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손으로 만든 21년산 명품 전자차트 한번 보실래요?

발행날짜: 2015-08-27 05:39:46
  • 이광래 인천시의사회장

최근 '인생'이 접두어로 인기다. 최고의 스포츠 명경기가 나오면 이를 '인생 게임'으로 칭하는 식. 일단 '인생'이 명사 앞에 붙는 순간 그것이 곧 최고의 수식어가 된다. 누군가 한 번쯤 꿈꾸는 역작을 남겼다는 세간의 평가를 얻은 셈이기 때문이다.

이광래 인천시의사회장에게도 '인생'을 건 역작이 있다. 바로 'Win메드'. 전자차트 이름이다. 아쉽게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사용자도 손에 꼽힌다. 아직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생 차트'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고 중소기업이 만든 그저 그런 차트로 치부한다면 큰 오산. 소리 소문없이 사라져간 전자차트들 사이에서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 동안 검증을 거쳐왔다.

기업이 전자차트를 통해 환자 정보를 유출했다는 논란이 불거진 요즘 Win메드의 제작자가 의사라는 것은 덤. 이광래 인천시의사회장을 만나 전자차트의 개발 동기와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인생의 1/3을 함께한 차트…이젠 자식같은 존재"

때는 1985년. 당시 이광래 회장의 신분은 군의관이었다. 공대생의 꿈은 의대에 진학해서도 꺾이지 않았다. 동료 군의관이 가져온 8비트 애플컴퓨터를 보는 순간 오래된 꿈이 다시 꿈틀댔다.

"당시 로드런너라는 게임을 하면서 컴퓨터에 푹 빠졌습니다. 테이프를 넣어서 프로그램을 돌리던 시절이었는데 문득 개발의 원리가 궁금해지더군요. 그때부터 프로그래밍 책을 한 두 권씩 사 보며 툴을 공부했습니다."

dBASE III라는 툴을 배워 어설프게나마 부대 내에 필요한 금액, 사람 관리를 대신했다. 자신감이 붙었다.

이광래 회장
제대 후 개원을 한 90년대는 아날로그의 시대. 종이차트를 쓰다보니 전자차트를 개발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dBASE III로는 한계였다.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초기 버전은 정보를 입력하면 종이차트 양식에 맞게 프린트할 수 있는 정도의 프로그램이었죠. 현재 의사들이 쓰고 있는 전자차트 기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게 사실었습니다. 그나마 94년도에 최소한의 전자차트 모양새가 나왔으니 벌써 21년 전 일입니다."

한 번 개발로는 어림도 없었다. 개발의 끝이 곧 지난한 싸움의 시작이 될 줄이야. 모뎀의 시대가 열리고 랜카드가 나오더니 인터넷이 등장했다. 새로운 IT 환경이 나올 때마다 차트를 뜯어 고쳤다.

환경의 변화 속도는 더욱 빨랐다. 종이차트가 사라지고 EDI를 활용한 온라인 청구가 나왔다. DUR이 등장하며 변화의 속도가 매번 성큼 성큼 앞서 갔다.

2000년대 후반 한창 차트 개발에 불이 붙었을 때는 불꺼진 진료실에서 새벽 2~3시 퇴근이 예사였다. 환자가 뜸한 시간, 언제나 그의 모니터엔 프로그래밍 준비를 알리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변화의 속도에 맞춰 의사의 눈높이에서 21년간 명맥을 이어 왔는데 더 이상 증명할 게 남았냐는 게 그의 말. 자신있게 한 번 써보시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힘에 부칠 때도 있었지만 차트 개발을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개발이 막히면 프로그래머 커뮤니티에 질문도 올리고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매달렸죠. 환자가 없는 시간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면서 차트 개발의 끈을 이어왔습니다. 저에게는 Win메드가 자식같은 존재죠."

이광래 회장의 대표 아이디 역시'winmed'. Win메드는 그야말로 자식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의료계를 대표할 만한 전자차트 하나 쯤은 있어야"

약학정보원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이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개인정보 교육까지 새삼 '정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 회장은 개인 정보 유출 사태를 어떻게 봤을까.

"차트 등을 이용한 정보의 유출은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 주체의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정보를 빼가고자 마음 먹는다면 얼마든지 이런 사태가 재발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최대 목표가 이윤 추구이다 보니 경제성의 원리에 입각한 부도덕한 행위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는 것. 전자차트의 인증 책임을 진 건강보험심사평가원마저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도외시 했다는 지적 역시 이어졌다.

"심평원이 차트 인증 과정에서의 정보 유출 가능성을 인지했다면 현재와 같이 기능 중심으로 인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인 정보가 유출되는 사태가 터지고 나서야 이를 마치 개인 병의원의 책임인냥 몰고가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죠."

정보 유출이 의심되는 전자차트마저 인터페이스와 로고를 바꾸는 정도로도 얼마든지 다른 차트 프로그램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말. 심평원의 차트 인증이 보안 영역을 포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광래 회장은 "문제가 된 차트의 소스를 그대로 넘겨받아 다른 업체가 유사 차트를 찍어낼 수 있다"며 "마음 먹고 정보를 빼 가겠다고 하면 인증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에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과 프로그래머의 윤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Win메드는 이윤 추구라는 기업의 논리와 상당한 거리가 있다"며 "본인이 의사라는 점 역시 환자의 정보를 빼돌려야 한다는 경제적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이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이광래 회장은 Win메드를 상용 프로그램으로 개발했지만 홍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돈이 목적이 아니다보니 요청하는 지인들에게만 설치를 해주고 차트의 보수·운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유지비만 받는다.

그의 인생 역작이 사람들에게 '인생 차트'로 각인되는 순간이 올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의료계도 의료계를 대표할 만한 전자차트 하나 쯤은 있어야지요. 언젠가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가 오면 소스를 오픈할 생각입니다. 저의 목표는 영리 추구가 아니니까요. 기업이 만든 차트가 불안하다고요? 연락 한번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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