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백진기 한독 대표]
장면#1
며칠전 지방신문에 크게 "물류센터오픈"기사가 났다.
규모가 커서인지 교육감, 시장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테이프커팅에 참석했다.
친구가 그 회사 오너라 더 눈길이 갔다.
다른 친구들은 나이를 핑계삼아 다들 접는 판인데 이 친구는 계속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몇년전 그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땅을 샀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제서야 나는 "아! 그땅이 이땅이구나"
조그마한 오피스에서 시작한 사업이 이제 끝간데 없이 커지는 것이었다.
장면#2
새벽이면 여지없이 일어나 '남의 글"을 읽는 것이 루틴이다.
중앙일보의 [김승현의 시시각각] '벚꽃처럼 짧은 유권자의 화양연화'란 컬럼을 읽었다.
김논설위원의 컬럼촛점은 '벚꽃의 생애처럼 선거철에만 아주 잠깐 보이는 정치행태'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내가 그 컬럼에서 주목한 것은 다른 내용에 있다.
그가 소개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다.
그의 컬럼을 그대로 옮긴다.
".............1991년 영국 사치갤러리에 처음 전시돼 세계 미술계에 논란을 일으켰다는 작품은 제목도 난해했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이란다...........중략"
아침내내 이 제목을 어떻게 해석해야지?
영어로 된 제목을 읽어봐도 한글로 번역한 것을 열번봐도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수족관에 뭘 잡아먹겠다고 입을 딱 벌린 엄청 큰 상어가 있는 작품(아래그림참조)과
그 작품 아래 상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작가 데미안 허스트를 한참보았다.
뭘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아하'가 떠올랐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제대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죽음을 디테일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 있는 상태이므로
죽음을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항상 '남의 일'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란과 그 주위에,
우크라이나와 그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죽고있다.
많은 부분이 '우리는 아니니까'하고 '죽음'을 강건너 불보듯한다
아마 한국군이 그 전쟁터에 투입되면 어떻게 될까?
그 전쟁터에서 오늘 죽은 한국군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 전사자가 내 가족이라면 어떨까?
그 '죽음'에 대해 어디에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죽음의 당사자가 '나'가 아니기에 항상 제3자다.
장면#3
친구오너는 그 곳에 거대한 물류센타를 지어야 하는 '결정'을 했다.
우리회장님도 '매일 결정'의 해야하는 그 마지막자리에 앉아있다.
두분은 데미안 허스트가 표현하는 식으로 '경영현장'을 알고 있다.
나는 40년을 넘게 '경영현장'에 있다.
역설적으로 '경영현장'을 오래 겪어보았지만 '경영현장'을 모른다.
항상 남의 일 보듯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중이다.
그래도 반성만하지 "우리회장님이나 친구회장의 고단한 결정들"을 끝내 맛보지 못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의 제뜻이 들어왔다
난 영원히 한계가 있는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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