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학술팀 최선 기자
요즘처럼 이 단어를 흔하게 접하게 된 시기가 있을까 싶다. 각종 미디어에서 종종 '조현병'이란 단어가 등장한 이래 생소함도 많이 사라졌다. 직관적으로 의미의 유추가 어려운 단어임에도 그렇다는 건 그만큼 노출 빈도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한다. 안타까운 건 조현병이라는 단어가 주로 출현하는 곳이 사회면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열병이 조현병으로 법적인 병명이 개정된지 올해로 10년째다. 의료계 주도로 정신분열병이 가진 사회적 편견, 오해나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자 한 명칭 변경이 과연 성공했는지 판단해볼 시간의 축적은 충분하다는 뜻. 후하게 평가해도 B학점은 이상은 주기 어려울 듯 싶다. 당초 취지에 제도가 부합했는지 여부에서 대해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취지에는 공감한다. 정신분열이란 단어의 부정적인 낙인 효과를 상쇄하고 치료의 접근성을 높이겠다던 그 취지. 문제는 직관적인 정신분열의 단어를 버림으로써 생기는 반대급부다. 조현병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과연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들의 치료에 대한 필요성이 강화됐는지는 한번 따져봐야 한다. 애매모호한 용어로 인해 '별 것 아닌' 병으로 오인되거나, 치료 동기와 의욕이 오히려 꺾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봐야할 환자 본인조차 조현병을 참아야할 만성질환쯤으로 간과하고 넘길 수 있다.
조현병의 유병률은 인구의 1%로 추산된다. 100명 당 한명꼴이다. 명칭 개정 이후에도 (잠재) 환자들의 치료율이나 복약순응도 제고가 관찰되지 않는다면, 조현병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증가 추세라면 그에 맞는 추가 대응책이 필요하다. 단어에도 한계 효용이 있다. 환자 편의 면에서 잘 된 일이라고 덮어두기엔 조현병 단어가 가진 효용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다. 관련 피해자가 늘어나는 마당에 조현병이 가진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겠다고 명칭을 개정해 봤자 똑같은 땜질처방이 되풀이될 뿐이다.
안타까운 점은 또 있다. 소시오패스 등으로 대표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정신질환)에 대한 의료계의 대응이다. 소시오패스는 공감 능력이 떨어져 타인의 고통 및 권리에 무관심하고, 타인을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전전두피질의 세포가 적어 도덕적 판단력이 떨어지고 습관적인 거짓말을 일삼지만 별다른 죄책감은 느끼지 못한다.
하버드의대 정신과 교수로 재직한 마사 스타우트는 저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통해 소시오패스에 대한 주의와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는 25명당 한명꼴로 존재한다. 조현병보다 더 큰 관심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 집필 동기는 주변과 조직에 소시오패스가 흔하게 존재하는 만큼 그들의 특징을 밝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도 있지만, 소시오패스를 접한 일반인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물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심각하다는 진료 경험 역시 동기로 작용했다. 그는 환자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의 치료 필요성이라는 측면도 놓치지 않았다.
문제는 국내에서 소시오패스에 대한 심리적(치료적) 접근, 소시오패스를 경험한 PTSD 환자에 있어 심리학자가 대부분의 아젠다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소시오패스 전문가로 유명세를 탄 모 교수를 비롯해 각종 미디어에서 활약중인 사람들은 주로 심리학자다. 분명 소시오패스와 관련해 정신과의 영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시오패스 구별법', '악인 손절 비법', '피해야 하는 소시오패스 특징' 등의 아젠다가 유행할 뿐 정작 해당 영역에서 의사들의 역할이 뭔지 아는 대중은 많지 않다.
"주변에 미친놈이 없으면 내가 미친놈"이라는 흔한 농담은 얼마나 높은 빈도로 우리가 소시오패스에 노출되고 곤혹스러웠는지를 말하는 지표다. 본인에겐 관대하고 타인의 고통, 권리엔 냉담한 내로남불 캐릭터나 거짓말로 이간질을 일삼는 '친밀한 배신자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 피터의 법칙으로 유명한 미국의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는 운 좋게 소시오패스를 경험해 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분명 "소시오패스는 이직할 때까지 타인을 괴롭힌다"는 법칙을 만들었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