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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와 유럽문명의 완충지, 발칸[19]

양기화
발행날짜: 2016-05-09 05:00:22

로마황제의 고향, 스플리트(1)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
로마황제의 고향, 스플리트(1)


유람선에서 내린 다음에는 점심을 먹고 스플리트로 이동하였다. 1시반에 도착한 식당에는 이미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고, 우리 일행이 맨 끝이다. 당연히 음식이 늦게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가이드는 음식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 챙기는 것 같지 않다.

결국 늦게 나온 음식을 먹다가 약속한 시간이 되는 바람에 후식은 구경도 못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갑자기 먹는 것에 너무 목을 매는 것 같지만, 해외여행에서 먹는 것은 중요하다. 스플리트까지는 3시간 정도 버스로 이동해야 한다면서도 네움의 쇼핑센터에서 차를 세운다. 와인을 싸게 판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30여분을 보내는 바람에 결국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질 무렵에서야 스플리트에 들어섰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는데 스플리트는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선 중간 아래 위치하는 도시이다. 자그레브에 이어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2011년 기준으로 29만3천명이 거주하며 도시권역까지 포함하면 35만 명이 살고 있다. 도시의 기원은 그리스 아스파라토스(Aspálathos)의 식민지가 설립된 2400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도시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스플리트 인근 살로나 출신의 디오클레스가 로마의 황제에 오르면서부터이다. 로마가 멸망한 다음에는 아자르족과 슬라브민족 그리고 로마의 유민들이 이주해 들어왔다.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제국의 봉신인 베네치아공화국과 크로아티아왕국에 속하였다. 중세 후기에는 베네치아공화국과 헝가리왕국 대치하는 상황에서 자치를 향유하기도 했지만 결국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다.

1796년 베네치아가 나폴레옹에게 패한 뒤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에 따라서 합스브르그가에 양도되었다가 1809년에는 프랑스제국에 속하였다. 1814년 나폴레옹이 물러난 다음에는 오스트리아제국으로 넘어갔다가 1918년 유고슬라비아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이탈리아에 합병되었지만, 1943년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다음에는 파르티잔운동으로 해방을 맞았다. 전쟁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크로아티아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1)

달마티아해안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는 것은 근세 짧은 시기에 이 지방의 주인이 얼마나 자주 바뀌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힘센 주변 국가들에 번갈아가며 침략을 당해야 했던 이 지역 주민들의 고통도 대단했을 것이다.

스플리트에 궁전을 세운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4-311)는 스플리트 인근에 있는 살로나의 하층민 출신으로 로마군에 들어가 카루스(Carus) 황제 시절에는 기병대장에 이르게 되었다.

페르시아를 원정에 나선 카루스(Carus)황제와 그의 아들 누메리아누스(Numerianus)가 죽자 자신이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카루스황제의 다른 아들 카리누스(Carinus)가 제위를 잇겠다고 나서자, 디오클레스는 마르구스(Margus) 전투에서 이를 패퇴시키고 제위를 공고히 했다.

286년 부하인 막시미안(Maximian)을 황제 직위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임명하여 공동황제로 올렸고, 다시 293년 1월에는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를 부황제인 케사르(Caesar)에 임명하여 4두정치체제를 완성하였다.(2)

제국을 동서로 나누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동방을,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니우스가 서방의 방위분담을 맡으므로 해서 제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디오클레티우스는 니코메디아에 머물면서 소아시아, 오리엔스, 폰투스, 이집트 등을 담당하고, 갈레리우스는 시르미움에서 판노니아, 모이시아, 트라키아 등을 담당하며, 막시미아누스는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그리고 콘스탄티우스는 트리어에서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비네엔시스 등을 담당하였다. 사두정치체제는 국방의 안정을 이루는데 성공하였지만 병행하였던 내정개혁은 뜻대로 되지 않아 제국에 만연되어있던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였다. 303년 2월에 발표한 칙령에서는 기독교인의 모임을 불허하며 기독교 교회와 성물을 파괴하라고 했다. 당연히 기독교인들이 심하게 반발하였는데, 소아시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황제는 군대를 보내 봉기를 진압했고, 사제들을 체포하였다. 기독교의 탄압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어지다가 그의 사후인 313년 콘스탄티누스1세가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끝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305년 5월 1일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부제였던 칼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고향과 가까운 스플리트에 지어둔 거대한 개인황궁으로 은퇴하여 조용히 채소를 가꾸면서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두 황제가 물러난 다음 4두체제는 빠르게 무너지면서 로마제국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3)

디오클레티우누스궁전의 남쪽 성벽을 이루는 건물들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에 근처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궁전이라고 할 만한 건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어두워진 탓도 있지만,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게들 때문이다. 설마 했지만 가게들이 들어있는 건물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이었던 것이다. 주차장에서 내려 깔끔하게 포장된 ‘복원된 국립 크로아티아 해안길(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을 따라 가다보면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남문을 만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모습(좌. 위키피디아에서 인용), 궁전의 중심부, 페리스틸(우)
크로아티아의 500쿠나 지폐의 뒷면에 그려진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은 길이 190m 폭이 160m 정도되는 불규칙한 직사각형의 땅 위에 동쪽, 서쪽 그리고 북쪽에 타워형으로 지었다. 궁전은 호화로운 주택과 병영 그리고 커다란 문과 물탑 등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구조였다. 외벽으로 둘러싸인 궁전에는 9천여명이 거주했다고 하는데, 지하의 구조물은 둥근 천장을 가진 원통형의 석조였다.

궁전을 짓는데 지역에서 나는 석회암과 브라츠(Brač)섬에서 가져온 대리석, 살로니탄(Salonitan)에서 만든 벽돌, 심지어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의 무덤에서 가져온 수많은 스핑크스로 궁전을 장식하였다. 지금은 세 개만이 페리스틸과 쥬피터신전 그리고 시립박물관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궁전의 남문(좌), 북문(우)
우리가 들어선 남문은 포르타 아이네아(Porta Aenea, 청동의 문)라고 하는데, 다른 세 개의 문과 비교하면 크기나 모양이 단순한 것으로 보아 황제가 바다로 나갈 때 사용하던 개인적 용도의 문이거나 바다를 통하여 궁전에 물자를 공급할 목적으로 낸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서 북쪽으로 페리스틸을 향하여 가다 보면 여러 차례 계단을 만나게 되는데, 궁전이 경사진 장소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포르타 아르겐테아(Porta argentea, 은의 문)라고 부르는 동문과 포르타 페레아(Porta ferrea, 철의 문)라고 부르는 서문을 연결하는 데쿠마누스(decumanus)라고 하는 횡단도로를 경계로 궁전을 남과 북으로 나눌 수 있었다. 더 호화로운 남쪽 지역이 황제가 거주하는 사적인 장소와 업무를 보는 공적인 장소, 그리고 종교건물 들이 들어서 있다. 페리스틸(Peristyle)이라고 부르는 기념비적인 마당은 남쪽으로는 황제의 숙소, 동쪽으로는 황제의 능묘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세 개의 신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세례당으로 사용하는 주피터신전만이 남아 있다.

페리스틸에서 포르타 아우레아(Porta aurea, 황금의 문)라고 부르는 북문으로 향하는 길을 중심으로 궁전의 북쪽을 나누어지는데 지금은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나 직사각형으로 지어진 건물에 군인이나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나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4)

참고자료

(1) Wikipedia. Split, Croatia.
(2) Wikipedia. Diocletian.
(3) 위키백과. 디오클레티아누스.
(4) Wikipedia. Diocletian's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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