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마루타

양염승
발행날짜: 2005-01-18 09:19:53
  • 양염승(부천시의사회 회장)


오비이락 파사두(烏飛梨落 破蛇頭) -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그 배에 맞아 뱀의 머리가 깨지다

2003년 10월 29일 오전 7시경 MBC TV 뉴스투데이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매도하는 뉴스를 방송하였다. 울산에서 30대 여성이 지방흡입수술 도중 사망하였는데, 시술의사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가정의학과 전문의라고 사칭하였고 취재기자는 감기 등 간단한 진료 수입만으로는 병원 운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른바 돈이 되는 진료를 하다가 사고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대한가정의학과개원의협의회 윤해영 회장은 즉시 대한가정의학회 이사장과 협의하여 대응책을 숙의하고, 필자를 중심으로 비상대책반을 가동하여 기민하게 대처한 결과 당일 저녁 프라임타임(밤 9시 뉴스)에서의 방송 수위를 완화시키고, 수일 후 정정보도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2005년 1월 9일 밤 10시경 MBC TV 2580은 ‘환자는 마루타’라는 제목 하에 일부 산부인과, 피부과 등에서 돈벌이에 급급하여 의사가 아닌 의료기기 판매업자가 지방흡입수술을 자행하고 있다는 현장 고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또한 불법행위를 추궁하는 취재기자 앞에서 무릎 꿇고 바지가랑이와 신발을 잡고서 ‘살려줘요. 나 살려줘요. 나 어떻게 해요. 살려줘요’를 외치는 시술의사의 화면을 반복하여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취재기자는 수차례 사업에 실패한 후 이번에 자기 친구가 비만클리닉을 개원하면 열심히 함께 일해서 꼭 성공하겠다면서 병원사무장을 사칭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라고 자신의 신분을 속여 시술 의사와 의료기기 판매업자에게 접근한 후, 수술실에 위장 잡입하여 지방흡입기계를 사겠으니 의료기기판매업자가 시술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사주하여 이를 몰래카메라로 촬영하여 보도한 것이다.

견토이고견 망양이보뢰(見兎而顧犬 亡羊而補牢) - 토끼를 발견한 뒤 사냥개를 불러도 늦지 않고, 양을 잃은 후 즉시 양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

대한의사협회는 사건 초기에 진상을 신속히 파악한 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적시하여, MBC측에 민형사상의 법적대응은 물론 합법적인 모든 수단을 통해 강력히 대응할 것임을 천명했어야 했다.

① 수술 장면을 사전동의없이 방영하여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초상권을 침해한 불법행위(MBC TV 시사매거진 2580은 최근 서울남부지법으로부터 대학생 신입생환영회를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방송한 데 대하여 1600만원의 배상판결을 받았음) ② 수사권을 가진 경찰도 수사를 위해서는 영장을 제시하는 등 적법절차를 준수해야 하는바, MBC 취재진이 사무장 또는 의사로 위장하여 속임수로 수술실에 무단 침입하여 수술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주거침입행위 ③ 시술 의사를 촬영한 불필요한 화면(무릎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장면)을 삭제없이 방영하는 등의 언론권력을 빙자하여 인격을 짓밟은 명예훼손 행위 ④ 자신의 취재목적에 적합하게끔 시술행위를 교묘히 연출, 편집한 기자의 양심을 저버린 부도덕한 행위 ⑤의료기기 판매업자가 기구를 더 팔려는 욕심에 자화자찬으로 떠들어댄 말을 침소봉대하여 전체 의료계를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단죄한 오도된 행위

이러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MBC 뿐만 아니라 타 언론매체가 의료계를 폄하하고 비하하는 보도를 자제시킬 수 있고, MBC 측의 추가적인 왜곡보도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대한의사협회는 언론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의료계에 대한 애정어린 충고와 제언을 겸허히 청취, 자성의 계기로 삼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회원자율정화신고센터를 설치 운영하는 등 국민의 신뢰회복과 전문가 단체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혁신적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이러한 와중에 발생한 이번 MBC의 함정 수사를 연상시키는 위장 잠입 취재와 유도 심문 형식의 보도 태도는 우리나라 의료현실의 개선과 국민건강을 위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어야 했다.

시술 의사의 비윤리적, 불법적인 사실이 드러날 경우, 해당 회원을 의사협회 윤리위원회에 회부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다.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 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펴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가 사실관계를 조사하여, 이를 해명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고, 거두절미 해당회원을 영구 제명하겠다는 성명서와 구체적인 행동방법을 결여한 ‘MBC를 응징합시다’ 라는 글을 회원들에게 발표한 것이 대응의 전부였다. 또한 MBC TV에서 방송 이후 불거진 파장 등을 후속보도 한다며, 제2부 방송사실을 고지한 후에는 방송예정일을 하루 앞둔 시점인 토요일에 시간적으로 심리가 불가능하여 실익이 없는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대응책이라하여 서울남부지법에 제출한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다.

MBC측과 중재를 위한 막후교섭이나 협상이 진행되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점,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에도 상임이사회 한 번 개최되지 않고, 집행의결기구가 아닌 시도의사회장회의만이 토요일 오후 늦게서야 겨우 열린 점등은 대한의사협회의 위기관리시스템의 부재와 대응능력의 한계를 노정시켰다고 하겠다.

이렇게 의협이 사태를 장악하지 못하자 우후죽순, 중구난방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각개전투하는 개인과 단체의 행동이 과연 전략전술면에서 의료계에 유리하게만 작용했을지 여러 상념에 젖게한다.

보거상의 순망치한(輔車相依 脣亡齒寒) -덧방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2004년 4월 22일 모 학회 홈페이지에 지방흡입기기 판매업자의 불법 시술 행위를 신고하는 투고가 접수되었다 한다. 업자가 장비판매를 목적으로 지방흡입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폭로하면서 업체명과 직원, 핸드폰 번호 등을 공개했는데 이번 MBC TV 2580에 보도된 업체명, 업자와 일치했다고 한다. 각과별 이기주의에 집착하기 보다는 의료계 전체를 위하는 마음으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여러 현안에 대동단결하여 대처하고, 의협은 산하 단체로부터의 정보를 수집하여 종합하는 네트워크를 갖추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위복 인패위공(轉禍爲福 因敗爲功) -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공(功)으로 만들다

‘환자는 마루타 제 2부’ 방송을 통하여, MBC는 제 1부 보도에서의 문제점인 위장잠입취재나 시술의사에 대한 인격권 침해부분을 잘 처리하면서, 보도의 공익적인 요소에 대한 객관성, 당위성을 확보하였기에, 의료계로서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한 MBC 와의 진실게임. 파워게임에서 모두 패배하였음을 자인해야 한다. 이제는 스스로 자중자애하는 마음으로 ①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검찰의 기획수사같은 후폭풍(後暴風)에 대비하고, ② 이번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의협의 시스템 변화를 주문하며, ③ 이번 시술과 관련하여 드러난 의료인 교육체계 및 의료기기의 인허가 및 유통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개선하고, ④ 의료인의 윤리적인 감수성을 높이는 작업 등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어렵고 버겁겠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취재행태에 대하여 반성할 줄 모르는 취재기자에 대한 항의나 공격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결실을 맺어야 한다. MBC는 고발프로그램의 존폐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환자는 마루타’라는 2차례의 보도를 통하여 ‘의사를 마루타’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사외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오피니언 기사

댓글

댓글운영규칙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더보기
약관을 동의해주세요.
닫기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