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기자간담회 열고 의료인 보호 위한 재정적 지원 촉구
끊이지 않는 의료인 폭행…사회적합의 위한 정부 정책 필요성 강조
대한의사협회가 정부에 의료인에 대한 폭력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예산 배정을 촉구했다. 지금까지 마련된 대책은 오히려 의료기관에 규제로 돌아왔던 만큼, 재정적 지원을 통해 의료기관이 자율적으로 의료인 보호책을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7일 대한의사협회는 '의사대상 살인미수사건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진 보호를 위한 실질적 대책마련을 위해 국가의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용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어난 의료인 살인미수 사건에 대한 후속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 15일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한 종합병원에서 70대 남성이 A씨가 응급실의사 B씨에게 흉기를 휘둘러 상해를 입혔다. B씨는 뒷목에 10cm 크기의 자상을 입어 수술을 받았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A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으며, 경기도 용인동부경찰서는 살인미수 혐의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병원 측 조치가 부적절해 자신의 아내가 사망했다는 불만을 품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을 밝혀졌다. 또 B씨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사건 전날 A씨의 아내는 해당 병원에 심정지 상태로 이송됐는데 당시에도 A씨는 의료진에게 난동을 부린 바 있다. 이후 귀가한 A씨는 사과를 하겠다며 다시 병원을 방문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의협 김이연 홍보이사가 공개한 정신건강의학과 소견에 따르면 B씨는 급성 스트레스성 장애로, 극심한 외상 노출 후 1개월 이내의 특징적 불안과 해리 등의 증상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자율신경계 과잉각성, 죄책감, 거부감, 수치심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우울감과 충동조절 어려움으로 악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억력, 주의집중력 저하로 기능 회복에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치료가 동반되지 않으면 이 같은 증상이 중등도 이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신경과·신경외과·이비인후과는 이번 사건의 피습 부위는 치명적인 급소로, 피해 의사가 신경 손상으로 사지가 마비되거나 혈관 손상으로 즉사할 수도 있었다는 소견을 내놨다.
의협 이필수 회장은 "이번 사건은 살인 의도가 명백하며 용서의 여지가 없는 중범죄다. 가해자에 대해 법정 최고형 등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본회는 이날 행보를 시작으로 의료인 안전 및 보호를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응급실은 필수의료에 해당하는 매우 중요한 영역인데 이번 사건을 보고 누가 응급의학과에 지원하려고 할지 절망스럽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응급의료분야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국가는 의료인 안전 및 보호 대책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료계 역시 격분하고 있다. 전날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의 수사철저 촉구 서신에 이어, 이날 오전 대한응급의학의사회와 용인시의사회가 가해자에 대한 엄벌 및 의료인 보호책 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라남도의사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한병원협회도 잇따라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는 정부의 대책 마련에도 의료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19년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가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뒤, 같은 해 ▲서울 소재 대학병원에서 흉기 난동으로 의사의 손가락이 절단된 사건 ▲부산 소재 병원에서 직원에게 흉기 난동을 벌인 사건 ▲천안 소재 대학병원 상해 사건 등이 일어났다. 올해 초엔 경남 의료기관을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의협은 지금까지 마련된 뒷문 마련, 비상벨 설치, 안전전담 요원 고용 등의 대책은 오히려 의료기관에 규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원급의 경우 세입자라는 특성상 뒷문을 설치하는 것이 어렵고, 비상벨 역시 폭력사건에 대한 확실한 예방책이 되지 못한다. 관련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안전전담 요원을 고용하는 것 역시 의료기관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이필수 회장은 "의료인에 대한 폭력 사건이 계속되는 이유는 관련 법안에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라며 "응급실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져도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의료취약지의 경우 의료진에 대한 폭력이 더욱 빈번함에도 토호세력과 관계돼 유야무야 끝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제 2의, 제 3의 임세원 교수 같은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협 전성훈 법제이사는 의료인 보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선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전 정부가 성범죄 근절의지를 가지고 정책을 수립한 결과 그 인식이 바뀐 것처럼, 의료인 보호에서도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공익적 영역이므로 의료인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은 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옳다는 입장도 내놨다.
전 법제이사는 "공익적인 영역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정부가 그 책임을 방기하는 것. 이를 보호하기 위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며 "공익적인 성격이 특히 강한 응급실을 시작으로 최소한의 의료인 보호를 위한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효과가 있다면 이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진을 보호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도 제언했다. 특히 이번 사건은 흉기상해 사건이 아닌 살인미수 사건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법제이사는 "피의자는 고의를 부인하는데 이 같은 주장이 법정에선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것. 고의성은 범행 경위, 수단, 부위, 방법을 고려해 추정할 수 있다"며 "계획적인 범행이었다는 점과 흉기를 준비한 점, 가격 부위가 목 부위인 데다가 상흔이 경동맥을 찌르려다가 빗나가 앞으로 당긴 모양인 점 등을 감안하면 엄중할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의협은 피해 의사는 물론 필요하다면 사건이 일어난 병원에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하겠고 밝혔다. 또 이날 오후 관할서인 용인동부경찰서 서장과 면담해 엄정 수사를 촉구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근시일 내에 정치권과의 협의로 진료실·응급실 의료인 폭행 방지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는 신속한 입법 추진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의협 박수현 대변인은 "수사가 엄중히 이뤄져야 하며 의료인 폭행 방지에 대해 여러 공청회, 입법 추진을 진행할 것"이라며 "대한변호사협회와의 논의도 시작했으며 국회와도 접촉 중에 있다"고 전했다.
이어 "큰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슈화됐을 때 입법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며 "피해 의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논의 중이며, 함께 일하는 의료진의 트라우마를 줄이기 위한 개별 지원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