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지속된다

박경철
발행날짜: 2005-03-07 04:08:18
  • '시골의사' 박경철 (신세계 연합클리닉 원장)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다'라는 잘 알려진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비록 지금은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나아질 때가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위로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이 속담의 이면에는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항상 변화한다"라는 그리 만만치 않은 철학적 사유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사유를 관통하는 철학적 명제로서 동양에서는 "주역"의 "계사전"에 등장하는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지속된다" 라는 가르침을, 서양에서는 정립과 반정립을 통한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들 수 있는데, 이 둘은 결국 "어떤 존재의 발전이 한계에 달 했을 때, 그것이 변하지 않으면 생존 할 수 없고, 반드시 변함으로서 지속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궁즉통"이란 어떤 존재의 발전이 어느시점에서 한계에 봉착했을 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한 도전을 받았을 때)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역시 "주역"의 "풍괘 (豊卦).단전(彖傳)"에서는 "해가 중천에 이르면 기울기 시작하고 ,달이 보름달이 되면 이지러 질 것이며, 천지가 가득차면 빌 것이다. 이는 때에 따라 없어지고 멈추게되는 이치이다"라고 말함으로서 변화란 존재의 "자기부정"에서 시작하여 반대 방향으로 바뀌어 진다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세상 이치란 지금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일)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우여곡절을 겪게 될 것이니 미리 대비하고 항상 몸을 낮추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또 "변즉통"이라 함은 어떤 존재던 변화해야 막히지 않고 순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이 "통(通)"에 대해 주역 "계사전"에는 "오고감에 막히지 않는 것을 통이라 한다"라고 하여, 사계절의 변화처럼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함으로서 "궁(窮)"의 고통을 피 할 수 있음을 얘기하고, "역전"에서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서로 작용하여 변화가 생긴다"라고 하여 설령 변화를 소홀히하여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하더라도 "강과 유"를 적절히 조화 시킴으로서 변화하여 난관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있다.

다시말해 이 위대한 고전은 모순된 쌍방이 서로 충돌하고 결합하는 조화를 "변"이라고 보았으며, 이 모순이 조화와 평형을 이룸을 가리켜 "통"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즉구"라 함은, 어떠한 존재가 정체되지 않고 변화하여 끊임없이 "통"함으로서 오래 존재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며 ,이것을 주역 "항괘(恒卦)"의 단전(彖傳)"에서는 "강한 것은 위에 부드러운 것은 아래에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벼락이 치고 바람이 불면서 서로 만난다. 바람이 불어 제자리에서 움직여서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만나 응하므로 오래가게 된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사물은 저마다의 자리에 위치하지만 각자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형성하기때문에, 언젠가는 이 가운데서 모순이 발생하고, 또 이로인해 변화가 발생하는데 , 이때 변화의 목적은 한편이 모순된 다른 한편을 말살함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호조화를 이루고 평형을 이루는데 있다."라는 뜻이다.

즉 그래야만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통변론"은 세상의 이치는 상호관계속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말살하지 않고 조화와 평형을 추구하는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곧 내가 영원히 사는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내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둘러싼 각종 관계에서 비롯되므로 ,내가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버리면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가 될 수 밖에 없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고전의 가르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가 이 나라에서 "의사로 산다는 것"에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정녕 견디기 어려운 "궁함" 이라 생각된다면, 또 우리가 그것을 헤치고 무위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정녕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틀림없는 길일까?

대학시절부터 청춘을 희생해가며 "의술"을 배워서, 오로지 내내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진료한 죄 밖에는 없는 대한민국의 의사들이, 왜 환자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권력으로부터 청산의 대상이 되며, 사회로부터 이지메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버린 것일까?

혹시 그것은 우리가 변화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며, 지금도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 우리 의사들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고달픈 이웃에 적절히 기여하면서, 우리들의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다했더라도, 지금 우리들의 입장이나 처지가 지금처럼 힘들고 화나는 일들로만 가득차 있을까?

우리는 늘상 "전미 의사협회"가 가진 역할과 사회적 존경을 부러워하지만, 실제 우리 의사협회는 그들의 만분의 일의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또 우리가 "민변"을 앞세운 "변호사협회"의 권위를 질시하지만 실제 우리는 우리내부에서조차 소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과 강박"의 자충수를 두어왔던 것 또한 사실이 아니었던가?

이제 우리도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지속된다"는 가르침을 한 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지금 우리는 얼마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의료기사,환자,제약사 영업사원,직원등)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가? 심지어 우리는 우리와 모순되는 상황에 대해 그것을 조화하고 통합하기보다는 배척하고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던가?

궁하면 변하라........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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