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의료사고'가 사망 또는 중상해에 해당하는 경우 의료인(의료기관)의 동의여부와 무관하게 자동으로 조정절차가 개시되도록 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전날 법안심사소위원회는 중상해의 범위를 정해오도록 보건복지부에 주문했고, 하룻밤 안에 마련하기 어렵게 되자 이를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의사협회는 물론 의료계 각 단체들과 의사들의 반발이 거세다. 5년 전 제정됐던 의료분쟁조정법의 근본 취지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의료계는 의료분쟁의 해결 과정에서 소모적인 다툼을 줄이고 국민의 시간적, 경제적 편익을 도모하고자 대승적 취지에서 입법에 협조했다. 이에 의사들이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형사처벌 특례조항 조차도 양보했다.
대신 물러설 수 없었던 조항 중 하나가 '조정거부권'이었다. 이른바 깜도 아닌, 억지 시비와 조정신청 남발을 막고자 제도화한 것이 그것이며 이는 의사들의 소신진료와 직업적 안전성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였다.
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나 보호자는 조정이 거부되더라도 얼마든지 소송을 통해 피해구제를 주장할 수 있으므로, 국민들에게도 결코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입법으로 조정거부권이 박탈되었다. 앞으로 의사들은 국민의 기본권인, 소송을 통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기 전에 일방적인 조정절차에 의해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조정에 끌려들어가 자료를 빼앗기고 강제 출석, 강제 조사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당시 의료계가 주장했던 형사면책은 여전히 보장받지 못한다.
비록 이번에 그 범위를 '사망 또는 중상해'로 제한 한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를 시행령에 포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포괄위임입법금지의 원칙'을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언제든지 그 잣대가 고무줄처럼 늘어날 여지를 만들었다.
즉 국회의 입법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조항이 아니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는 시행령에 강제조정의 범위를 정하게 되어 의사들의 중요한 기본권이 보건복지부의 손아귀에 놓이게 됐다는 뜻이다.
이제 임기를 한 달 여밖에 남겨두지 않은 19대 국회가 이토록 의료분쟁조정법을 졸속 처리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5년 전 제정되었던 법률이 시행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차기 국회에서 시간을 두고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환자들의 요구 외에도 그동안 의사들이 지적해왔던 무과실보상제도나 대불금 등의 독소조항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또 조정 기간 중에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의료기관내 농성이나 폭력 사태 등을 막을 방법도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하룻밤에 중상해의 범위를 규정하지 못해(의학적으로 쉽게 규정할 수도 없지만) 통째로 시행령에 위임하는 식의 일탈적인 법안이 통과된 것에 대해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식의 '포괄위임입법금지의 원칙 훼손'은 국회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 아니었는가.
만약 이런 식으로 의료분쟁조정법이 개악된다면, 앞으로 의사들은 더욱 방어진료에 몰두하고 분쟁의 소지가 발생할 만한 중환자들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과실 유무에 상관없이 강제조정 절차에 끌려들어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한다면, 어떤 의사가 이를 감수하고 소신껏 진료에 임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대형병원 쏠림 현상은 가중되고, 이른바 3D과로 불리는 진료과의 기피현상은 가속화될 것이다.
아무리 그 취지가 좋은 법안이라도 서둘러 입법하려다 엉뚱하게 만들면 그로 인한 득보다 실이 더 크다. 더욱이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관계 법령은 국민의 감정에만 기대지 말고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의료도 '신이 아니라 사람인 의사'가 하는 것이라, 의사들이 공포에 빠지면 결국 자신의 살길을 먼저 찾게 된다. 최근 들어 더욱 난무하는 '의사 때려잡기' 법안들은 마침내 의사보다 의료를 먼저 죽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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