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친환경 기술력과 윤리경영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전기전자기업을 표방해온 지멘스 한국법인 헬스케어(이하 한국지멘스헬스케어)가 불공정행위로 사정당국 조사를 받고 있다.
지난 4일 한 언론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3일 한국지멘스헬스케어에서 병원을 상대로 한 불공정행위와 관련한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올해 10월 초 한국지멘스에서 분사한 의료부문 회사 한국지멘스헬스케어는 한국지멘스 시절 CT·MRI를 판매하면서 병원에 소프트웨어(SW) 사용권만 제공하고 소유권은 주지 않는 등 관련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는 조사를 위해 한국지멘스헬스케어가 갖고 있는 서비스 계약서도 수거해 간 것으로 전해졌다.
전 세계 의료기기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GE·PHILIPS와 함께 'GPS'(GE·PHILIPS·SIEMENS)기업으로 불리는 한국지멘스헬스케어에 대한 공정위 조사는 충격적이다.
더욱이 그 혐의가 고객인 병원 대상의 불공정행위라는 점에서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의료계에 미칠 파장 또한 적지 않을 전망이다.
사실 한국지멘스헬스케어의 불공정행위는 한국지멘스 출신 전 직원들을 통해 이전부터 공공연한 비밀로 들려왔다.
지금에서야 뒤늦게 공정위 조사가 이뤄진 점이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
기자가 한국지멘스 시절 근무한 직원들에게 제보 받은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윤리경영'(Compliance)을 강조해온 독일 다국적기업 한국지멘스헬스케어가 중소병의원을 상대로 '비윤리적이고 불공정한' 의료기기 매매계약을 해왔다는 그들의 의혹 제기를 믿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지멘스 전 직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던 한국지멘스헬스케어 불공정행위는 과연 무엇일까?
중소병의원은 호갱님?…독소조항 담긴 매매계약서 의혹
한국지멘스헬스케어의 불공정행위 의혹은 중소병의원과 작성한 '의료기기 매매계약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지멘스 전직 직원은 "계약관계상 절대적인 '갑' 위치에 있는 대학병원과 중소병의원과 작성하는 의료기기 매매계약서는 다르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한국지멘스 시절부터 이어진 불공정행위는 바로 중소병의원과 체결하는 CT·MRI 등 의료기기 매매계약서 내용 중 일방적으로 중소병의원에 불리한 독소조항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가 말한 독소조항이란 이렇다.
한국지멘스헬스케어가 MRI 공급계약을 체결한 A병원과 매매계약서를 작성할 때 해당 장비 '소프트웨어' 사용권은 병원에 제공하되 소유권은 '지멘스'에 있다는 계약규정을 말한다.
자동차로 따지면, 고객이 비용을 지불해 제조사로부터 자동차를 구매했지만 실질적인 구동에 필요한 핵심 '전자제어시스템'은 여전히 제조사가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와 관련해 전 직원은 "CT·MRI가 작동하는 핵심은 결국 운영 콘솔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다. 이를 뺀 나머지는 고가의 고철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소병의원이 장비를 구매했다면 당연히 운영 프로그램까지 함께 산 것인데 소프트웨어에 대한 권리가 지멘스에 있다는 규정은 공정거래법상 불공정한 행위"라고 꼬집었다.
더불어 "소프트웨어 권리가 지멘스에 있다는 규정은 중소병의원 입장에서 추후 하자 보증기간이 끝난 후 제3자와의 AS 계약과 장비 판매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이 주장은 메디칼타임즈가 입수한 의료기기 매매계약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B병원이 2013년 O월 O일 체결한 매매계약서를 보면 제5조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1항은 "장비와 함께 인도된 소프트웨어 사용권은 장비 매매가격에 포함돼 있다"고 규정했다.
특히 2항에는 "을이 갑(병원)에게 제공한 소프트웨어의 모든 권리는 'SIEMENS'에 있으나 갑은 규정된 목적에 한해 무기한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어 3항 "소프트웨어 및 그에 관련한 서류는 일부 혹은 전부를 추출해 갑의 장비운전자 이외의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와 4항 "갑 혹은 갑이 지정한 제3자가 을을 대신해 공급 장비의 보수 및 정비 작업을 시행할 경우 보수 작업용 소프트웨어에 관하여 사전에 을과 유상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야 한다"고 적혀있다.
한국지멘스 출신 또 다른 직원은 "이 같은 불공정 계약은 대학병원과 달리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구매 및 법무 팀이 없는 중소병의원을 대상으로 이뤄져왔다"고 밝혔다.
대학병원의 경우 자체 표준계약서를 갖고 있으며 구매 또는 법무 팀이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기 때문에 장비 소프트웨어 권리를 지멘스가 소유한다는 등 문제가 되거나 클레임(Claim)이 걸릴 만한 조항도 없을뿐더러 그런 계약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전언.
반면 규모가 작고 원장 혼자 장비 도입을 결정하는 중소병의원은 업체에 유리한 불공정한 독소조항이 담긴 매매계약서로 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다.
보험 이용약관을 모두 읽어보냐고 반문한 이 관계자는 "중소병의원 원장 대부분은 매매계약서를 작성할 때 장비 가격 및 구성품·하자 보증기간 등 간단한 내용만 확인할 뿐 다 읽어보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지멘스와 매매계약을 체결한 중소병의원 일부는 아직도 장비 소프트웨어 권리에 대한 내용을 여전히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한국지멘스헬스케어 조사에 착수하면서 중소병의원과 맺은 매매계약서상 소프트웨어 권리에 대한 불공정행위 의혹을 밝혀줄 주사위는 던져졌다.
만에 하나 공정위 조사로 한국지멘스헬스케어의 불공정행위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독일 '폭스바겐' 사태와 마찬가지로 한국시장에서 입을 신뢰도 하락과 영업 타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욱이 중소병의원 고객을 '호갱님'(호구+고객)으로 삼아 정당한 소비자권리를 유린했다면 그에 따른 의료계에 미칠 후폭풍 강도와 규모는 예측조차 쉽지 않다.
업계에 따르면 이번 공정위 조사는 지멘스 장비를 구매한 의원에서 직접 제소해 이뤄졌을 만큼 중소병의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운데 공정위가 한국지멘스헬스케어를 상대로 서비스 계약서를 수거하는 등 불공정행위 혐의 조사에 착수한 점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공정위에 한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대학병원·중소병의원과 한국지멘스(또는 대리점) 간 체결한 '의료기기 매매계약서'를 조사해 보기를 말이다.
서비스 계약서보다는 의료기기 매매계약서에서 불공정행위 혐의 단서를 찾는 게 더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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