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가는 세번째 해외여행지로 발칸을 골랐다. 이베리아반도와 아나톨리아반도를 돌아보면서 유럽문명과 아시아문명이 부딪혀 만들어낸 것들을 보고 느끼는 여행의 연장이다. 그것도 터키를 다녀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발칸에 가는 이유는 오스만의 이슬람문명과 오스트리아의 기독교문명의 충돌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쇠도 달구어졌을 때 두드리라는 우리네 옛말처럼 말이다.
충분한 고민 없이 다소 감각적으로 결정한 바가 없지 않다. 발칸반도의 여행상품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를 기본으로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들어가거나, 혹은 동유럽 국가들을 연계한 다양한 상품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항공편에 따라서도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이탈리아 등 다양한 경로를 따라가기 때문에 그야말로 잘 비교해보고 결정을 해야 한다.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결정을 하고보니 크로아티아 중심의 여행이 되고 말아서, 언젠가는 또 다른 경로를 따라가는 발칸여행에 나서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을 자세하게 살펴볼 요량으로 크로아티아지역을 중점적으로 돌아보는 상품을 골랐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들어가서 오스트리아를 지나 슬로베니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잠시 일별하고, 크로아티아를 샅샅이 돌아본 다음에 베네치아를 거쳐 밀라노에서 귀국비행기를 타는 일정이다.
유럽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 발칸반도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쳐 있는 발칸산맥을 이르는 터키어에서유래했다. 터키어 발칸(Balkan)은 ‘거칠고 숲이 많은 산악지대’를 의미하지만,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발칸반도만을 의미한다. 근세까지도 고전교육을 받은 유럽 사람들은 발칸산맥을 ‘오래된 산맥’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헤무스(Haemus)라고 불렀다.
발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이다. 그전까지 오스만사람들은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로 루멜리아라고 불렀고, 유럽 사람들은 마케도니아, 다키아 등 옛날 이름으로 부르거나 ‘유럽의 터키’라고 불렀다. 경계가 모호하지만 일반적으로 발칸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 강을 잇는 선의 이남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전부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이 포함된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발칸국가라고는 부르지 않는다.(1)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근세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세기 말에도 발칸지역의 대부분은 오스만제국이 지배하였지만,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영유하고 있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라구사공화국 같이 작은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19세기 들어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이 독립하면서 오스만제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세르비아는 1,2차 발칸전쟁을 통해 신흥강국의 발돋움하였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발칸 반도 내의 슬라브 민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려는 야심을 키웠다.
결국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완충지역이었던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고도 해결되지 못한 민족간의 갈등이 원인이 된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후에는 ‘서로 적대하는 작은 세력으로 분열시키다’라는 의미의 ‘발칸화하다(balkanize)’ 혹은 ‘발칸화(balkanization)’라는 단어를 낳게 되었다.(2)
발칸반도의 불행은 7세기부터 최소한 17세기 말까지 유럽의 영토와 정신을 복잡한 투쟁 속으로 몰아넣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몰이해로 생겨난 깊은 간극 탓이라고 발칸사의 권위자인 마크 마조워교수는 말한다. 그가 “무슬림국가들이 비이슬람교도를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기독교 국가들은 무슬림을 추방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하기까지 했다(3).”라고 한 것을 보면 기독교국가들의 책임이 더 커 보인다.
사실상 오스만제국은 기층민을 수탈하던 토착지배계급을 싹쓸이해주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자치권도 인정해주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수도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은 “투르크 정부가 아닌 다른 어떤 정부의 지배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방 관리들로 하여금 가난한 농민을 억압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농민들이 매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세금 외 별도의 세금을 요구하여 그들을 괴롭히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규정하여, 농민들을 보호하고 지방관리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던 오스만제국이 운용한 독특한 관료제도의 덕이라고 하겠다.
집을 나서 공항으로 향하는데, 출근시간을 조금 넘긴 탓인지 버스가 금세 올림픽대로에 접어든다. 한여름 푸르렀던 대로변 나무들이 푸른빛을 잃고 노랗고 붉은빛이 뚜렷하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이다. 아내는 우리 산하가 제일 아름다울 때인데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쉽단다.
사실 우리 산하는 사계절 아름답다. 한강이 온통 뽀얀 강안개로 덮여있다. 여의도를 지나니 안개가 더욱 짙어진다. 어쩌면 마조워교수가 비유한 것처럼 ‘특별히 시간의 안개 속으로 실종되어 버리려는 경향’을 가진 발칸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서 일까?
마감시간 무렵에 탑승을 한다. 답답한 공간에 일찍부터 몸을 가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한항공과 코드셰어를 하는 체코항공의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좌석이 2-4-2로 배치되어 있어 창가 쪽 자리를 배정받았다. 오늘 비행예정시간은 11시간이다.
활주로를 떠난 비행기가 서해바다 위로 날아오르는데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다. 어린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피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20여년 전에 저 나이의 작은 아이를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던 생각을 해서라도 참는다.
이제는 대륙을 건너가는 비행기를 타는 일이 힘에 부친다. 특히 열차나 버스와는 달리 비행기에서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도 원인이 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눈도 아프고 집중도가 떨어진다. 사이사이에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드디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춘다. 현지 시각으로 5시 무렵이니 곧 해가 질 터이다. 하지만 구름 위에 있는 탓인지 운평선(雲平線) 위에 붉은 빛이 조금 남아있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파고들면 사라질 모습이다. 비행기가 착륙해서 게이트로 이동하는데 활주로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예사롭지 않다. 거의 양동이로 퍼붓는 수준이다. 발칸의 우기가 시작되나 보다. 여행 내 빗속을 다녀야 하나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도착했다.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2악장 ‘블타바’의 선율이 기내를 가득 채운다. 독일어로 ‘몰다우’라고도 하는 블타바강이 유장하게 흐르는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입국수속을 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버스를 수배해서 타고 출발한 것은 7시가 넘어서였다. 국경을 지나 오스트리아의 린츠(linz)에 있는 숙소까지 4시간을 이동하는 강행군이다. 도착시간이 한국시간으로 따지면 이미 자정을 넘긴 셈이니 밤을 도와 이동하는 셈이다.
체코슬로비키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가는 국도는 우리나라 시골길처럼 왕복 2차선도로에다 신호동이 곳곳에 있어 가다서다를 반복한다. 비까지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가끔 급제동을 걸거나 무언가를 피하듯 핸들을 잡아채는 바람에 깜짝 놀라곤 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도로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에 들어서서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좁은 길을 이리저리 돌아 버스가 선 곳은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 린츠의 좁은 골목에 있는 스타이겐베르거호텔이다. 벌써 밤1시가 넘었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발칸반도.
(2) 나무위키. 발칸반도.
(3) 마크 마조워 지음. 발칸의 역사 24쪽, 을유문화사,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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