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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돌봄 시대, 의사와 주간보호센터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환자의 모습은 종종 다르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세운 계획은 생활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곤 한다.혈압은 조절되어야 하고, 약은 규칙적으로 복용해야 하며, 운동과 식이 조절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설명된다. 하지만 환자의 일상에서는 그 계획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이 문제를 단순히 '순응도'의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의료가 다루는 영역과 환자가 실제로 살아가는 영역 사이에 구조적인 단절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령 환자를 진료할수록 이 단절은 더욱 뚜렷해진다. 여러 만성질환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신체 기능은 점차 저하되며, 일상생활 수행 능력 역시 함께 떨어진다.이때 환자의 예후를 결정짓는 것은 더 이상 '처방의 적절성'만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그 처방이 실제로 구현되는지, 그리고 기능 저하를 얼마나 늦출 수 있는지가 핵심이 된다.최근 정책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통합돌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환자가 병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곳에서 의료와 돌봄이 함께 작동하도록 구조를 바꾸겠다는 시도다.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이 구조 안에서 의사는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지금까지의 의료는 비교적 명확했다.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진단하고, 치료하고, 필요시 추적 관찰을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통합돌봄 환경에서는 환자의 상태가 병원 밖에서 대부분 결정된다. 의료가 개입하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길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특정 시설 하나가 아니라, 환자의 '생활 공간 전체'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주간보호센터는 그중 하나의 축이다. 환자가 낮 시간 동안 머물며 반복적인 관찰과 개입이 가능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환자의 삶은 주간보호센터에 머무는 시간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따라서 방문요양, 재가요양과 같은 영역까지 함께 보지 않으면 환자의 실제 생활은 여전히 의료의 바깥에 남게 된다. 중요한 것은 개별 서비스의 종류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여부다.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의료기관, 주간보호센터, 방문요양기관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사이의 연결은 충분히 설계되어 있지 않다.그 결과 현장에서는 돌봄 영역이 의료적 판단을 일부 대신하거나, 의료는 환자의 실제 생활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처방을 반복하는 일이 발생한다.통합돌봄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 분절을 단순한 '협력'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관리 체계로 재구성해야 한다.예를 들어, 외래 또는 방문진료에서 환자의 기능 상태와 위험요인을 평가하고, 주간보호센터에서는 낮 시간 동안의 활동과 재활을 담당하며, 방문요양과 재가요양은 가정 내에서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보조하는 구조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화와 신호가 다시 의료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순환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생활 속 관리'가 작동하게 된다.이 구조를 누가 설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만약 의료가 이 과정에 충분히 관여하지 않는다면, 돌봄을 중심으로 한 구조가 먼저 형성되고 의료는 필요할 때 호출되는 형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의사가 주간보호센터뿐 아니라 방문요양, 재가요양까지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변화 속에서 의료가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료실 밖의 구조를 이해하고, 필요하다면 그 설계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통합돌봄에서 의사들이 해야 하고, 할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한다.그 변화 속에서 의사가 어떤 위치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의료가 환자의 삶을 다시 중심에서 다룰 수 있을지, 아니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게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2026-04-06 05:00:00이슈칼럼

설명의무는 어디까지 정의할 수 있는가?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위원]의료에서 설명은 당연한 의무처럼 여겨진다. 환자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알 권리가 있고, 의사는 그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이 명제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단순해 보이던 질문은 곧 복잡해진다. 그 설명은 어디까지가 충분한가. 우리는 과연 그 경계를 정의할 수 있는가.진료실에서 이루어지는 설명은 결코 정형화된 문장이 아니다. 같은 질환이라도 환자의 나이, 기저질환, 생활환경에 따라 위험은 달라지고, 같은 치료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의사는 불확실성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제시하고, 환자는 그 선택을 받아들일지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설명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문제는 법이 이 설명을 '측정 가능한 의무'로 만들려 할 때 시작된다. 설명의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환자의 권리는 보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능한 모든 합병증을 빠짐없이 설명하라는 요구는 결국 두 가지를 초래한다. 하나는 끝없는 나열이다. 다른 하나는 책임의 확장이다.의학적으로 발생 가능한 위험은 무수히 많다. 어떤 것은 흔하지만 경미하고, 어떤 것은 극히 드물지만 치명적이다. 이 모든 것을 동일한 수준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환자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가. 오히려 중요한 위험과 덜 중요한 위험이 뒤섞이면서 판단은 흐려지고, 설명은 소통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설명이 많아질수록 이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이 가려지는 역설이 발생한다.더 중요한 문제는 설명의 평가가 언제나 '사후적'이라는 점이다. 치료 당시에는 합리적이었던 설명도, 결과가 나쁘면 다시 해석된다. "그 위험을 더 강조했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언제든지 제기될 수 있다. 결국 설명은 사전에 이루어지지만, 책임은 사후에 결정된다. 이 간극 속에서 설명의 의무는 점점 더 넓어지고, 그 경계는 흐려진다.특히 형사책임과 연결되는 순간,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설명이 부족했다는 이유만으로 의료행위 전체가 중대한 과실로 평가될 수 있다면, 의사는 치료 이전에 법적 위험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방어적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의료의 방향 자체를 바꾸는 요인이 된다. 위험한 환자일수록 더 많은 설명이 요구되고, 동시에 더 큰 책임이 뒤따른다면, 결국 가장 치료가 필요한 환자일수록 진료에서 멀어지게 된다.그렇다면 설명의 의무는 어디까지가 합리적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것을 설명하라'가 아니라, '의사결정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는 정보를 설명하라'는 데 있다. 사망이나 영구적 장애와 같은 중대한 위험, 그리고 치료 방법의 선택을 바꿀 수 있는 핵심 정보가 그 범위에 포함된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설명은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판단을 방해할 수 있다.또한, 설명의무는 어디까지나 의료행위의 보조적 요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의료의 본질은 치료에 있으며, 설명은 그 치료를 이해하고 선택하기 위한 과정이다. 설명의 부족이 곧바로 형사책임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의료를 위축시키고, 결국 환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결국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의료에서 설명의 의무는 완벽하게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환자의 상태와 의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인 영역이다. 따라서 법은 그 경계를 무한히 확장하기보다,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제한해야 한다.설명은 신뢰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이 처벌의 기준이 되는 순간, 신뢰는 사라지고 방어만 남는다. 의료가 본래의 목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설명의 의무 또한 그 본질에 맞게 이해되어야 한다.우리가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것은 설명의 양이 아니라, 설명의 방향이다. 환자의 선택을 돕는 설명인가, 아니면 책임을 대비하기 위한 설명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설명의무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026-03-31 05:00:00이슈칼럼

서울시립대 의전원 공약 정책 아닌 판타지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서울시립대 의전원 공약' — 이것은 정책이 아니라 판타지다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의료 공약이 등장한다. 문제는 그 공약이 의료 현장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탁상 위의 상상에서 빚어진 것인지를 국민은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그랬다.국민의힘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윤희숙 전 의원이 서울 공공의료 공백 해소를 위해 서울시립대 의학전문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결정된 3342명 증원 중에서 서울시립대 의전원에 40명 정원만 배정해달라며, 재정은 서울시가 전액 책임지고 국가 예산에 손 벌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전공 과목은 내과, 소아과, 정신과, 재활의학과로 한정하고, 졸업 후에는 15년간 서울시 산하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 복무하게 하겠다고 했다.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30년 임상 경험을 가진 의사의 눈으로 이 공약을 들여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와 무지의 결합이다. 정중하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공약이다.의과대학은 간판만 달면 생기는 것이 아니다의과대학을 설립하는 일은 건물 하나 짓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초의학 교육을 위한 해부학·생리학·병리학·약리학 전임 교수진이 필요하고, 이들이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실험실과 시설이 있어야 한다. 임상의학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병원이 필수이며, 그 병원에는 충분한 수의 지도전문의와 환자군이 확보돼 있어야 한다. 의사 국가시험 응시 자격을 갖추려면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양쪽의 엄격한 인증 기준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40명이라는 소규모 정원이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소수 정원일수록 학생 한 명당 소요되는 운영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전국 어느 의과대학도 소수 정원으로 운영되는 곳이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전임 교수 인건비, 기초실험 장비 구축비, 임상실습 비용, 학생 장학금까지 합산하면 실제 소요 예산은 수천억 원 규모를 쉽게 넘어선다. "서울시 예산으로 전액 책임지겠다"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조금만 계산해 보면 안다.'전공 지정' 발상, 어디서 나온 것인가더 경악스러운 것은 전공 과목을 내과, 소아과, 정신과, 재활의학과로 처음부터 못 박겠다는 구상이다. 이 발상이 의료 교육과 수련 체계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의학교육은 6년간의 의대 과정과 1년의 인턴, 4년의 전공의 수련으로 구성된다. 의대 교육과정은 특정 전공에 특화된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기본 역량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외과학이 없는 의대, 산부인과 교육이 없는 의대, 응급의학이 배제된 의대는 존재할 수 없다. 의대 교육과정은 의평원(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 인증 기준으로 엄격히 규정돼 있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졸업생은 의사 면허 시험조차 볼 수 없다.'소아과만 가르치는 의대'는 '수학만 가르치는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다. 교육 체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원하는 전공을 배정하고 싶다면 그것은 의대 설립이 아니라 전공의 수련병원 확충과 처우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의료인력 수급 문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서울은 정말 공공의료 공백 지역인가윤 후보는 세계 최고 수준의 빅5 병원들이 있지만 그 병원 문 앞까지 걸어갈 수 없는 사람, 119를 누를 엄두도 못 내는 사람이 서울에도 수없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해법이 왜 의전원 신설이어야 하는가.서울시는 이미 서울의료원, 보라매병원, 동부병원, 북부병원, 서남병원, 은평병원 등 다수의 시립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공공의료 인프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기관들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이유는 의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민간에 비해 열악한 처우와 경직된 운영 구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시립병원의 소아청소년과 야간진료, 정신건강의학과 외래를 강화하고 싶다면 의전원을 신설할 것이 아니라 그 과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급여와 근무환경을 개선하면 된다. 그것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해법이다.15년 의무복무라는 조건을 내건 공약도 마찬가지다. 의사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최소 10년을 투자한 사람에게 졸업 즉시 15년 복무를 강제하는 것은, 아무리 전액 장학금을 준다 해도 지원자를 구하기 어렵다.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자격은 대졸 이상이므로, 15년 복무가 끝나는 시점이면 이미 40대 후반이다. 이 공약은 현실적인 인력 수급 계획이 아니라 선거용 슬로건에 불과하다.KDI 출신 경제학자에게 묻는다윤희숙 후보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의 경제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 경력이 사실이라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학자라면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이 비용 대비 효과다. 수천억 원을 투입해 40명을 양성하고, 그들이 15년 복무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서울시 공공의료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의전원 설립으로부터 최소 20년 후다. 그 비용과 시간으로 현존하는 시립병원 인력의 처우를 개선하면 지금 당장 효과가 나타난다.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정책인지는 경제학의 기초를 아는 사람이라면 판단할 수 있다.의료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교육, 수련, 면허, 수가, 개원, 전문화가 촘촘히 맞물려 있다. 그 시스템을 이해하지 않은 채 '내 것도 하나 만들겠다'는 식의 접근은, 의료계에 대한 무지이자 국민에 대한 무례다.공약은 약속이 아닌 계약이다선거 공약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유권자와의 계약이다. 이행 불가능한 약속을 아름다운 포장지에 싸서 내미는 행위는, 표를 얻기 위한 기만이다.'서울시민만을 위한 의료사관학교'라는 말은 감동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 말 뒤에 구체적인 교수 확보 계획도, 교육병원 운영 방안도, 실질적인 예산 계획도 없다면, 그것은 언어로 포장한 허상이다.의료 공약은 다른 어떤 공약보다 정밀하게 검증돼야 한다. 잘못된 의료 정책은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이 공약의 민낯을 직시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의료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 일을 이제는 멈추기를 촉구한다.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알지도 못하면서 만들겠다고 하면 안 된다.
2026-03-30 05:00:00이슈칼럼

소아청소년 의료 정책의 민낯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소아청소년 인구는 전체의 14~15%를 차지한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예산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몫은 2.3%에 불과하다. 이 구조적 불균형 위에 전공의 충원율 붕괴와 전문의 고령화가 겹치면서 위기는 이제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이재명 정부는 소아비만을 질병으로 분류하고 학교·공공 의료기관에서 상담·관리를 지원하는 국가책임 강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2026년 보건복지부 예산 어디에도 소아청소년 비만 관련 신규 독립 사업 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숫자는 냉정하다. 초·중·고등학생 비만율은 2019년 15.1%에서 2024년 18.3%로 높아졌고, 과체중 이상 비만군은 전체 학생의 29.3%에 달한다.소아청소년 비만의 60~80%는 성인비만으로 이행하며, 비수도권과 저소득층에서의 비만율은 더 높아 건강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예산이 없으면 수가 급여화도, 학교 비만 상담 인프라도, 모니터링 체계도 불가능하다. 예산 없는 공약은 선언일 뿐이다.검진 체계의 현실은 더 참담하다. 2026년 법 개정으로 학생 건강검진 관리 주체가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 이전되었지만, 검진 비용(3만 원 수준)과 검진 항목은 2000년대 초반 설계 그대로다.과체중 이상이 29.3%에 달하는 시대에 체지방 분석이나 대사증후군 선별 검사는 없다. 청소년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는데도 표준화된 정신건강 스크리닝은 부재하고, 성조숙증·저신장·갑상선 기능 이상을 가려낼 성장 발달 평가 항목도 없다.구조적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다. 예산 주도권은 교육부가, 실무 수행은 공단이, 정책 전문성은 복지부가 각각 쥐고 있어 누구도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다. 올바른 개혁이 이루어지려면 예산의 복지부 이관, 검진 항목의 과학적 재설계, 예산 규모의 현실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의대 증원과 지역의사제는 어떤가. 정부가 내세우는 대책이지만 타임라인을 따라가면 공허해진다. 2027년 지역의사제 첫 모집(490명)이 이루어지더라도,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배출되는 시점은 2037~2038년이다. 10년 의무복무가 완료되어 실질적인 자율 배치가 가능해지는 것은 2047~2048년이다.문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대거 은퇴가 예상되는 시기가 바로 2027~2040년이라는 점이다. 최악의 공백기와 정책 효과의 발현 시기가 완전히 엇갈린다. 게다가 지역의사제는 '어디서 일할지'는 강제할 수 있어도 '무슨 과를 선택할지'는 유도하지 못한다.저수가와 의료사고 위험이라는 기피 원인을 해결하지 않는 한 동일한 결과가 반복될 뿐이다. 지방 소아청소년과 수련 인프라—소아중환자실, 소아수술실—가 부재한 상황에서 의무복무 10년과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조합은 열악한 환경에 묶이는 선택으로 인식되어 전공 기피를 오히려 심화시킬 수 있다.정부는 소아과 오픈런을 의사 부족의 증거로 제시하며 의대 증원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오픈런의 실제 원인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첫째는 일시적 수요 폭발이다. 코로나 이후 RSV·독감·마이코플라스마 트리플데믹으로 인한 단기 급증은 역학적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둘째는 요일·시간대 쏠림이다. 야간·주말에 문 여는 소아과가 없어 개원한 한두 곳에 수요가 집중된 것이지, '소아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 여는 소아과가 없어서'였다. 셋째는 폐업이 만든 착시다. 수요가 초과 상태라면 개원이 늘어야 정상인데, 소아청소년과에서는 오픈런과 폐업이 동시에 발생했다. 이는 의사 수의 문제가 아니라 수가 구조의 실패를 가리킨다.해법의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즉각적으로는 소아청소년과 수가 현실화, 야간·주말 가산율 인상,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이 이루어져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지역의사제 소아청소년과 전공 인센티브 도입(복무 단축)과 지방 소아 수련 인프라에 대한 선투자가 필요하다.구조적으로는 학생건강검진 예산의 복지부 이관, 검진 항목의 과학적 재설계, 소아청소년 의료 10년 로드맵 수립이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소아청소년 의료 위기의 원인은 의사 수가 아니다. 소아과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수가 구조다. 진단이 틀리면 처방도 틀린다. 지금 대한민국의 소아청소년 의료 정책은 증상은 보고 있지만 병인(病因)은 외면하고 있다.
2026-03-23 05:00:00이슈칼럼

아이없는 도시 필수의료 존속할 수 있나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얼마 전 한 중앙지는 「올해 '입학생 0명' 초등학교 전국에 210곳… 5년 전보다 81% 늘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충격적인 통계를 보도하였다. 전국 210개 초등학교에 올해 신입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단순한 교육 현장의 위기가 아니다. 이는 지역 공동체의 존립 기반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지표다. 출생이 멈춘 지역에서 과연 의료는 유지될 수 있는가. 특히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와 같은 필수의료 영역은 어떤 전제 위에서 존속할 수 있는가. '신입생 0명'이라는 숫자는 교육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의료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근본부터 다시 묻게 만드는 질문이다.1. 소아청소년과: 수요가 사라진 진료과소아청소년과는 출생아 수와 직접적으로 연동되는 진료과이다. 출생아가 연간 수십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군 단위 지역에서는 외래 수요 자체가 형성되기 어렵다. 영유아 건강검진과 예방접종, 경증 감염 질환 진료는 소아청소년과 의원 운영의 기반이지만, 아동 인구가 급감하면 이 구조는 유지될 수 없다. 응급·중증 환자는 이미 광역 거점병원으로 이송되고 있으며, 지역 내에서 완결되는 소아 진료 체계는 점차 해체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외래 환자 수가 확보되지 않는 한, 의원급 운영은 경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는 사명감이나 정책적 의무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수요 기반이 붕괴된 구조적 현실이다.2. 산부인과: 인프라의 붕괴와 재건의 어려움산부인과는 더욱 복합적인 조건을 요구한다. 분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4시간 전문의 상주 체계, 마취과와 소아과의 협진, 수술실과 신생아실 운영, 응급 대응 인력 확보가 필수적이다. 여기에 높은 의료사고 보험료 부담까지 더해진다. 연간 분만 건수가 극소수에 불과한 지역에서는 이러한 인프라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많은 지역에서 분만실이 폐쇄되었고, '분만 취약지'를 넘어 '분만 불모지'로 전환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분만실이 닫히는 순간 숙련 인력은 지역을 떠나고 협진 체계는 해체된다. 재건은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다.3. 의사 수 증원은 해법이 될 수 있는가의료정책은 흔히 "의사가 부족하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의료 공백이 발생하면 인력 부족을 원인으로 규정하고, 의과대학 정원 확대나 지역 배치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신입생이 단 한 명도 없는 지역에서 문제의 본질은 과연 의사 수에 있는가. 그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은 의료 인력이 아니라 의료를 성립시키는 인구 기반이다. 출생이 멈춘 지역에서는 소아 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분만 건수 역시 유지될 수 없다. 마취과·소아과 등 협진 체계도 붕괴된다. 결국, 남는 것은 응급 상황에서의 이송 체계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단순히 의사를 배치하는 정책은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필수의료는 특정 인력 1인의 존재만으로 완성되는 체계가 아니다. 이는 인구 규모, 지역 경제, 협진 인력, 응급 인프라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생태계 위에서만 유지된다. 생태계가 붕괴된 자리에서는 공급 확대가 아니라 구조 재설계가 선행되어야 한다.4. 필수의료의 재정의와 체계 전환신입생 0명 지역에서 의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다른 접근이 요구된다. 과거의 인구 구조를 전제로 "지역마다 동일한 병원을 유지해야 한다"는 방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첫째, 광역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한 통합 분만·소아 진료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진료 건수를 확보할 수 있는 중심 병원에 자원을 집중하고, 고위험 환자를 신속히 이송하는 체계를 병행해야 한다.둘째, 고위험 산모와 소아 환자를 위한 응급 후송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단순 이송을 넘어 의료진 동승, 신속 전원 프로토콜, 정보 공유 체계가 포함된 통합 네트워크가 필요하다.셋째, 순회 진료와 원격 모니터링을 결합한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상시 상주 인력으로 모든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주기적 방문 진료와 디지털 기반 건강 관리 체계를 통해 최소한의 접근성을 확보할 수 있다.넷째, 지역 보건소 기능을 고도화하여 예방 중심의 1차 건강 관리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일수록 치료 중심 구조보다 만성질환 관리와 건강 증진 기능이 중요해진다.이제는 분산형 공급 모델에서 밀집형·집중형 안전망 모델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맺음말「입학생 0명 초등학교 210곳」이라는 통계는 교육 정책의 경고가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필수의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없이 단순한 의사 수 증원만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될 것이다. 필수의료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지금, 근본적인 재설계를 요구하고 있다.
2026-03-17 05:00:00이슈칼럼

연명의료결정법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2018년부터 시행되었다.시행 후 연명의료 중단 건수는 2018년 3.1만 건(사망자 대비 비중 10.6%)에서 2024년 7.0만 건(19.6%)으로 증가하였고 2025년 8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 수는 300만 명(19세 이상 인구 6.8%)으로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생애 말기 현장에서는 여러 문제점으로 환자, 보호자, 의료진, 돌봄 제공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특히 이행 시기와 관련된 혼란은 법 제정 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연명의료 유보·중단의 이행은 임종기에서만 가능하다. 이행 시기와 관련하여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연명의료'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체외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투여와 그 밖에 담당 의사가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시술로서 치료 효과 없이 임종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임종기에서만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이행할 수 있다. 대한의사협회의 입장,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이 이행되는 현장과 최근 발표된 김태경 등의 보고서(연명의료, 누구의 선택인가: 환자 선호와 의료현실의 괴리, 그리고 보완방안)를 살펴본다.의료행위는 신체 침습을 동반한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를 거쳐 침습적인 의료행위는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는 거부를 전제로 하며 이러한 거부는 연명의료 유보·중단의 윤리적·법적 토대를 이룬다. 충분한 설명에 의한 동의 없는 신체 침습은 고문이 있고 예외적으로 응급의료법, 감염병예방법에서 가능하다.임종기에서만 침습적인 의료행위를 적법하게 유보·중단할 수 있다면 그 이전에 유보·중단하는 것은 불법적인가? 그리고 비윤리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비윤리적이지는 않다.먼저, 대한의사협회의 연명의료 유보·중단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다.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강령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 환자의 인격과 자기결정권을 존중,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환자가 인간답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선언하였고 의사윤리지침에서는 제35조 "말기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노력, 말기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치료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했다.대한의사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인 KMA POLICY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지'에서 "연명의료 중지에 대한 논의는 환자의 치료 거부권의 맥락에서 논의해야 하며, 환자의 죽을 권리와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 연명의료 중지에 대한 논의는 임종기 환자 혹은 말기 환자 등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 환자의 치료 거부권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2024년 7월 대한의사협회는 남인순 의원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와 말기 환자의 구분을 없애고, 말기 환자에게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여 환자가 존엄하고 편안하게 생애 말기를 맞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법안(의안번호 2201001)에 대하여 "말기 환자로의 통칭·통합을 통해 환자의 최선의 이익과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면서 환자의 존엄과 가치를 드높이고 보호하도록 하여야 할 것"으로 찬성 의견을 냈다.대한의사협회는 의사의 전문성과 전문가적 양심에 기초한 판단을 바탕으로 말기에서도 연명의료의 유보·중단이 가능함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으나 현실의 법 적용은 그렇지 않다.허대석 교수 등은 '연명의료결정법 적용에 따른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서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실제 현장에서는 임종 과정을 명확히 진단하는 것은 어렵다. 임종 과정이라는 애매한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다리다가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잔여 생명의 예측은 불확실성이 큰 영역이기 때문에 예측되는 잔여 생명 기간을 기준으로 말기, 임종 과정을 구분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말기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은 의학적 쟁점이 없는 상태로 대부분의 나라가 최선의 이익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두 가지 상황은 엄격히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말기'로 통일되어야 한다"라고 하여 말기로의 통일을 주장하였다.2025년 12월 11일, 김태경 등은 "연명의료, 누구의 선택인가: 환자 선호와 의료현실의 괴리, 그리고 보완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현행법은 이행 시점을 '임종기'로 한정하고 있어 국제 기준에 비해 적용 범위가 좁다는 지적,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주요국은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상태에서도 환자 또는 가족의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 결정 절차를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 임종기 이전 단계에 있더라도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판단되는 경우에는 이행 요건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의료전문가 단체와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 그리고 정부 출연 연구소가 한목소리로 말기로의 통일·통칭을 주장함에도 그 목소리를 외면하면 원하지 않는 신체 침해를 동반한 연명의료가 지속되면서 국민이 고생한다.연명의료결정법의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 이행 시기가 임종기에서 말기로의 통일·통칭이 하루빨리 실현되어 말기에서도 연명의료의 유보·중단이 가능해져 환자의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존중받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보호되기를 기원한다.
2026-03-16 05:00:00이슈칼럼

누굴 위한 '지역·필수·공공의료실' 신설인가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간판 바꾸기 전에, 먼저 반성부터 '지역·필수·공공의료실' 신설, 국민을 위한 것인가 행정을 위한 것인가보건복지부가 올해 상반기 중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을 신설한다고 밝혔다. 필수의료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이를 전담할 실장급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연간 1조 1,300억 원 규모의 특별회계도 설계 중이고, 5년간 총 4조 원에 달하는 신규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대단한 의지처럼 보인다.그러나 솔직히 말하자. 기대가 전혀 없다. 아니, 기대가 없는 것을 넘어 이것이 국민을 향한 또 하나의 기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책임 없는 곳에 해법도 없다지금 한국 의료가 처한 위기—응급실 공백, 소아과 붕괴, 지역 의료 소멸—는 하루아침에 생긴 일이 아니다. 수십 년간 누적된 정책 실패의 결과다. 그 정책을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집행해 온 주체가 바로 보건복지부다.그런데 지금 그 보건복지부가 새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정책이 실패했고, 왜 실패했으며, 누가 책임을 졌는지에 대한 평가 한 줄이 없다. 그저 '법이 통과됐으니 조직을 만들겠다'는 행정적 논리만 있을 뿐이다.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새 조직은 새로운 예산 낭비의 창구가 될 공산이 크다. 2026년 보건복지부 예산은 137조 원이다. 이 막대한 예산을 편성하면서 현장의 전문가들, 의료 일선의 의사들, 그리고 정작 의료를 이용하는 국민들과 얼마나 깊이 소통했는가? 거버넌스를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형식적 절차만 갖춘 채 독단으로 진행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순환보직이 만든 전문성의 공백보건복지부 내 순환보직 관행은 정책의 질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원인 중 하나다. 복잡한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수년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은 1~2년 만에 바뀐다. 의료 현장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법과 예산을 다루다 보니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지역·필수·공공의료실이 생겨나도 결국 같은 한계에 부딪힐 것이다. 예산만 낭비하는 부서가 하나 더 추가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국회와 의료계, 각자의 직무유기잘못된 정책을 견제해야 할 국회는 어땠는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은 채, 얕은 지식으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했다. 필수의료 공백이 현실화되는 동안에도 정치적 셈법에 따라 움직였다.대한의사협회도 자유롭지 않다. 전문가 집단으로서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정부 정책에 날카로운 비판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의협은 권력 다툼에 함몰돼 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전문가 단체는 존재 가치를 잃는다.■  '필수의료'라는 말의 함정'필수의료'라는 개념 자체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 상황만을 필수의료라 부를 것인가? 만성질환 관리, 소아 발달 평가, 정신건강 돌봄도 삶의 질과 생명에 직결된다. 개념의 범위가 좁을수록 정책의 사각지대는 넓어진다.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응급의료와 중환자 진료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사법 리스크다. '환자가 사망하면 의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서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어떤 유능한 의사도 고위험 진료 현장에 자원하려 하지 않는다. 코로나 유행 당시에도 경험했듯, 국민과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노력은 거의 전무했다. 제도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짜 해법은 겸손에서 시작된다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방향은 오히려 단순하다.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전문가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는 것, 정치인들이 짧은 지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정치 색채가 강한 시민단체는 배제해야 한다.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목소리를 국민의 목소리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예산과 법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신뢰는 투명한 반성과 개방적 소통에서 비롯된다. 지금 보건복지부와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새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과오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더 겸허한 자세로 현장에 다가가는 것이다.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반성 없는 움직임은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한국 의료를 돌아올 수 없는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흐름을 되돌리려면, 먼저 그 흐름을 만들어 온 사람들의 진정한 책임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2026-03-09 05:00:00이슈칼럼

재택의료의 새로운 과제

지난 2월 13일 보건복지부는 장기요양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2023년 28개 시·군·구 28개소로 시작한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기관은 통합돌봄법 시행을 앞둔 현재 전국 229개 모든 시·군·구에 설치되었으며, 총 422개소로 확대되었다.복지부는 의료-복지-돌봄-주거 등 통합 돌봄을 지역 사회에서 구현하기 위해 각 분야별 핵심 서비스 제공 기관을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며, 의료 서비스는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참여 기관을 중심으로 제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이와 같이 빠른 속도로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기관을 확장했다.재택의료는 일회성의 방문진료와 다르게 재택에 있는 거동이 불편하며 현저한 기능 저하가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대표적으로 장기요양 등급자 등) 환자 중심의 포괄적인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서 환자의 기능의 보존 또는 향상을 돕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 지속 거주(Aging in place)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이다.보건복지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5년 6월 기준 약 1만여 명의 환자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에 참여했으며, 재택의료 이용자의 경우 응급실 방문 횟수 및 입원 일수가 감소하며, 의료비 절감 등의 유의미한 성과를 도출했다고 한다.복지부, 공단, 전문가 및 현장 서비스 제공 의료 기관이 다 함께 노력해서 얻은 의미 있는 결과이며, 앞으로 초고령화 사회에 대비하여 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잘 보여준 시범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민이 지역사회 지속 거주를 위한 재택의료를 누리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첫째, 국내 재택의료의 미충족 의료를 생각한다면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단일 모형이 아닌 다양한 모형이 필요하다.잠재적 재택의료 대상 환자의 숫자는 차이는 있으나 약 5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로 예상한다. 현재 국내 장기요양 등급자의 숫자가 약 150만 명에 육박하며, 중증 장애인이 약 100만 명, 요양원 및 요양병원 이용 환자가 약 50만명, 연간 암 사망자 수 9만명 등등을 고려하면 25년 6월 기준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이용환자 1만 명은 잠재적 환자 숫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더욱이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은 장기요양 등급자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장기요양 등급자가 아닌 다양한 집단의 환자는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없다.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은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의 다학제 팀을 단일 의료기관 내에 구성하여 환자에게 포괄적인 재택의료를 제공하는 모형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국내 1차 의료기관의 85%를 차지하는 단독 개원 의원의 경우 간호사-사회복지사를 고용할 만큼 재택의료 환자를 진료하기가 어렵다. 지역사회 내 재택의료지원센터를 설치하여 1인 의원의 재택의료 참여를 지원하는 체계는 미충족 의료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둘째,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모형의 분화가 필요하다. 현재 재택의료센터 현황은 의원급 의료기관 229개소, 한의원 111개소, 병원·의료원 63개소, 보건소가 19개소가 참여하고 있다. 특히 의원, 병원, 의료원 등 현대 의학을 기반으로 한 의료기관이 제공하는 재택의료 서비스와 한의학을 기반으로 한 재택의료를 수행하는 한의원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사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음에도 동일한 모형으로 분류되고 있다.재택의료는 현대 의학에 기반한 모형으로 외국에서 발전해왔으며,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서비스는 1. 포괄평가와 케어플랜의 수립 2. 만성질환 관리를 위한 약물 처방 및 검사 및 다제약물 관리 3. 급성기 질환에 대한 대처 및 응급실 이용 예방 4. 치매 환자의 행동심리증상에 대한 약물적/비약물적 개입 5. 주기적인 가정방문과 환자 및 보호자에 대한 교육 6. 비위관, 도뇨관, 욕창 처치 등 와상 환자의 필요에 대한 대용 7. 노인 증후군에 대한 관리 및 재활 치료 등이며, 이러한 서비스 중 한 가지라도 부족한 부분이 발생하면 부족한 부분으로 인해 지역사회 지속 거주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의료기관의 종별 및 유형에 따라 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접근과 전략이 다를 것이므로 향후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모형을 구분하여 모집하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오랜 기간 외래에서 유지된 좋은 환자-의사를 지속할 수 있는 모형이 필요하다. 외래에서 지속해서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가 재택에 가서 지속적인 의료를 제공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는 없다.재택의료의 대상이 되는 환자의 다수는 오랜 기간 지역 의료기관에서 건강 및 질병 관리를 받아왔고, 그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의사가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환자를 잘 아는 의사가 재택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수가 및 제도가 필요하다.현재는 재택의료에 참여하는 의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수소문하여 재택의료기관을 찾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의 환자-의사 관계는 사라지게 되며, 새로운 환자-의사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인지 저하를 겪고 있는 환자들의 경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더 빈번하게 된다.대한민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몇 되지 않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하여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한 국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택의료의 대상이 되는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는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된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하여 매우 높은 노인 빈곤을 겪고 있다.필자는 대한민국 성공 신화 스토리는 이분들의 행복한 삶의 마무리로 완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의 지속성도 중요하지만 이 분들을 의료비 절감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사회가 함께 지원하기를 바란다. 재택의료도 이 분들의 행복한 삶에 중요한 역할로 자리매김하길 기원해본다.
2026-03-03 05:00:00이슈칼럼

위기 속 리더십, 교체가 능사는 아니다

박용현 회장[메디칼타임즈=박용현 회장]대한의사협회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적 조직에서 지도부에 대한 평가와 책임 요구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위기 국면에서의 선택은 평시와 달라야 한다.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다. 집행부 교체가 과연 현재 의료계가 직면한 문제의 본질적 해법이 될 수 있는가.오늘날 의료계를 둘러싼 환경은 어느 한 집행부의 역량만으로 규정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의대 정원 확대 정책, 필수의료 재정 구조 개편,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 직역 간 역할 조정 문제 등은 국가 보건의료 정책의 방향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장기적 구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과제들이다. 개인의 판단 착오나 협상 미숙으로 환원하기에는 사안의 규모와 복잡성이 지나치게 크다.위기 상황에서 리더십 교체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다. 그러나 교체가 곧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책 대응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대외 협상에서 신뢰의 공백이 발생할 위험이 존재한다. 정부와의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국면에서 지도부가 교체될 경우, 그 자체로 협상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 외부에서는 이를 내부 분열로 해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협상은 논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관된 메시지와 안정된 대표성이 중요한 자산이다.물론 집행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필요하다. 어떤 조직이든 긴장과 균형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반드시 즉각적인 교체일 필요는 없다. 정책 대응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회원 소통 구조를 보완하며, 대의원회의 감시 기능을 실질화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개선은 가능하다. 사람을 바꾸는 일은 가장 눈에 띄는 조치일 수 있지만, 제도를 다듬는 일은 더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지금 의료계가 처한 상황은 내부 정쟁에 에너지를 소모할 여유가 많지 않다. 외부 정책 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사회적 시선 또한 예리하다. 이럴 때일수록 조직의 안정성과 전략적 통합이 중요하다. 위기의 순간에 잦은 리더십 교체가 반복될 경우, 장기적 신뢰 자산은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다.집행부 교체는 감정적 해소의 수단이 아니라 전략적 판단의 결과여야 한다. 냉정한 평가와 합리적 보완을 통해 조직의 대응력을 높이는 길이 우선이다. 의료계의 미래는 단순한 인적 교체가 아니라, 일관된 방향성과 치밀한 전략 속에서 만들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의 확장이 아니라 역량의 집중이다. 위기 속에서 조직이 선택해야 할 길은 흔들림이 아니라 균형이며, 충동이 아니라 책임이다.
2026-02-26 08:47:00이슈칼럼

신입 회계사들, 전공의 미래일 수 있다

[메디칼타임즈=대한의료정책학교 장재영 교육연구부장] 작년 공인회계사 선발인원은 1200명으로 2018년에 904명과 비교하면 300여명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AI의 도입 및 미채용 합격생의 누적으로, 당해 합격자 대비 수습기관 등록률은 28.2%에 그쳤다고 한다. 정식 등록을 위해 회계법인 실무 수습이 필요한 직군 특성을 고려하면, 대형 회계법인들에서의 채용인원 감소는 뼈아프다. 비회계법인에서의 수요가 많아 선발인원을 늘렸다지만, AI라는 대체제가 등장하여 신입 회계사는 업무를 배울 공간이 없어진 것이다. 결론만 가리면 의료계와의 공통점이 보인다. 흔히 빅5라고 불리는 대형병원의 AI 도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진료지원인력이 상당 부분 주니어 의사들의 일을 대체하게 되면서 병원 경영진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전문의는 꼭 필요하므로, 전공의 수를 줄일 순 없을 것이다? 부디 조직 내 낙관론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그래서 더더욱 전공의는 '교육생', 다소 자존심이 상할 수 있지만 '학생의 연장'이라는 정체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병원은 대단히 노동집약적인 공간이고, 숙련된 의사가 되기 위해선 상당 부분 도제식 교육이 꼭 필요하다. 전문의는 임상의이면서 의과학자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에, 규모 있는 병원에서의 수련도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로자로서의 정체성이 앞설 경우, 전공의 업무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항목으로 분해된다. 반대로 배우는 사람, 학생을 대체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마침, 교육생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바탕이 생겼다. 2월 21일부터 전공의법 개정안의 몇몇 조항이 실행된다. 주당 근무시간 감소가 빠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나 - 시범사업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위로를 뒤로하고 – 연속 근무시간 감소, 임산부 보호, 육아/질병/입영에 의한 휴직, 앞 3개 사항에 대한 평가 등 당장 전공의들의 복지와 관련된 조항들이다. 특히 '평균 주 근무시간에 휴가/휴직 기간을 산입하지 아니한다' '육아/질병/입영 등 사유로 휴직을 신청하는 경우 허용하여야 한다' 등의 조항은 그동안 전공의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놓였었는지 방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그 디테일이 굉장히 중요해질 조항도 있다. 임신/출산 전공의의 추가 수련에 대한 내용, 지도전문의 세부 역할에 관한 규정, 전공의 수련 실태조사의 시행 및 환류 여부는 앞으로 전공의들이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다.갈 길이 멀지만, 근로하는 전공의로서 지켜져야 할 최소한의 것들은 법적으로 보장이 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전공의 노조 설립 이후, 개인 전공의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문제들이 신고되고 공론화될 수 있는 환경이 열렸다. 앞으로 수련환경평가 등 보장된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에 좋은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다.전공의 업무의 다수는 AI와 진료지원인력이 대체할 수 있다. 대체할 수 있지만,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는 장차 사회 구성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전문의 후보생, 즉 교육 대상이라는 정체성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그렇게 해도 될 배경들이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다.전공의법 개정안, 전공의노조의 출범 등 가용 가능한 자원을 잘 활용하여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위한 포지셔닝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참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하다. 어렸을 적, 어른들의 간섭을 피해 '공부 중'이라는 세 글자를 요긴하게 썼던 것을 기억하자.
2026-02-23 05:00:00이슈칼럼

의대증원, 국민 기만하는 정책은 필패한다

[메디칼타임즈=경남의사회 마상혁 공공의료위원장] 정부가 지역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천명한 뒤 불과 5개월 만에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추계위원회와 보정심의위원회라는 절차를 거쳤다고는 하나, 의료인력 수급이라는 고도로 복잡한 문제를 다루기에 5개월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인구구조의 변화, 질병 패턴의 전환, 의료기술의 발전, 지역별 수요의 편차, 의료인력의 유출입 동태—이 모든 변수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의료인력 수급 추계는 단순한 산술이 아니라 고도의 전문적 작업이다. 이를 5개월이라는 시간 안에 완성했다는 것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절차를 역순으로 밟았다는 합리적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추계위에서 만 명 이상 부족하다는 수치가 나왔고, 이후 보정심에서 이를 줄였다. 그런데 왜, 어떤 근거로 조정했는지는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다. 의료인력 추계를 위한 방법론은 국제적으로도 수요기반 모델, 공급기반 모델, 벤치마크 모델, 활용기반 모델 등 다양하며 각각의 전제와 한계가 다른데,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모델 선정 과정에서 방법론적 논란을 자초하였다. 더구나 이전 정부에서 수행한 추계와 유사한 결과를 반복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이 원하는 숫자를 생산하는 주문형 연구기관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연구의 독립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 국책연구기관은 그 존재 가치 자체를 의심받아 마땅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할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정부는 추계위에 의사 출신 위원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전문가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참여한 전문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상은 정반대였다. 의견이 실질적으로 수렴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으며, 이미 결정된 방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적 참여에 불과했다. 보정심의 분위기는 더욱 일방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참가자 대부분이 정원 증원에 찬성하는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런 구조에서 반대 의견이 반영될 여지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전문가 단체가 결국 들러리에 불과했다는 비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거버넌스의 외형은 갖추었되 실질은 부재한, 전형적인 껍데기 민주주의의 표본이다.현 정부는 시민참여를 유독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의료정책에서 전문가의 목소리를 형식적으로만 수렴하고, 이미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밀어붙이면서 충분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시민참여라는 가치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전문가 참여를 강조하면서 전문가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것, 그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그런데 정원 확대를 논하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교육환경이다. 현재 다수의 의과대학은 강의실 공간부터 부족한 상황이다. 기초의학 및 임상의학 교수 요원은 만성적으로 결원 상태이며, 임상실습 과정의 질적 수준은 수련병원의 여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정원만 늘리겠다는 것은 부실 교육을 제도적으로 양산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역사는 이 점에 관하여 이미 한 차례 뼈아픈 교훈을 남긴 바 있다. 1980년대 시행된 졸업정원제가 그것이다. 당시 준비 없이 도입된 정원 확대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새벽부터 등교하지 않으면 강의실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뒷자리에서는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해부학 실습에 필요한 시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겨울에만 제한적으로 실습이 가능했다. 유급률이 치솟았고,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중도 포기하는 학생이 속출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방치였으며, 의학교육의 이름을 빌린 졸속이었다.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놀라운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전 보건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당시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였고, 보정심에 참가한 한 인사는 그때 그렇게 했어도 지금까지 잘 버텨온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이 발언들의 저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열악한 교육환경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인가. 수준 낮은 교육을 용인하자는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의 교육과정에 대충이라는 단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과거의 실패를 부정하는 자들이 미래의 정책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정책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정원이 늘어난 이상 남은 것은 교육의 질에 대한 철저한 관리이다. 교수 대 학생 비율, 실습 시설의 적정성, 임상실습의 질적 수준에 대한 엄격한 평가 기준이 수립되어야 하며, 기준 미달 대학에는 정원 감축을 포함한 실효적 제재가 뒤따라야 한다. 교육의 질 보장은 의과대학 과정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졸업 후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과정까지 포괄해야 한다. 일정 시간만 채우면 전문의 시험 응시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현행 방식은 재검토되어야 하며, 역량 기반 수련 체계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학교와 병원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에도 사안의 경중에 따라 엄격한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이 정책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간과된 문제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정원을 늘린다 하더라도 그 학생들이 모두 졸업하고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합격하더라도, 의과대학 6년에 인턴 1년, 전공의 3년에서 5년을 거쳐 독립적 진료가 가능해지기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지난 10년 동안 지역의료는 어떻게 버틸 것인가. 이에 대한 구체적 대책이 전무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방의 응급실이 문을 닫고 있고, 산부인과가 사라지고 있으며, 소아과가 폐업하고 있다. 10년 뒤를 위한 정책은 있으되 오늘의 위기를 넘길 방안은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정책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다.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지역의료 붕괴는 의사 수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지방 붕괴라는 거시적 구조 변동의 한 단면이다. 인구 감소, 고령화, 젊은 층의 수도권 집중, 지방 경제의 위축, 생활 인프라의 열악함…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적 문제를 의과대학 정원 확대라는 단일 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단순화이다. 많은 정치인과 국민이 의사 머릿수만 늘리면 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의사 수가 늘어나도 지역에 머물 유인이 없으면 그들은 수도권으로 향한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이미 확인된 사실이며, 세계 여러 나라의 경험이 이를 거듭 증명하고 있다.일본은 2008년 이후 의과대학 입학정원을 꾸준히 늘려 현재 약 9,400명 수준에 이르렀으나,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 집중 현상은 완화되지 않았다. 특정 지역에서 일정 기간 근무할 것을 조건으로 입학정원을 배정하는 지역 테두리제를 도입했지만, 의무 기간 종료 후 도시로 이동하는 비율이 높아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은 2018년 의과대학 정원을 25%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으나, 교육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해 계획대로 증원하지 못한 대학이 다수 발생했다. 현재도 전체 의사의 약 30%를 해외 출신 의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지방의 의사 부족은 여전히 심각하다. 호주는 2000년대 중반 정원을 대폭 확대한 결과 도시 지역에서는 의사 과잉의 조짐이 나타나는 반면, 원주민 거주 지역과 농촌의 의사 부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캐나다는 다양한 인센티브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전문의 수련 후 지역 복귀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며, 미국은 의대 정원을 늘려도 레지던시 자리가 동반 확충되지 않아 병목이 발생하고 농촌 지역의 의사 부족은 수십 년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된 교훈은 단 하나이다.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지역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역 정착 유인 체계, 교육 인프라 확충, 수련 체계 개혁, 지역 사회 기반 강화가 함께 가지 않으면 늘어난 의사는 그저 대도시의 의사를 한 명 더 늘릴 뿐이라는 것이다.2025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조원준 전 정책수석이 전문 기자 간담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의료정책은 민주당식 의료정책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이 정책이 순수한 공익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의 산물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전문가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원래 가지고 있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해석이다. 대통령은 의료정책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료 현장과 학계의 전문가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며 신중하게 정책 결정을 내렸어야 했다. 의료인력 수급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대통령의 한마디로 방향이 정해지고 속도가 결정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은, 전문성에 대한 경시이자 국가 정책 결정 과정의 심각한 왜곡이다. 정책의 세부 사항은 전문가와 관료의 영역이며, 이를 존중하는 것이 책임정치의 기본이다.정부가 결정한 이상 이 정책이 취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이 정책이 실패할 경우—지역의료가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 부실 교육으로 인한 의료사고가 증가하는 경우, 의료인력의 수도권 쏠림이 심화되는 경우—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가 사전에 명확해야 한다. 책임정치와 책임행정의 원칙에 따라, 정책 결정에 참여한 모든 주체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추계위와 보정심에 참여한 학자들에게도 묻는다. 정권의 눈치를 보며 소신을 접었는가, 아니면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원칙에 기반한 의견을 개진했는가. 당신들의 판단이 틀렸을 때, 그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국민을 기만하는 거버넌스로 설계된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형식만 갖춘 전문가 참여, 결론이 정해진 추계, 교육환경을 무시한 정원 확대, 10년의 공백에 대한 무대책, 지방 붕괴라는 구조적 원인에 대한 외면—이 모든 것이 겹쳐 정책은 실패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언제나 그렇듯,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전문가적 판단이며, 투명한 과정, 실질적 참여, 책임 있는 결정이라는 세 가지가 담보되지 않는 한, 어떤 정책도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2026-02-19 05:00:00이슈칼럼

'만성질환'에 갇힌 일차의료

[메디칼타임즈=김병철 대한이비인후과학회 부이사장]대한민국 의료전달체계의 허리를 지탱하는 일차의료 강화라는 대의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사회 일차의료 혁신시범사업(안)'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일선 현장의 특수성은 무시된 채 특정 진료과 중심의 모델을 모든 일차의료기관에 강제로 덧씌우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이비인후과가 마주한 진료 현장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이비인후과는 '상담'만이 아닌 '처치와 술기'의 현장이다이번 혁신안의 핵심은 기존 행위별 수가를 묶어 '월별 정액관리료'로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혈압, 당뇨와 같이 약 처방과 상담이 주를 이루는 내과적 만성질환 관리에는 적합할지 모르나, 매 순간 손기술을 동원한 처치가 이뤄지는 이비인후과적 진료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가 증상 악화로 내원했을 때, 이비인후과 의사는 단순히 약만 처방하지 않습니다. 비강 내 점막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세밀히 관찰하고, 비강 세척이나 하비갑개 처치 등 즉각적인 술기를 통해 환자의 호흡을 개선합니다. 만약 화농성 중이염 환자라면 고막 절개나 이루 흡인같은 정교한 처치가 필수적입니다.이러한 '행위'들은 환자의 고통을 즉각적으로 경감시키는 핵심적인 의료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상담 관리료'라는 이름의 정액제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면, 복잡하고 정교한 처치를 수행할수록 의료진의 노동 가치는 저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결국 현장에서 꼭 필요한 처치를 기피하게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여,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질환의 역동성을 무시한 'HCC 위험도 분류'의 허점정부가 도입하려는 미국식 Medicare 위험보정 모델(HCC) 역시 이비인후과 진료의 역동성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비인후과를 찾는 환자들은 계절적 요인이나 급성 악화에 따라 진료의 강도가 급격히 변합니다.단순 만성 질환자로 분류된 환자라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돌발성 난청이나 심한 어지럼증(이석증 등)이 발생하면 즉각적이고 집중적인 검사와 처치가 투입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급성기적 변화와 이비인후과 특유의 고난도 처치 수요를 '정액제 기반의 환자군 분류'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질환의 경중을 숫자로만 재단하는 방식은 현장의 복잡다단한 진료 양상을 결코 담아낼 수 없습니다.주도권 없는 '거점 지원기관'과 행정 과부하의 늪거점 지원기관(2차 병원 등)이 다학제 팀을 통해 일차의료를 지원한다는 발상 또한 주객이 전도될 우려가 큽니다. 이비인후과 질환은 장비 의존도가 높고 숙련된 전문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점 기관이 환자 관리의 주도권을 쥐고 의원을 '하부 조직'처럼 관리하려 든다면, 일차의료기관의 자율성은 고사하고 진료의 연속성마저 끊어질 것입니다.여기에 야간·휴일 비대면 상담까지 강제화된다면, 가뜩이나 인력난과 행정 부담에 시달리는 소규모 의원들은 고사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특히 법적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의 비대면 상담은 의료진에게 '희생'만을 강요하는 독소 조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진정한 혁신은 현장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혁신은 현장의 동의와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멈추고 의료계와 진정성 있는 소통에 나서야 합니다.1. 행위별 수가제(FFS)의 근간 사수: 상담과 관리뿐만 아니라 이비인후과 특유의 처치와 술기 가치가 별도로 보상받는 '혼합 지불제'가 명문화되어야 합니다.2. 과정 중심의 평가 체계: 결과 수치 하나로 의사를 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위해 투입한 의료진의 노력과 과정을 인정해 주는 지표가 마련되어야 합니다.3. 법적 안전망 구축: 야간 상담이나 재택 의료 중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해 의료진을 보호할 구체적인 법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우리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지역사회에서 국민의 귀, 코, 목 건강을 지키는 최전방 파수꾼입니다. 현장의 온기를 잃어버린, 차가운 수치 중심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진정으로 일차의료를 살리고자 한다면, 책상 위 데이터가 아니라 진료실에서 땀 흘리는 의사들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길 촉구합니다. 
2026-02-09 05:00:00이슈칼럼

정책공학자들의 교묘한 설계, 이중구속

1. 이중구속(Double Bind)과 조현병원래 '이중구속'은 정신의학에서 조현병(정신분열증)의 발생 원인을 설명할 때 쓰이는 이론이다.부모나 권위자가 자녀에게 상충하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보내서, 아이가 어느 쪽을 선택해도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심리적 덫을 말한다. 이 모순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결국 논리적 사고 체계가 붕괴되고 정신적으로 파괴된다.그런데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책공학자들은 이 병리적 기제를 의료 시스템 설계의 핵심 원리로 사용하고 있다.2. 정책공학자의 시각: 시스템을 유지하는 '정교한 덫'정책공학자들에게 의사는 '치료하는 지성'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비용'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효율적 통제를 위해 다음과 같은 이중구속의 장치를 곳곳에 배치했다.장치 1: 사법적 '최선'과 행정적 '최저'의 충돌설계: 법원 판결은 '의학적 교과서'를 기준으로 의사에게 무한 책임을 묻게 하고, 심평원 심사는 '재정 지침'을 기준으로 최저 비용을 강요한다.이유: 어느 장단에 춤을 춰도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 혹은 '부당 수익자'의 프레임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이 불확실성이야말로 의사를 위축시키고 국가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장치 2: 룰을 감춘 깜깜이 심사 (Black-box)설계: 심사 기준과 전산 필터링 로직을 '영업비밀'이라며 감춘다.이유: 룰이 투명하면 의사들이 그에 맞춰 진료를 최적화(Optimization)하고 이는 곧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의사가 삭감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사리게 만드는 '공포 마케팅'이 그들의 설계 목적이다.3. 전문가의 지성을 말살하는 '행정적 조현병'이 시스템은 참담하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를 넘어선, 전문가 집단에 대한 '심리적 거세'다.정책공학자들은 의사가 개별 환자의 맥락을 읽는 전문적 지성을 발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저 삭감이라는 전기 충격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이자, 주는 먹이(수가)와 가해지는 벌(삭감)에 길들여진 앵무새를 원할 뿐이다.언젠가 공단 직원이 내뱉은 "환자가 원하면 놔주고, 청구하고, 삭감 당하세요. 억울하면 법을 바꾸든가요"라는 말은 이 설계의 오만함과 잔인함을 증명한다.바꿀 수 없는 법을 핑계 삼아 의사의 영혼을 갈아 넣는 이 조현병적 환경에서, 의사는 소신을 삭감당하고 환자의 건강권은 숫자의 함정에 빠진다.결국 이것은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정교한 폭력이며, 전문가를 지배하려는 저급한 갑질일 뿐이다.이중구속의 덫을 걷어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 의료에 '최선의 진료'란 허구에 불과하다.
2026-02-05 05:10:00이슈칼럼

지역의사제 입시 불공정 낳고 지역 의료는 외면하나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정형외과) ] 최근 ‘지역의사제’ 도입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지방 유학이 의대 진입의 지름길”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정부는 ‘지역 의료 공백 해소’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의료 현장과 입시의 최전선에서 바라본 이 제도는 과연 지역 의료를 살리는 ‘심폐소생술’인가, 아니면 공정성을 해치고 의료 생태계를 교란하는 ‘독배’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농어촌 전형’ 위에 또 하나, 불공정의 제도화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제도의 설계가 자칫 특정 집단에게 과도한 특혜를 부여하는 ‘이중 사다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논의되는 지역의사제가 기존의 ‘농어촌 전형’ 등 사회통합전형과 중첩 지원이 가능해질 경우, 심각한 역차별이 발생한다. 이미 농어촌 전형이라는 별도의 트랙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자격을 갖춘 수험생이 ‘지역의사제 전형’까지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면 이는 명백한 ‘기회 중복’이다. 일반 수험생들은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반면, 일부는 정책적 혜택을 업고 두 개의 동아줄을 잡는 셈이다. ‘지역 의료를 살리겠다’는 명분이 입시의 공정성, 즉 헌법적 가치인 기회균등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면, 이 정책은 시작부터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10년 의무 복무? ‘정착’ 없는 ‘거쳐가는 정거장’ 될 뿐“대치동을 떠나 지방으로”라는 구호는 현실을 모르는 낭만적인 서사다. 지역의사제가 강제하는 10년의 기간(수련 기간 포함)은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일 뿐, 지역에 뿌리내리는 ‘정착’을 담보하지 않는다. 의무 복무가 끝나는 순간, 대다수의 의료진은 자녀 교육, 생활 인프라, 그리고 더 나은 수익 구조가 보장된 수도권으로 회귀하거나, 비급여 인기과로 이탈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지역의사제는 지역 병원을 잠시 거쳐가는 ‘수련 정거장’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크다. 지역 환자들이 원하는 것은 잠시 머물다 떠날 ‘한시적 의사’가 아니라, 내 병을 꾸준히 봐줄 ‘숙련된 전문의’다.‘인사 행정’ 아닌 근본적 ‘의료 정책’이 필요하다지방 의료가 무너진 원인은 의사 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의사가 그곳에 남을 수 없게 만드는 구조적 환경 때문이다. ▲원가에도 못 미치는 필수의료 저수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과도한 형사 처벌 ▲지방 병원의 열악한 인프라 등 핵심적인 문제는 방치한 채, 입시 제도를 비틀어 숫자만 채우려는 시도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다. 이는 ‘의료 정책’이라기보다 기계적인 ‘인사 배치’에 가깝다. 정부는 입시판을 흔드는 미봉책을 멈추고 정공법(正攻法)을 택해야 한다. 지방 의료기관에 대한 과감한 재정 투자, 필수의료 의료진에 대한 확실한 사법적 보호 장치 마련, 그리고 지역 근무가 의사로서의 커리어와 경제적 보상 측면에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도록 수가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공정하지 못한 입시 제도로 선발된 의사들이, 강제성에 묶여 근무하는 병원에서 환자와 깊은 신뢰를 쌓기는 어렵다. 지역의사제가 또 하나의 ‘입시 로또’ 논란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의료계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공정성을 훼손한 채 지역을 살릴 수는 없다.
2026-02-03 05:30:00이슈칼럼

통합돌봄법,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메디칼타임즈=서울시의사회 백재욱 부회장 ] 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 귀에 유독 자주 걸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통합돌봄법'입니다. 오는 2026년 3월 27일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지자체마다 대비에 철저를 기하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정확한 명칭은 「의료·요양 등 지역 돌봄의 통합지원에 관한 법률」입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이나 환자가 병원이나 요양시설이 아닌 '자신이 살던 집과 지역사회'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의료, 요양, 돌봄 서비스를 통합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죠. 선진국에서 강조해온 'AIP(Ageing in Place)', 즉 살던 곳에서 품위 있게 늙어가는 삶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취지입니다.1. 흩어진 서비스를 하나로, 패러다임의 전환그동안 의료(병원), 요양(장기요양), 돌봄(복지관) 서비스는 각각 분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비스 간 연계가 어렵고, 굳이 입원하지 않아도 될 분들이 병원에 머무는 '사회적 입원' 문제도 심각했죠. 이제는 지자체가 '컨트롤 타워'가 되어 대상자를 발굴하고, 건강 상태에 맞춘 '케어 플랜'을 짜서 의료와 생활 지원을 묶어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병원 중심'에서 '집 중심'으로 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입니다.2.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막막함"뿐입니다정책의 청사진은 화려하지만, 당장 돌봄이 필요한 가족을 둔 분들의 현실은 어떨까요?"우리 아버님도 저 서비스를 받게 하고 싶은데, 어디로 연락해야 하나?"우선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전화를 겁니다. 장기요양서비스에 대한 긴 설명을 듣고 나면 "의사소견서를 첨부하라"는 안내가 돌아옵니다. 여기서부터 보호자의 한숨은 깊어집니다. 이미 거동이 불편해 댁에 누워 계신 지 2년, 그동안 대리 처방으로 겨우 버텨온 아버님을 소견서 한 장 받자고 어떻게 병원까지 모시고 갈 수 있을까요?사방팔방 전화를 돌리다 지쳐갈 때쯤, 겨우 방문진료 의원과 연락이 닿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습니다. "소견서 작성을 위한 방문은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모시고 나오세요." 이쯤 되면 잡고 있던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3. 의료 현장의 괴리, "소를 키울 사람이 없습니다"반대로 통합돌봄의 또 다른 축인 의료계의 입장은 어떨까요? 지역의 의원을 운영하는 원장님은 법안의 취지에 공감해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에 참여하며 환자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가끔 걸려 오는 전화는 사업 취지와는 무관한 응급 상황 해결 요청뿐입니다.결국, 환자 가족은 "갈 곳이 없다"고 울분하고, 의료진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료와 복지, 요양을 하나로 묶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실제 현장에서 발로 뛰며 '소를 키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4. 말잔치보다 절실한 것은 '실천의 손길'올해 3월부터 사업이 본격화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알맹이 없는 정책과 MOU(업무협약)만 남발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양이 목에 걸 방울'의 성능을 평가하는 말잔치가 아니라, 그 방울을 실제로 걸고 책임질 사람의 손길입니다.서울시의사회는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역 기반 재택의료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의료·요양·복지의 연계체계를 실질적으로 구축하고 있습니다.통합돌봄이 뉴스 속 정책이 아니라, 우리 집 안방과 동네 골목에서 체감되는 서비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현장의 의사들이 직접 뛰며 실천의 방법을 제시하겠습니다.결국 통합돌봄의 성패는 "누가 소를 키우느냐"가 아니라, "함께 키우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2026-02-02 05:00:00이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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