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경제팀 김승직 기자
실손보험 얘기가 나올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 있다. 도덕적 해이다. 커지는 실손보험 적자 원인을 가입자의 무분별한 이용과 의사의 과잉진료에서 찾을 때 주로 사용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시감이 든다. 역사적으로 국가적인 금융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나 기업은 그 원인을 국민에게 돌려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는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다. 실제 2002년부터 사용된 7차 사회 교과서를 보면 외환 위기가 닥친 첫 번째 이유를 국민의 과소비로 들고 있다.
실상은 정반대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기업의 방만 경영과 무분별한 대출, 정부의 미흡한 외환관리 정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도 이와 유사하다. 정부의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 이후 카드사들의 경쟁이 과잉되면서,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도 무분별하게 카드가 발급됐다.
이로 인한 연체율 증가에도 카드사들의 경쟁은 식지 않았는데, 개중엔 돌려막기를 권장하는 회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늘어난 신용불량자는 2004년 361만 명에 이르렀고 개중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진영기 부회장은 이 사태를 가리켜 "온 나라가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카드대란 사태와 관련해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카드사들이 파산 위기에 놓이자 "어차피 망할 회사에 대금을 결제할 필요가 없다"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소비자만의 잘못이 아니라 근시안적인 경제정책을 세웠던 정부, 무분별한 카드 발급을 부추겼던 카드사들의 합작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사태 초기엔 문제 원인으로 국민이 지목되다가, 상황이 마무리된 뒤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나 기업에 있었다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다.
이런 양상은 실손보험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보험업계는 실손보험 적자가 2조8062억 원으로 늘어났다며 과잉진료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의료기관이 실손보험금을 독식하는 것은 사실이다. 일례로 지난해 1분기에 상위 10여 개 안과에 지급된 보험금은 한 곳당 평균 42억8000만 원이었다. 반면 나머지 900여 개 안과에는 평균 1억7000만 원만 지급됐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의료계 내에서도 골칫거리이며 이를 가능하게 한 상품 설계를 문제 삼는 목소리가 더 크다. 실제 대한안과의사회는 보험업계와 함께 자정 활동 공동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보험업계는 도덕적 해이를 표어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밀어붙이니 의료계가 각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더욱이 연이은 보험료 인상 등 관련 피해는 가입자가 나눠 가지는 상황이다.
도덕적 해이라는 남 탓에 국민이 피해를 받고, 먼 미래에 흑막이 드러나는 레퍼토리가 이번엔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