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약가정책에 글로벌 공급 흔들…국내 신약 지형 위기감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글로벌 제약사들을 겨냥해 도입한 '최혜국 대우(MFN·Most-Favored-Nation) 약가 정책'이 본격화된 지 약 1년이 지나면서, 글로벌 제약 바이오 산업의 지형도가 요동치고 있다. 당초 미국 내부의 약가 인하 기조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다국적 제약사들이 미국 시장의 마진을 지키기 위해 해외 선진국 시장에서 신약을 전격 철수하거나 출시를 유예하는 사례가 실제로 목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도 대대적인 제도 개편방안을 발표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섰으나, 임상현장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모양새다.MFN 족쇄로 이어진 치료제 철수 나비효과글로벌 약가 시장의 구조적 격변을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은 지난해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다국적 제약사들 간에 체결된 '자발적 MFN 약가 협정'이다. 미국 보건당국은 화이자, 일라이 릴리, 노보 노디스크 등 미국 브랜드 의약품 시장의 86%를 점유하고 있는 17개 주요 글로벌 제약사를 대상으로 미국 내 신약 출시 가격을 OECD 주요국의 최저 가격 수준에 연동하는 'Prospective MFN' 계약을 성사시켰다. 미국 내 처방약 가격 접근성 강화를 전면에 내세운 'TrumpRx' 플랫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가 향후 글로벌 제약 업계 및 의약품 유통 구조에 미칠 파장이 주목된다.다국적 제약사들은 미국 정부가 제시한 '향후 3년간 의약품 및 원료에 대한 신규 수입 관세 면제'라는 혜택을 수용하는 대가로 이 협정에 서명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해외 특정 선진국에서 확정된 낮은 순가격이 미국 내 매출 기준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부메랑이 됐다.이러한 정책적 연동 구조가 해외 선진국 시장에서의 실질적인 신약 철수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초 발생한 글로벌 빅파마 암젠(Amgen)의 덴마크 시장 철수 사태다. 외신에 따르면, 암젠은 지난 2월 중순 덴마크 공공의료 의약품 조달 기관인 암그로스(Amgros)와 2027년 여름까지 체결돼 있던 고지혈증 치료제 '레파타(Repatha, 에볼로쿠맙)'의 국책 공급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시장 철수를 전격 단행했다.당시 레파타는 덴마크 내 고위험군 환자 수천 명에게 처방되던 약제였으나, 국가 입찰 특성상 가격이 낮게 책정돼 있었다. 암젠 본사는 이처럼 낮아진 덴마크의 약가 데이터가 오는 10월 도입될 미국의 강제 약가 상한제(GLOBE/GUARD 모델)의 참조 기준이 될 경우, 연간 약 17억 5000만 달러(약 2조 4000억 원)에 달하는 미국 내 레파타 매출이 감소할 것으로 판단하고 덴마크 시장 포기를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미국 시장의 마진을 지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덴마크 시장을 포기한 셈이다. 덴마크 당국과의 마찰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미국 약가를 사수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계산이다.이처럼 미국 매출을 지키기 위해 해외 선진국의 신약 공급망에 차질이 빚어지는 사례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글로벌 본사의 엄격한 가격 통제 기조 속에서, 국내 허가는 이뤄졌으나 급여 신청은 물론이거니와 직접적인 마케팅과 영업까지 사실상 포기한 신약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임상현장의 설명이다.익명을 요구한 상급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특정 항암제의 경우 미국 MFN 정책에 따른 본사의 강력한 약가 방어선이 투영된 상징적 약제가 된 상황"이라며 "미국 외 시장에서 약가를 낮게 잡으면 안 된다는 본사 지침에 갇히다 보니 역설적으로 국내 임상현장에서는 가격 조정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힘든 구조가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자연스럽게 급여 신청도 사실상 포기한 것 같다. 한 사이클에 2100만 원에 달하는 약가는 사실상 마케팅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며 "국내 허가는 받았지만 글로벌 약가 연동 리스크 때문에 한국 내 직접적인 영업활동은 아예 포기한 것 아니냐는 의견까지 나온다"고 덧붙였다.약가유연제 도입 대응, 임상현장 혼란 여전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는 국내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이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약가 유연계약제(이중약가제)' 카드를 올해 상반기 꺼내 들었다. 다국적 제약사가 미국 MFN 정책의 타깃이 되지 않도록 대외적인 국내 건강보험 급여 상한가(표시가격)는 글로벌 수준에 맞춰 높게 유지해 주되, 실제 재정이 지출되는 '실거래가'는 사후 환급 등을 통해 별도로 챙기는 방식이다. 이미 노바티스, 노보노디스크 등 주요 다국적 제약사들이 일부 약제에 대해 계약을 체결하며 제도가 본격 시행됐다.그러나 정부의 전향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임상현장과 제약업계가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다. 당장 글로벌 당뇨·비만 치료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릴리 '마운자로(터제파타이드)'는 유연계약제 조율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다.한국릴리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마운자로의 당뇨병 급여를 놓고 약가 유연계약제 구조를 포함한 '이중 약가' 조율을 시도했으나, 결국 지난 5월 최종 협상 결렬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정부는 국내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이 차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약가 유연계약제(이중약가제)' 카드를 올해 상반기 꺼내 들었다. 당시 릴리 측은 비급여인 비만 시장과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당뇨 시장을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비만 환자용 가격에 비해 당뇨병 환자용 약가를 낮춰 제공하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대외적인 표시가격은 높게 유지하는 대신 차액의 일정 부분을 정부에 다시 돌려주는 '리펀드(환급제)' 방식을 논의했던 것이다.하지만 결국 행정적, 절차상의 문제가 발목을 잡으며 약가유연계약제 조율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약사 처지에서 '동일한 마운자로지만 당뇨용 약가를 처음부터 대폭 낮춰서 표시'하는 방안도 논의됐지만 결과적으로 협상 결렬로 이어졌다. 한국 시장의 낮은 표시가격이 글로벌 약가 산정의 기준(참조가격제)이 되어 타국 시장까지 연쇄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부메랑'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릴리는 최근 전열을 재정비해 급여 적용을 재신청하며 심평원 약제급여평가위원회부터 다시 과정을 밟아나갈 예정이다.또 다른 문제는 제도 운영 과정에서 불거진 치료제 공급 현장의 혼선이다. 약가 유연계약제의 핵심인 '비밀유지 조항'이 도매 및 유통업계, 약국가에 심각한 '정보 비대칭'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제약사는 계약 유지를 위해 실제 거래 가격을 철저히 함구하지만, 유통업체들은 차액 정산과 재고 관리를 위해 결국 우회적인 경로로 실제 가격을 파악할 수밖에 없어 유통 과정에서의 혼란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결국 글로벌 약가 혼란 속에서 국내 중증·희귀질환 환자들의 신약 접근성을 실질적으로 지켜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형식적인 우회로를 마련하는 수준을 넘어 글로벌 빅파마 본사의 규제 리스크를 상쇄해 줄 수 있는 정부의 사후관리 인프라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대한당뇨병학회 임원인 상급종합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미국 MFN 정책 등 글로벌 가격 연동 리스크에 묶인 빅파마 본사들은 한국 정부의 사후 환급 약속조차 실거래가 노출 우려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정부가 가격 조정의 유연성을 발휘하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외면한 채 경직된 규제 잣대만 고집한다면, 국내 허가는 받았지만 한국 내 영업과 마케팅을 아예 포기하는 '신약 패싱'의 피해는 고스란히 임상현장의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