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타임즈=]
진료 사진 (이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의료기관들이 고객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강도높은 교육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병.의원을 찾고 있는 환자들의 에티켓은 아쉬운 점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일부 환자들이 간호사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의사에게 노골적으로 불신감을 드러내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
경기도 소재 M종합병원 원무과 관계자는 "병원수납업무처리와 관련해 무리하게 의료비를 깍아달라고 직원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욕설을 일삼는 경우도 심심치않게 생겨나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서울 A병원 병실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P씨 역시 야간 근무시 가슴아픈 경험을 당했다.
"암으로 입원한 한 환자가 새벽 무렵 고통을 호소하면서 의사를 찾는 잦은 호출 끝에 심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떤 간호사나 한번쯤 겪게 되는 일이죠. 막상 의사에게 화를 내자니 치료받을 때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만만한(?) 간호사가 화풀이 상대가 되더군요."
하지만 이런 환자에티켓을 실종한 환자들 행위는 의사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개원가의 경우 의사에게 생떼를 쓰는 황당한 환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명동에서 개원중인 P원장은 가끔 대학병원에서 받은 처방전을 꺼내며 "이 약 그대로 처방만 좀 해주시면 안돼요?" 묻는 환자들 때문에 의욕상실감을 느낄 때도 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약 처방이라는게 치료의 일부분에 해당돼야 하는 부분인데도 저를 단지 처방전 발행 기계로 치부하는 것 같아 맘이 상하죠."
압구정 N의원 이모 원장이 싫어하는 환자는 '너는 어떻게 치료하나 보자'라는 식의 병의원 쇼핑환자라고 말했다.
"의료지식이 상당히 높습니다. 관심도 있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치료도 받아본 환자니까요. 하지만 이런 환자의 경우, 의사에 대한 신뢰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환자에티켓 실종 환자는 이 뿐만이 아니다.
병의원에 내가 돈을 지불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받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반말부터 시작하는 환자, 병의원 의사와 간호사를 장사치로 대하면서 '필요없는 검사를 더하는건 아닌지' 사사건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환자, 잘못치료하면 소송하겠다고 큰소리치는 환자까지 등장하고 있다.
친절하고 가족같은 병원서비스 논의와 함께 현명한 환자 에티켓에 대한 논의 역시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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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하나?2005.04.10 12:06:15
밑에 내과의사야... 돈3000원내고 받는다고?
얌마...환자가 내는돈이 3000원이지..
보험료로 또 안받아먹냐?
그럼 만원넘는거 아니냐?
진료30초에 만원이면 괜찮은거 아니냐?
얼마나 더 받아쳐먹을려고 그러냐?
3분진료? 놀고자빠졌네...
진짜 거짓말아니고 자리에 앉아서
딱 30초안에 진료끝내고 3000원이다...
약값까지합하면 5000원이다...
쓰레기들아...
내과의사2005.04.08 11:41:22
그래 차라리 지불한 돈만큼만 요구하면 좋겠다. 돈 3천원 내고 3만원, 300만원 서비스를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작태에 신물이 난다. 3000원이면 서울시내 밥값도 안된다. 3000원짜리 밥먹으면서 반찬으로 불고기달라고 하면 도독놈아닌가?
[족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오늘날 웬만한 집에는 족보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이것은 무한한
과거로의 역사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시조는 누구이고, 그 할아버지의 아들, 또 그
손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일을 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족보를 보면 우리 모두는 신라 왕실이나 아니면 고려시대
유명한 인물의 후손임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중국인을 시조로 둔 가문도 적지 않다.
그뿐 아니다. 역사책에서 자주 대면할 수 있었던 인물도 가끔은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부귀영화를 누렸음직한 조상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에 우쭐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 같은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족보에 수록된 내용은 모두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수천에 불과한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산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만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귀족보다도 농민이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의 후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자면 한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족보를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족보를 믿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족보상의 시조와 나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 어찌 그럴 수가
[족보는 언제, 왜 만들어졌나]
족보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지만, 고려시대에도 '씨족', '세계도', '가첩'
또는 '족도' 등 고문서 형태의 족보들이 있었다. 종실귀족공신고급관원의
내외자손들은 문음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와 신분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족보다운 족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족보는 사가보다 왕실에서 먼저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즉 태종 연간의 <선원록>,
<종친록>, 세종 때의 <당대선원록>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는
<안동권씨성화보>(1476년)가 인쇄 반포된 이후 16, 17세기를 거치면서 족보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많은 처첩과 이들의 자녀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은 특권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주 충돌하기도 하였다.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등극한 태종으로서는
왕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이 왕실에서 족보를
편찬한 이유였다. 족보는 누가 처이고 누가 첩인지, 누가 적손이고 누가 서손인지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양반 사대부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양반사대부가의 조상 숭배는
정치사회적인 이해관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양반들은 족보를 통해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의 차별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양반임을 의미했다. 알고 있듯이 양반은
사회적인 여러 특권을 누렸고, 상민과 천민들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과 천민들은 누구나 양반이 되고자 하였다. 이들이 양반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족보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족보는 조선 후기에
더욱 광범하게 보급되어 나갔다.
[족보에는 딸의 이름이 없다]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흔히
세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또 수록되는 범위가 전체냐, 한 분파냐에 따라 대동보와 파보로
구분한다. 특정인의 가계를 중심으로 작성된 가첩가승가보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족보에는 시조에서부터 세대순으로 이름과 자, 시호, 과거와 관직, 저술과 문집,
특기할 만한 업적, 그리고 출생과 사망 연월일, 묘지의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기재된다. 이뿐만 아니라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족보는 철저히 남자 중심의 기록물이다. 조선시대의 여자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따라서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는 없었다.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올려지고,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성관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다. 물론 이 같은 기록은 족보와
개개인에 따라 상세하고 소략함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족보는 30-40년 또는 50-60년마다,
또는 백여 년 뒤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새로 편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 성씨의
족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17세기를 전후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족보는 기재되는 내용과 체제상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회는 아직 고려 적인 전통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유교의 종법적인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 남자가 신부집으로 장가를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곧
처가살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딸은 차별되지 않았으며,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아니어서
후손이 없어 세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동성동본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의
하나가 족보상에서 아들과 딸, 친손외손이 동일하게 수록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손과
마찬가지로 외손의 외손, 또 그 외손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기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족보에는 특정 성씨만이 등재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성씨가 망라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성화보>는 안동권씨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총 수록 인원 9,120명 중
867명에 불과했고, 외손의 외손으로 이어지는 가계가 6, 7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성화보>는 서기정 등 권씨 외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같이 조선 전기의
족보는 기재내용과 편찬과정상에서 조선 후기 또는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고려 적인 전통과 비종법적인 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의
보급과 <소학> 교육의 영향으로 17세기를 전후하여 점차 성리학적 유교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친족제도가 확립되었다. 신부를 맞아들이는
혼례가 일반화되고, 후손이 없으면 반드시 양자를 들이고, 장자를 중심으로 재산과 제사의
상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족보 역시 이 같은 사회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족보는
전기와는 달리 양자가 일반화되고, 아들이 중심이 되면서 외손은 점차 소략하게 취급되어
2, 3대에 그치거나, 사위만이 족보에 오를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자녀들의 출생 순으로
기재되던 것이 아들을 앞세우게 되었고, 처계 및 조상의 제삿날, 묘소의 위치 등이
덧붙여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볼 수 있고, 발간되고 있는 족보의 형태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왜 가짜가 생기는가]
조선시대 족보는 양반의 소유물이었고,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바꾸거나, 조상의 계보를 조작윤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기도
하였다. 조작과 윤색의 일반적인 방법은 모화사상에 따라 시조를 중국과 관련시키거나,
고려 중후기에 군현토성에서 성장한 가문들이 고려 초의 개국공신 또는 삼한공신의
후예로 둔갑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족보를 당시의 관찬사료나 금석문 등과 대조하면
중간에 공백이 생기고 대수가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이래 중앙의
지배세력은 지방의 향리가문에서 성장했지만, 점차 향리를 천시하는 경향이 일어남에 따라
조상의 향리신분을 변명하거나 은폐하려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조상이 고려 또는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신 왕조에 복종하지 않아서 향리로 강등되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서거정이 <성화보>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에는 원래 족보가 없어서
거가대족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실제 <성화보>에는 시조에서부터 12세에 이르기까지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찍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가문에서도 이러하였으니, 이들보다 뒤늦은 가무의 경우에는
조상의 계보가 불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족보를 편찬할
수 있었던 가문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편찬된 많은
족보에서는 시조와 상대의 세계가 도리어 정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우는 시조와 상대의 기록이 허위이거나, 적어도
과장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족보를 가짜로 만든 것은 이렇듯 족보 편찬과정에서 자행된 조작과 윤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원천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성씨와 본관이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 끊임없이
고쳐지고 있었던 데서 말미암는다. 성씨와 본관을 고친다는 것은 말하자면 '성을
갈아버리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씨제도는 굉장히 복잡하다. 성씨의 사용은 삼국 이전부터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6, 7세기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함으로써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성씨는 계승되지 못하였고, 후삼국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에 의해 신라계 성씨를 중심으로 중국식 성씨가 적극적으로 보급되어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에게 그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성씨를
나누어줌으로써 성과 본관을 토대로 한 성씨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본관이란 성이
기반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때의 지경이란 행정체계상 차등적으로 존재했다. 즉
군현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 있는가 하면 여기에 소속된 속현과 촌, 그리고
향소부곡성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조선 초기 지방의 군현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됨에 따라 지역을 세분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던 본관 또한 15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주읍(수령이 파견된 군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즉 속현, 촌 및 향소부곡 등이 소속 군현에 통합되거나 소멸됨으로써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 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관을 서로 달리하던 동일 성씨가 같은 본관을 쓰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이들 동성 상호간에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상호 관련이 없었지만, 점차
동성동본으로 취급되었다.
본관이 바뀌는 것은 이러한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문벌의식이
고조되면서 저명한 조상이 없는 가문에서는 기성의 명문거족에 동화하기 위하여 본관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성이 없던 천민 층이 양인화함에 따라 성을 갖게 되는
층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이 없는 사람이 전 인구의
40%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성이 없던 천민 층이 점차 성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씨의 출현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이들이 기존의 유명 성씨를 선택함으로써
도리어 김이박최정씨 등이 각지에 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민들의 후손은
오늘날 이들 유명 성씨의 족보에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40% 정도의 사람들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씨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새로 성을 가지게 된 이들은 호적상에서 각기 그들의 거주지에 편호됨으로써
거주지가 곧 본관이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본관이 대거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점차
유명 본관으로 본관을 바꾸어 버림으로써 기존의 성씨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에서 조선 초기에 4,500개가 넘던 성관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1,000여 개가
줄어든 3,400여 개에 불과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성씨와 본관은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결국
대성과 유명 본관으로의 개변이었다.
그러면 족보는 이러한 성과 본관의 변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족보는 성과
본관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과정을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최종적인 결과만을 수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당수의 족보는 도리어 시조를
조작윤색하거나, 성과 본관을 고치고 바꾸어서 형성된 동성동본의 사람들은 혈연적인
사실관계로 계보화하고 있다. 이러한 족보를 우리는 가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가 필요한 세상]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곧 양반이 됨을 의미하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아니면
상놈이고, 상놈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기 마련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를 위조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성을 바꾸고 조상을
바꾸어 다른 사람의 족보에 편입함으로써 양반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현족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자, 어떤 이는 신문고를 쳐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상민과 천민들은 왜 그들 자시의 족보를 갖지 못하였을까? 이들은 시조로 삼을 만한
인물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들은
또 족보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동족의 혈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들이 족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반이 되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족보란 혈연적으로
무관한 남의 족보, 즉 가짜 족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짜 족보를 필요로 하였던 것은 하층민만이 아니었다. 더 훌륭한 가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싶었던 양반의 경우에도 가짜 족보는 필요하였다. 양반에도 격이 있었다. 따라서
낮은 양반은 높은 양반을, 높은 양반은 더 높은 문벌가문이 되길 원했다. 양반이 아니고는,
문벌이 아니고서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회,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문의 높낮이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가짜 족보란 필연적인 소산물이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성과 족보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양반이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성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우리
모두가 양반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가짜란 무엇인가? 오히려 성씨는 절대 불변이며,
족보 또한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믿음이 가짜일 뿐이다.
하늘이 처음 열리던 날 어디 김씨이씨가 있었으며, 양반상놈이 있었던가
(동명정보통신대 교수)
그렇지뭐2005.04.07 16:58:24
우리나라 백성들 수준은 말안해도 다 안다. 외국 나가면 한국인 출입금지
라는 팻말을 쉽지 않게 볼수 있지
개백성들 수준은 예전 5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뭐야
그런놈들 상대할라하면
참 피곤하지
양질의 진료는 양질의 사람들이 받으라고
있는건데 참 안쓰럽다
고가의 진료를 똥값으로 해줘도
고마운줄도 모르고
하하2005.04.07 16:40:29
돈낸 만큼만 치료 받겠다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일주일 숙식하고 병원 만큼 돈 적게 내는데가
어디있냐?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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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내과의사야...
돈3000원내고 받는다고?
얌마...환자가 내는돈이 3000원이지..
보험료로 또 안받아먹냐?
그럼 만원넘는거 아니냐?
진료30초에 만원이면 괜찮은거 아니냐?
얼마나 더 받아쳐먹을려고 그러냐?
3분진료? 놀고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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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30초안에 진료끝내고 3000원이다...
약값까지합하면 5000원이다...
쓰레기들아...
그래 차라리 지불한 돈만큼만 요구하면 좋겠다.
돈 3천원 내고 3만원, 300만원 서비스를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작태에 신물이 난다. 3000원이면 서울시내 밥값도 안된다. 3000원짜리 밥먹으면서 반찬으로 불고기달라고 하면 도독놈아닌가?
의사들은 특별한 인간이다.
의사나라 만들어서 따로 살아라. 웃기지도 않아.
요즘 의사 처방전 발행기계 맞지 머.. ㅋㅋㅋ
환자들이 그런다..
처방전 복사만 해주면서 돈은 왜 꼬박꼬박 받아 챙기냐고..
도둑넘들...ㅉㅉ
18번 같은 글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이런 환자를 만났다는 거.
여기다 호소하자는건 아니지만 그러다보면 해결점을 알려주는 동료의도 나오지 않겠는가.
고참의사분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요즘 환자들에게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그리고 맞춤법 신경써 주십시요. 선배님!)
점점 의사도 장사치라는 시각이 많아지는데 중요한건 대처법이기도 하고 그걸 고쳐줄만한 실력을 키우는 거 같기도 하고, 학교다닐때 오히려 인간존중법이나 내 몸 지키기 태권도 이런 수련도 필요할꺼 같습니다. 요즘 생각엔...
전 우습지만 '반말하는 환자'때문에 화가 무척이나 나곤 합니다. '인격수양' 환자나 의사나 먼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올바른 대처법엔 뭐가 있을까요?
다 좋다. 그러나 이런 환자는 정말 못 참겠더라.
저번에 간단한 감기증상으로 온 환자가 있다.
모 관공서 공무원이었다.
통상적으로 진료하고 처방하고 내보낼려고 하는
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자기 친척 증상 까지
물어보고, 그래도 답변해주었는데
지금 주소와 상관 없는 옛날 아파서 다른 병원
에서 치료 받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의사의
치료를 평가해달라는 투로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말을 자르고 다음 환자가
넘 오래 기다렸으니 다음에 다시 상담하자고 하
고 내보낼려고 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는 투로 어디 근무 한단다.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기분 나쁘다는 투다.
그래서 내가 '의사가 물건 만들어 파는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머리속에 든 지식을 이용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고, 지금 이런 상담도 외국
같으면 시간을 따져서 지적 가치를 인정 받는
다......' 라고 이야기 했더니.....
'그래요? 글쎄요...환자가 필요하면 들어줘야지...'
라면서 전혀 의사의 지적활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투다.
감기 환자 한명 보는데 거의 40분 이상이
걸렸다.
요즘 환자들 진료받으면서 껌 씹거나 전화통 붙잡고 웃고 떠들고 하는 건 보통이다.
진료비 흥정하는 것도 보통이다.
'어디서는 서비스로 해주던데....' 라는 식의...
그러나 정말 못참겠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이 '무형의 지적할동'을 인정
받는 경제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다.
고참의사란새기 지랄옆차기하냐
너그걸자랑이라하냐?
고참가튼소리하고자빠졌네...
메가지를틀어버릴나이쳐먹은선배새기들.
50 이상된의사새기들은
젊은의사들의 철천지원수들이다.
가짜의 나라
가짜의 나라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정진영
[족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오늘날 웬만한 집에는 족보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이것은 무한한
과거로의 역사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우리 시조는 누구이고, 그 할아버지의 아들, 또 그
손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일을 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족보를 보면 우리 모두는 신라 왕실이나 아니면 고려시대
유명한 인물의 후손임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중국인을 시조로 둔 가문도 적지 않다.
그뿐 아니다. 역사책에서 자주 대면할 수 있었던 인물도 가끔은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부귀영화를 누렸음직한 조상들의 삶을 동경하기도 하고,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에 우쭐해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이 같은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족보에 수록된 내용은 모두가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수천에 불과한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산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만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귀족보다도 농민이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이들의 후손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 단일민족이라고 하는데, 시조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자면 한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족보를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족보를 믿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족보상의 시조와 나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 어찌 그럴 수가
[족보는 언제, 왜 만들어졌나]
족보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조선시대였지만, 고려시대에도 '씨족', '세계도', '가첩'
또는 '족도' 등 고문서 형태의 족보들이 있었다. 종실귀족공신고급관원의
내외자손들은 문음의 승계 또는 과거와 벼슬살이를 위해 자신의 가계와 신분을 증명하는
근거로 이를 작성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점차 보편화되면서 족보다운 족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족보는 사가보다 왕실에서 먼저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즉 태종 연간의 <선원록>,
<종친록>, 세종 때의 <당대선원록> 등이 그것이다. 민간에서는
<안동권씨성화보>(1476년)가 인쇄 반포된 이후 16, 17세기를 거치면서 족보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왕실에는 많은 처첩과 이들의 자녀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들은 특권의 분배를
둘러싸고 자주 충돌하기도 하였다. 1차, 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등극한 태종으로서는
왕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이것이 왕실에서 족보를
편찬한 이유였다. 족보는 누가 처이고 누가 첩인지, 누가 적손이고 누가 서손인지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양반 사대부가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족보는 조상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양반사대부가의 조상 숭배는
정치사회적인 이해관계와도 관련이 있었다. 양반들은 족보를 통해 혈연적인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하층민과의 차별성을 과시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양반임을 의미했다. 알고 있듯이 양반은
사회적인 여러 특권을 누렸고, 상민과 천민들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었다. 따라서 이들 상민과 천민들은 누구나 양반이 되고자 하였다. 이들이 양반이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족보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족보는 조선 후기에
더욱 광범하게 보급되어 나갔다.
[족보에는 딸의 이름이 없다]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흔히
세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또 수록되는 범위가 전체냐, 한 분파냐에 따라 대동보와 파보로
구분한다. 특정인의 가계를 중심으로 작성된 가첩가승가보등도 족보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족보에는 시조에서부터 세대순으로 이름과 자, 시호, 과거와 관직, 저술과 문집,
특기할 만한 업적, 그리고 출생과 사망 연월일, 묘지의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이
기재된다. 이뿐만 아니라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
족보는 철저히 남자 중심의 기록물이다. 조선시대의 여자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따라서
여자의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는 없었다.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올려지고,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성관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다. 물론 이 같은 기록은 족보와
개개인에 따라 상세하고 소략함의 차이가 있었다. 또한 족보는 30-40년 또는 50-60년마다,
또는 백여 년 뒤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새로 편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 성씨의
족보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17세기를 전후한 조선 전기와 후기의
족보는 기재되는 내용과 체제상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사회는 아직 고려 적인 전통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유교의 종법적인
가족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다. 남자가 신부집으로 장가를 가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곧
처가살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재산 상속에서도 아들딸은 차별되지 않았으며, 사위가
가계를 잇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들이 없다고 반드시 양자를 들였던 것도 아니어서
후손이 없어 세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동성동본이기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바로 이러한 사회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의
하나가 족보상에서 아들과 딸, 친손외손이 동일하게 수록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친손과
마찬가지로 외손의 외손, 또 그 외손까지도 차별하지 않고 끝까지 기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족보에는 특정 성씨만이 등재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성씨가 망라되기 마련이었다.
가령 <성화보>는 안동권씨 족보임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총 수록 인원 9,120명 중
867명에 불과했고, 외손의 외손으로 이어지는 가계가 6, 7대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성화보>는 서기정 등 권씨 외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이같이 조선 전기의
족보는 기재내용과 편찬과정상에서 조선 후기 또는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
고려 적인 전통과 비종법적인 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의
보급과 <소학> 교육의 영향으로 17세기를 전후하여 점차 성리학적 유교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의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친족제도가 확립되었다. 신부를 맞아들이는
혼례가 일반화되고, 후손이 없으면 반드시 양자를 들이고, 장자를 중심으로 재산과 제사의
상속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의 족보 역시 이 같은 사회변화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족보는
전기와는 달리 양자가 일반화되고, 아들이 중심이 되면서 외손은 점차 소략하게 취급되어
2, 3대에 그치거나, 사위만이 족보에 오를 수 있을 뿐이었다. 또한 자녀들의 출생 순으로
기재되던 것이 아들을 앞세우게 되었고, 처계 및 조상의 제삿날, 묘소의 위치 등이
덧붙여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볼 수 있고, 발간되고 있는 족보의 형태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왜 가짜가 생기는가]
조선시대 족보는 양반의 소유물이었고,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바꾸거나, 조상의 계보를 조작윤색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기도
하였다. 조작과 윤색의 일반적인 방법은 모화사상에 따라 시조를 중국과 관련시키거나,
고려 중후기에 군현토성에서 성장한 가문들이 고려 초의 개국공신 또는 삼한공신의
후예로 둔갑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족보를 당시의 관찬사료나 금석문 등과 대조하면
중간에 공백이 생기고 대수가 맞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이래 중앙의
지배세력은 지방의 향리가문에서 성장했지만, 점차 향리를 천시하는 경향이 일어남에 따라
조상의 향리신분을 변명하거나 은폐하려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조상이 고려 또는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신 왕조에 복종하지 않아서 향리로 강등되었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서거정이 <성화보>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리 나라에는 원래 족보가 없어서
거가대족이라도 몇 세대가 지나면 조상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실제 <성화보>에는 시조에서부터 12세에 이르기까지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찍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가문에서도 이러하였으니, 이들보다 뒤늦은 가무의 경우에는
조상의 계보가 불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8, 19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족보를 편찬할
수 있었던 가문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편찬된 많은
족보에서는 시조와 상대의 세계가 도리어 정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같은 경우는 시조와 상대의 기록이 허위이거나, 적어도
과장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족보를 가짜로 만든 것은 이렇듯 족보 편찬과정에서 자행된 조작과 윤색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다 원천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성씨와 본관이 타의 또는 자의에 의해 끊임없이
고쳐지고 있었던 데서 말미암는다. 성씨와 본관을 고친다는 것은 말하자면 '성을
갈아버리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씨제도는 굉장히 복잡하다. 성씨의 사용은 삼국 이전부터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는 6, 7세기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함으로써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성씨는 계승되지 못하였고, 후삼국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에 의해 신라계 성씨를 중심으로 중국식 성씨가 적극적으로 보급되어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에게 그 지역을 근거로 하는 성씨를
나누어줌으로써 성과 본관을 토대로 한 성씨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본관이란 성이
기반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때의 지경이란 행정체계상 차등적으로 존재했다. 즉
군현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 있는가 하면 여기에 소속된 속현과 촌, 그리고
향소부곡성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위상을 갖게 되었다.
조선 초기 지방의 군현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됨에 따라 지역을 세분하여 다양하게
존재하던 본관 또한 15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주읍(수령이 파견된 군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갔다. 즉 속현, 촌 및 향소부곡 등이 소속 군현에 통합되거나 소멸됨으로써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 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관을 서로 달리하던 동일 성씨가 같은 본관을 쓰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이들 동성 상호간에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상호 관련이 없었지만, 점차
동성동본으로 취급되었다.
본관이 바뀌는 것은 이러한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문벌의식이
고조되면서 저명한 조상이 없는 가문에서는 기성의 명문거족에 동화하기 위하여 본관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기도 하였다.
더욱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성이 없던 천민 층이 양인화함에 따라 성을 갖게 되는
층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이 없는 사람이 전 인구의
40%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성이 없던 천민 층이 점차 성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씨의 출현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이들이 기존의 유명 성씨를 선택함으로써
도리어 김이박최정씨 등이 각지에 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민들의 후손은
오늘날 이들 유명 성씨의 족보에 등재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40% 정도의 사람들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성씨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새로 성을 가지게 된 이들은 호적상에서 각기 그들의 거주지에 편호됨으로써
거주지가 곧 본관이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본관이 대거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점차
유명 본관으로 본관을 바꾸어 버림으로써 기존의 성씨에 자연스럽게 편입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에서 조선 초기에 4,500개가 넘던 성관이 오늘날에는 도리어 1,000여 개가
줄어든 3,400여 개에 불과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성씨와 본관은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결국
대성과 유명 본관으로의 개변이었다.
그러면 족보는 이러한 성과 본관의 변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족보는 성과
본관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과정을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최종적인 결과만을 수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당수의 족보는 도리어 시조를
조작윤색하거나, 성과 본관을 고치고 바꾸어서 형성된 동성동본의 사람들은 혈연적인
사실관계로 계보화하고 있다. 이러한 족보를 우리는 가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짜가 필요한 세상]
족보를 가진다는 것은 곧 양반이 됨을 의미하였다.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아니면
상놈이고, 상놈에게는 사회적인 천대와 경제적인 부담이 가중되기 마련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상민들이 군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족보를 위조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성을 바꾸고 조상을
바꾸어 다른 사람의 족보에 편입함으로써 양반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현족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자, 어떤 이는 신문고를 쳐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상민과 천민들은 왜 그들 자시의 족보를 갖지 못하였을까? 이들은 시조로 삼을 만한
인물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들은
또 족보를 만들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도, 동족의 혈연적인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욱이 이들이 족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양반이 되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진정한 뿌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족보란 혈연적으로
무관한 남의 족보, 즉 가짜 족보일 수밖에 없었다.
가짜 족보를 필요로 하였던 것은 하층민만이 아니었다. 더 훌륭한 가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싶었던 양반의 경우에도 가짜 족보는 필요하였다. 양반에도 격이 있었다. 따라서
낮은 양반은 높은 양반을, 높은 양반은 더 높은 문벌가문이 되길 원했다. 양반이 아니고는,
문벌이 아니고서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사회,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가문의 높낮이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서 가짜 족보란 필연적인 소산물이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성과 족보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모두가
양반이었던 셈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성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고, 또한 우리
모두가 양반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가짜란 무엇인가? 오히려 성씨는 절대 불변이며,
족보 또한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믿음이 가짜일 뿐이다.
하늘이 처음 열리던 날 어디 김씨이씨가 있었으며, 양반상놈이 있었던가
(동명정보통신대 교수)
우리나라 백성들 수준은 말안해도 다 안다.
외국 나가면 한국인 출입금지
라는 팻말을 쉽지 않게 볼수 있지
개백성들 수준은 예전 50년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뭐야
그런놈들 상대할라하면
참 피곤하지
양질의 진료는 양질의 사람들이 받으라고
있는건데 참 안쓰럽다
고가의 진료를 똥값으로 해줘도
고마운줄도 모르고
돈낸 만큼만 치료 받겠다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일주일 숙식하고 병원 만큼 돈 적게 내는데가
어디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