴드 합주를 보며 의대 라이프에 품었던 로망이 의료 파업과 집단 휴학으로 좌절되었던 기억이 흉터로 남아있는 듯하다.
슬의생1의 여러 에피소드 중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튜브에 클립조차 올라오지 않은 사소한 장면이다. 바로 아이 엄마가 담당의 안정원과의 상담을 몰래 녹취하다 들킨 장면이다. 아이 엄마는 "다른 병원은 장중첩증의 경우 수술이 아닌 시술을 하더라. 인터넷을 찾아보니 수술할 경우 아이 키가 안 자랄 수도 있다고 하던데..."라며 담당의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질문을 시전한다. 하지만 아이의 장에는 이미 괴사가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며, 의사는 수술 외엔 방법이 없다고 단언한다.
아이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수술하면 아이 키가 안 자란다고 읽었다며 집요하게 시술을 요구한다. 의사가 그런 정보는 믿지 말라고 하는 순간 아이 엄마의 녹음본이 실수로 재생되고 의사가 간호사에게 수술을 위한 신속한 원무과 수속을 부탁하며 상황은 종결된다.
이 장면과 관련해 화두가 되었던 것은 의사와 상담 녹음의 합법 여부였다. 여러 변호사 및 법률 블로그에서는 담당 의사의 진료 상담을 몰래 녹음하는 행위의 불법 여부를 다루곤 했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참여의료였다. 미숙하기는 해도 아이 엄마의 의견도 진료와 치료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일종의 참여의료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담당의에게 의사결정과 관련해 질문하고 요구하는 아이 엄마를 단순히 고집스럽고 아는 체하는 모습으로 표현할 뿐이다.
물론 위 장면에서 의사가 자신의 판단을 배제하고 환자의 제안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다면, 아이의 치료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이것은 환자가 치료 의사결정에 참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흔한 부작용이다. 그러나 환자의 의료 참여가 돌파구를 제시하기도 한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세계적인 구루인 에릭 토폴 박사의 저서 에서 킴 굿셀(Kim Goodsell)이라는 환자에 대해 읽은 기억이 있다. 그녀는 활기차고, 운동을 좋아하고, 놀라울 정도로 힘이 넘쳤으며, 20대와 30대에는 철인 삼종 경기로 세계 순위를 다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심장부정맥으로 쓰러졌다가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적이 있으며, 정밀 검사 결과 부정맥유발성 우심실 형성이상(ARVD)이라는 아주 드문 심장 질환을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1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며, 보통은 굿셀처럼 40대가 아닌 청소년기에 발병하고, 일반적으로 상염색체 우성 방식으로 유전되는 이 질환이 돌연사나 심각한 심장리듬 이상의 가족력이 전혀 없었던 굿셀에게 발병했다는 점이 매우 희한했지만, 담당 의사는 별다른 의구심 없이 그녀를 ARVD 진단에 따라 치료하였다. 그러다 심실성 빈맥이 여러 번 재발하고 근력 저하와 함께 신경학적 증상들이 나타나며 상황이 악화되자 굿셀은 메이요 클리닉을 찾았고, 결국 희귀한 질병인 2형 샤르코-마리-투스(CMT)까지 진단받았다. CMT 또한 ARVD와 같이 일반 대중에서 발병률이 매우 낮으며, 40대가 아닌 성인 초기에 주로 발현되는 유전 질환이다. 굿셀의 친척 중에는 ARVD 증상을 가진 사람이나 CMT나 다른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굿셀은 왜 자신에게 이런 희귀한 질병이 두 개나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담당 의사에게 물어보자 그저 운이 나쁜 것뿐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하지만 굿셀은 '그저 운이 나빠서'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의학적 배경지식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지만 자기 질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2년간의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유전학을 독학으로 배우고, 수많은 난해한 논문들을 읽으며 결국 LMNA라고 불리는 유전자에서 일어나는 희귀한 돌연변이를 찾아냈다. 이 돌연변이가 바로 그녀의 심장 질환과 신경계 질환을 하나로 묶어 주는 돌연변이였다.
굿셀은 메이요 클리닉으로 돌아가 자신의 DNA에서 이 특정 유전자 부위의 서열을 분석해 줄 것을 요구했고, 굿셀이 실제로 해당 돌연변이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돌연변이와 거기에 관여하는 생물학적 경로를 알고 있던 굿셀은 그에 맞추어 식생활을 개선했고, 덕분에 증상들 중 일부는 경감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굿셀은 자신의 질병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며, 두 질병을 하나로 묶는 진단은 없다는 의사의 권위적인 말을 떨쳐내고, 결국 대단히 복잡하게 조합된 희귀한 유전 질환들의 근본 원인을 본인이 직접 진단해내었다. 그녀의 의료 참여는 고집과 아는 체가 아닌 끈기와 지식이며, 참여의료의 이상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환자의 의료 참여는 간섭일까 보조일까. 첫 번째 사례에서처럼 환자가 인터넷에서 근거 없는 정보를 읽고 담당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의사의 시간을 뺏는 간섭일 뿐이다. 그러나 굿셀의 조사와 유전자 분석 요구를 통한 성공적인 진단은 보조를 넘어서 혁신에 이른다. 이것이 환자의 의료 참여를 더 이상 간섭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인터넷 혁신으로 의학 정보의 비대칭성은 점점 해소되고 있으며, 개인 의료기기를 통해 병원 밖에서도 환자가 직접 자기 몸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 의료 시대가 도래했다. 'Doctor knows best'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의료는 더 이상 공급자 중심이 아니며, 환자 또한 일방적으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존재이자, 참여의료의 선두 주자이다.
다만 일반인이 올바른 의료 및 의학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가짜 정보에 기반한 참여의료는 정말로 간섭이 되어버릴 수 있으며, 의사가 환자의 의견을 수용한다 해도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고, 의사-환자 관계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의료정보, 의학지식, 의학논문의 세계가 아직 일반인에게는 난해한 것은 사실이다. 굿셀처럼 자신의 질병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2년간의 끈기 있는 학습과 조사 작업에 착수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플랫폼을 열고 의학 정보의 비대칭성을 허물어버릴 것으로 기대한다. 의학 정보의 비대칭성 해소와 함께 의료에서의 환자의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며, 환자참여는 부작용 예방, 재원 기간의 단축, 치료 효과의 극대화 등의 긍정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평소엔 무관심하던 사람이라도 환자가 되어서는 호기심 많은 아이가 그렇듯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아진다. 이젠 아이들도 미지의 자연 속에서 탐구하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의학 지식에 있어서는 의사와 비교해 아이와 같은 환자도 이젠 의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진료 및 치료 의사결정에서 의사와 환자는 서로 협력해야 하며, 환자의 의료 참여는 더욱 독려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