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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 제국의 흥망성쇠를 증언하는 옛 종교의 중심

메디칼타임즈=조선의대 본과 2학년 안희상 로마 제국은 서양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전례 없는 대제국으로, 그 영향력은 광범위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적 기반에서 제국주의로 전환하면서, 전략적인 정치와 군사력으로 지중해와 유럽 대부분의 영토를 지배했습니다.이를 통해 인류사에 로마의 법과 행정 체제, 건축 기술, 사회망 구축 능력, 문화적 유산을 세계에 남겼습니다. 현재까지도 현대 문명은 그 로마제국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중 동로마 제국은 기원후 4세기 초반에 로마 제국이 분열하면서 설립되었습니다.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실체를 보존하고 발전시킨 중심지였습니다. 이 제국은 특히 기독교의 정식 수용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까지 로마는 인류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고 혹자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중세 시대의 끝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으로 이어지는 종교와 역사의 중심에서 인류사를 간직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입니다.  아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에 위치한 역사적 건축물로,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함께 품고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이 건축물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으로 건설이 시작되어 537년에 완성되었습니다.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이전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아야 소피아를 세웠고,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기능하였습니다. 당시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을 가진 교회로 예배와 제국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시간이 흘러 아야 소피아는 그 상징성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동방 정교회의 신앙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으며, 여러 황제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졌고, 이후 여러 성당과 모스크 건축에 영감을 주었습니다.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약 한 달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5월 29일 최종적으로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는 견고했지만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메흐메트 2세는 도시로 진입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며 유럽의 중세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아야 소피아는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메흐메트 2세는 이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이슬람의 중요한 예배 장소로 삼았습니다. 내부의 기독교 모자이크는 석회로 덮였고, 네 개의 미나렛이 추가되어 사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이 시기에는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중심지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에게 아야 소피아는 메흐메트 2세의 정복과 이슬람의 승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이곳에서 금요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종교적 정통성을 유지했습니다.1923년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함께 튀르키예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세속주의와 종교개혁을 강조하며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야 소피아는 기독교적 문화재가 복원되며 종교적 중립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그러나 2020년 7월, 터키 정부는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전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야 소피아는 현재 모스크로 사용되면서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아야 소피아는 기독교, 특히 정교회에게 깊은 종교적 의미를 갖습니다. 정교회 신자들에게 아야 소피아는 단순한 예배 장소를 넘어 신앙의 중심지이자,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겨집니다.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야 소피아를 건축하면서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했다"고 선언할 정도로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이는 정교회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거행된 성대한 예배와 의식들은 동방 정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이렇듯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 성당에서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사원, 그리고 현대의 박물관과 모스크로 변천해 오면서 각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변화를 반영하는 상징적 건축물로 남아 있습니다.정교회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아야 소피아는 각자의 신앙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상징성과 의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는 수많은 인류사의 혼돈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옛 제국들의 흥망성쇠와 믿음을 품고 여전히 고고하게 서있습니다. 
2024-07-08 05:30:00오피니언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2)

메디칼타임즈=양기화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2) 현대정공이 만든 트램(좌), 트램에서 만난 사람들(우) 튀넬역에서 로프트레인을 탔는가 싶었는데 벌써 카라쾨이 역에 도착했다. 지상에 있는 승강장에 도착해보니 트램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열차가 'HYUNDAI'라는 로고를 달고 있다. 현대정공에서 만든 열차인가보다. 사진은 찍다가 트램을 놓칠까 겁나기도 했지만, 일단 찍고서 뛰어가기로 했다. 갈라타다리에 가까운 시르케지 역까지는 불과 세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다. 운좋게 트램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무릎에 토끼를 안고 있어서 놀랐다. 애완용으로 키우는 모양이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유리창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장편소설 에 나오는 할머니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는 죽음과 젯잘데데가 목숨을 두고 내기를 하면서 나눈 여덟 꼭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죽음과 젯잘데데가 이야기를 만들어 승부를 내는 방식이다. 주제가 공포, 종교, 사랑, 그리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승부가 나지 않는다. 첫 번째 ‘공포’를 주제로 젯잘데데가 죽음에게 한 이야기는 ‘비다즈의 저주’인데, 그 첫머리는 이렇다. “아나톨리아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밤이 아주 길고, 아주 재미있고, 약간은 ‘소름 끼치게’ 지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정령과 요정 이야기들 때문이다. (…) 이야기를 할 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능력이 거의 입신의 경지에 이른 할머니는 아이들을 더욱더 소름 끼치게 하기 위해 어떤 것을 말해주고 숨겨야 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1)” 생각해보니 돌아가신 큰 고모님이 집에 오실 때마다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시르케지역(좌), 오리엔트특급열차 노선도(우)(Wikipedia에서 인용함) 트램 시르케지역에서 내려 걷다 보니 첫날 지나갔던 길이다. 이번에도 일행들을 놓칠까 정신없이 가다보니 시르케지 역을 그냥 지나쳤다. 시르케지역(Sirkeci terminal)은 1873년 압뒬하미드 2세 때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탄불을 잇는 철로가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다. 원래 톱카프궁전에 딸린 건물이 있었지만 1863년 화재로 폐허가 된 터에 들어선 것이었다. 크림전쟁이 끝난 다음 오스만제국에서는 유럽과 이스탄불을 연결한 철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계약이 투자금 확보의 어려움으로 거듭 파기된 끝에 1869년 바바리아 출신 벨기에 은행가 모리스 드 허쉬(Maurice de Hirsch) 남작이 루멜리철도(Rumeli Railroad) 부설허가를 받아 공사를 진행한 끝에 1872년 7월 21일 개통을 보았다.(2)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작 추리소설 에 나오는 오리엔트특급열차는 공식적으로는 1883년 10월 4일 파리를 출발한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루마니아의 지우르지우에서 다뉴브강을 건너 불가리아의 바르나까지 기차로 운행하고 바르나에서 이스탄불까지는 페리로 운항하는 코스였다. 이후에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들이 잇달아 개설되면서 취리히, 베니스 등을 거치는 노선들이 추가되었고, 아테네까지 운행하는 노선도 개설되었다.(3) 밀실살인의 고전 에서는 이스탄불을 떠난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베오그라드를 지나서 만난 폭설에 갇힌 상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리아의 알레포에서 출발하여 이스탄불의 건너편 위스키다르에 있는 하이다르파사역에 도착하는 토러스 급행열차 안에서 시작한다. 토러스산맥을 지날 무렵 실리시아 산협(山峽)을 바라보던 데베남양이 “저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도 즐길 수 없는 제 마음이 안타까워요”라고 애버스너트대령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릴러물인 탓에 토러스산맥의 풍광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았을 터이다. 갈라타다리에서 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상좌), 갈라타 다리 아래층에 늘어선 가게들(상우), 나르길레를 즐기는 사람들(아래) 시르케지역 앞을 지나 왼편으로 돌면 갈라타다리다. 난간을 따라 등불을 매달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갈라타 다리 위에는 한밤중인데도 낚시를 드리운 사람들이 늘어서 있다. 다리 중간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니 다리의 아래층에는 대낮같이 불을 밝힌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우리 일행은 가게 밖에 놓인 좌석을 차지하고 맥주와 커피 등을 시켜 마시면서 금각뿔만의 야경을 즐겼다. 가이드는 물담배를 주문해서 일행들에게 피워보라고 권했다. 물담배는 터키어로 나르길레(nargile)라고 한다. 다양한 향을 가미한 담배잎을 태운 연기를 흡입하기 전에 물을 통과하도록 해서 연기의 자극을 순하게 만든다. 터키 사람들에게 나르길레는 일종의 역사와 풍류를 즐기는 상징이기도 하다.(4) 필자도 예전에는 담배를 피운 적도 있지만 연기를 빨아들여 코로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이 생경한데다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기침을 쏟기도 해서 나서지는 않았다. 불 밝힌 예니자미(좌), 왼쪽 위로 보이는 갈라타탑(우) 금각뿔만 한 가운데 있는 전망대에서는 조명을 받아 환한 예니자미(Yeni cami)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새로운 모스크라는 의미의 예니자미는 1597년 술탄 무라드3세의 왕비 사피예의 후원으로 짓기 시작했다. 무라드3세 사후에 왕비의 아들 메흐메드3세가 즉위한 다음에는 규모를 확장하려다가 궁정의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공사가 지연되었고, 메흐메드3세가 죽은 다음에는 공사를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새로 즉위한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사피예왕비를 하렘으로 유폐하여 공사가 중단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왕비가 죽은 뒤인 1665년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대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도제 다부트 아가(Davut Ağa)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그 역시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모스크다.(5) 중앙돔의 지름이 17.5미터이고 높이가 36미터에 이른다. 왕실 영묘를 비롯하여 이스탄불의 다른 모스크처럼 병원, 학교, 대상들의 숙소, 시장 등이 부설되어있고, 술탄 아흐메드 3세 시절에는 도서관도 지었다. 이곳에 부설된 시장이 지금의 이집트 바자르(Egyptian Bazaar)이다.   예니자미의 반대편 언덕 위에는 갈라타탑이 붉은 조명을 받고 있다.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소설 에서는 콘스탄티누폴리스에 처음 도착한 제노바사람들이 뱃길을 안내한 비둘기의 둥지가 있던 장소에 탑을 세웠다는 소문을 적고 있다.(6) 갈라타탑이 있는 지역을 갈라타라고 부르는 것은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켈트족인 갈라티아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유래한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전쟁 때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앙숙인 제노바사람들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쫓아낸 바 있다. 니케아 지역으로 물러나 있던 비잔틴제국의 미하일8세가 1261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탈환한 다음에 베네치아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갈라타지역을 할양해준 것이다. 다만 제노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갈라타지역의 성벽과 성채를 파괴하도록 했다.(7) 갈라타탑은 1348년에 제노바인들이 안전을 위하여 비잔틴제국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은 갈라타탑은 높이가 66.9미터, 이랫쪽 바깥벽까지의 직경이 16.45미터이고 안쪽 직경은 8.95미터이며, 벽의 두께는 3.75미터이다. 16세기 오스만제국은 천문관측소로 쓰다가 16세기 말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1717년부터는 소방탑으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1875년 폭풍으로 첨탑이 파괴되었고, 1794년과 1831년의 대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64년에 수리하였다. 1967년 복원공사를 마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8) 소방탑으로 사용할 적에 화재감시원은 일당으로 10악체(오스만제국의 기본화폐로 사용하던 은화로 1악체는 은 1.154그램으로 만들어졌다)를 받았는데 화재를 제때 발견하면 20악체의 상금을 받았지만, 그러지 못하면 화재가 진압될 때까지 시간당 스무 대의 몽둥이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6) 분수 뒤로 보이는 아야소피아박물관(상), 분수 뒤로 보이는 블루 모스크(하) 9시경에 갈라타다리에서 버스를 타고 아야소피아 박물관 앞 정원으로 이동하여 분수쇼를 구경하였다. 조명이 현란하게 바뀌는 분수를 배경으로 아야소피아성당과 블루모스크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터키에서는 저녁이 되면 4천여 모스크가 일제히 불을 밝힌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서 찬송가를 스피커로 틀고 밤이면 십자가에 불을 밝히던 시절이 생각난다. 참고자료 (1)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에프라시압 이야기 51쪽, 문학동네, 2009년 (2) Wikepedia. İstanbul Sirkeci Terminal. (3) Wikipedia. Orient Express. (4) Wikipedia. Hookah. (5) Wikipedia. New Mosque. (6)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안개낀 대륙의 아틀라스 16쪽, 문학동네, 2007년 (7)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1, 188-190쪽, 책문, 2010년 (8) Wikipedia. Galata Tower.
2015-12-17 05:14:01오피니언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

메디칼타임즈=양기화이스탄불의 중심, 탁심광장 뱀문양 수조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나오기 전에 나르텍스에 전시하고 있는 유물들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잔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뱀문양 수조(Snake patterned pool)이라고 표시되어있는 것이 전부다. 대리석을 깍아 만든 이 수조는 2011년에 공개된 비잔틴제국의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거행된 세례식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기아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었을 때부터는 사원의 내부를 밝히는 등불에 넣을 기름을 담았다.(1) 세례식에 사용하는 물을 담았던 수조에 뱀을 새겨 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면 뱀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도록 유혹한 사악한 존재로 인식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아기아 소피아 성당이 아담 혹은 이브에 가장 가까운 존재인 새 생명을 축복하는 세례수를 담은 수조에 뱀을 그려 넣은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이리니 황후의 석관(좌), 구리로 만든 화폐(우) 벽 아래쪽에 놓인 대리석 석관은 이리니 황후의 유해를 담은 것이다. 2층 지성소 쪽의 벽에 그려진 ‘콤니노스’ 성화에 남편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와 함께 그려져 있다. 황후의 유해를 담은 관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은 뒤 이승에 남기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도 있겠다. 석관 맞은편 구석에는 구리종이 하나 놓여 있다. 아무 설명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것은 일종의 화폐로 빙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아야소피아 사디르반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기에 일단 박물관을 나서면서도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미리 챙기지 못해서 놓친 것들이 발길을 붙들었던 모양이다. 문을 나서자 박물관에 입장할 때는 가이드 뒤를 따라가느라 바빠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사디르반(Şadırvanı)이 눈길을 끈다. 사디르반은 무슬림들이 모스크에 들기 전에 몸을 씻거나 마시기 위한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다. 아야소피아 사디르반은 술탄 마흐무드1세 때인 174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열여덟 개의 작은 기둥을 끼워 넣은 대리석 원통 위에 현란한 문양을 새긴 황금빛 원통과 기둥을 올려놓았고, 서른두 개의 황금빛 막대로 된 반구(半球)를 얹어 놓았다. 위쪽에 있는 튤립 모양의 청동색 띠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물로부터 창조했다.’라고 적혀 있다. 지붕은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을 연결한 아치와 처마 위에 배치돔 형태로 덮여있는데, 아야소피아 사디르반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꼽히고 있다.(2) 아야 소피아와 잠시 작별한 일행이 향한 곳은 다섯 번째 쇼핑을 위한 가게이다. 이동하는 중간에 슐레이만 모스크 곁을 지나지만 일정에 없다는 이유로 버스 안에서 설명을 들어야 했다. 터키한인여행협회가 운명한다는 잡화점이다. 이곳에서 선물로 쓸 터키전통과자와 석류엑기스 그리고 장미오일을 조금 샀다. 가게에서 얻은 수익으로 터키와 한국을 연결하는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쇼핑을 마친 다음에는 이스탄불의 명동이라는 탁심광장으로 갔다. 선택관광상품인 이스탄불 야간 시티투어의 시작이다. 탁심광장에 세워진 공화국 독립 5주년 기념비 탁심광장에 도착한 일행이 버스를 내린 곳은 1928년 피에트로 카노니카가 만든 공화국 기념비(Cumhuriyet Anıtı) 부근이다. 터키 공화국의 독립 5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터키어로 탁심(taqsīm)은 ‘분배’ 혹은 ‘분포’를 의미하는데, 오스만제국 시절 이곳에는 이스탄불 북쪽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석조 저수지가 있었던데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은 이스탄불의 지하철 노선들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3) 터키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에서 이스탄불 사람들이 탁심광장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 갈립이 탁심광장을 걸으면서, ‘거대한 칠면조처럼 교통체증과 씨름하고 있는 버스, 그 뒤로 천천히 기어가는 놀란 바닷가재 같은 전차, 항상 어둠 속에 있기를 고집하는 희미한 모퉁이가 있는 탁심 광장이야말로 자신의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4) 이스티클랄거리를 달리는 트램(좌), 손수레 가게(우) 공화국기념탑에서 출발해서 이스탄불성당 아래에서 시작되는 보행자도로인 이스티클랄(독립)거리에 들어섰다. 여행객은 물론 수많은 터키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워 거대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보행자도로라면서도 이따금 차량이나 트램이 지나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탁심광장에서 출발하는 노스타르기지 트램(nostalgic tram)이다. 트램에 매달려 가는 사람이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 것은 트램이 천천히 달리기 때문인가 보다. 물 흐르듯 밀려가는 사람들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 거리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조그만 손수레에 간식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이스티클랄 거리의 뒷골목(좌), 백화점 입구의 검색대 거리 양편으로는 나이키, 피자헛, 맥도날드와 같은 외국 브랜드를 파는 가게들 일색이고, 터키 고유의 상품을 파는 가게는 뒷골목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뒷골목이 복잡하고 치안상태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멀리 들어가지 말라는 가이드의 경고 때문에 입구에서 기웃거리고 말았다. 일행들과 함께였다면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겠지만, 호기심이 때로는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객쩍은 용기로 다른 일행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흥미로운 점은 백화점입구에 보안검색대가 있어 들어가는 사람들을 검색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테러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다. 실제로 2010년 10월 31일에는 탁심광장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경찰과 민간인이 부상당하기도 했는데, 이날도 보니 광장 구석에 경찰차가 서 있고, 경찰들이 순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행기간 동안 우리 외교부가 보내는 문자를 매일 받고 있었다. 지난 8월 이스탄불에서 테러사건이 있었다면서 다중이 밀집한 지역을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었다. 그런대도 우리는 탁심광장에 나선 것이다. 우리 외교부는 그동안 이라크 및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지대에 국한하여 철수권고를 내리고 있었는데, 앙카라에 폭탄테러가 있었던 지난 10월 10일자를 기하여 터키의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도 1단계 남색경보를 내리고 있어 여행에 유의해야 한다. 이스티클랄거리가 탁심거리로 갈라지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열기에 동참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약속한 집합시간에 탁심광장에 모인 일행은 인근에 있는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터키에 와서 처음 먹는 한식이었다. 메뉴는 닭볶음탕과 오징어볶음이다. 닭볶음탕은 더 끓여서 국물을 자작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고, 추가밥이 1유로라고 잘라 말하는 쥔장의 냉정한 응대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졌던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마저 가시게 만들었다. 차라리 터키 전통음식을 먹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튀넬역 저녁식사를 마치고 갈라타다리로 이동한다. 탁심광장 지하에 있는 튀넬역에서 로프트레인, 즉 푸니쿨라(Füniküler)를 타고 카라쾨이역으로 가서 전철로 갈아탔다. 튀넬-카라쾨이선은 1875년에 개통되었는데,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이자 노선 길이가 573미터에 불과하여 세계에서 최단노선이기도 하다. 로프트레인으로 설계한 까닭은 탁심광장으로 오르는 언덕의 경사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프랑스의 건설회사가 파리 메트로를 놓기 전에 시험삼아 만들어봤다는 설과, 베이오울루 지역에 있는 고급 호텔과 항구를 연결하기 위한 교통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5) 참고자료 (1) Today's Zaman. 2015.12.12. Ancient baptism pool uncovered at Hagia Sophia. (2) Ayasofya Müzesi. Şadirvan. (3) 위키백과. 탁심광장. (4) 오르한 파묵 지음. 검은책 1권 316쪽, 민음사, 2007년 (5) 위키백과. 이스탄불 지하철
2015-12-14 05:14:40오피니언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1)

메디칼타임즈=양기화기구한 운명 아야 소피아 박물관(1) 역사학자 토인비가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옥외 박물관'으로 불렀다는 이스탄불로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타고 다니던 버스를 전날 이즈미르에 두고 왔기 때문에 새로운 기사가 버스를 가지고 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아야소피아박물관 부근에 있는 터키식당에서 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니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나와 구걸하는 아이들이 보인다. 시리아난민 아이라고 한다. 지난 해 대선에서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라는 평가도 있지만, 아랍국가들이나 유럽국가들이 외면한 이들을 받아주었다는 점은 크게 평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터키의 집권당인 정의개발당은 우리가 터키를 다녀온 뒤, 11월 1일 실시한 총선에서 550석 가운데 316석을 차지하였다. 6월 총선에서는 단독 내각을 구성하기에 18석이 모자란 258석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압승이라고 할만하다. 상황이 바뀐 것은 쿠르드족 반군의 유혈사태 등으로 야기된 안보불안 때문이라고 한다.(1) 이날 점심으로 먹은 닭고기 케밥은 지금까지 먹은 닭고기 요리 가운데 제일이었다. 점심 후 짧은 자유시간에 아내와 터키커피를 마셨다. 처음 마실 때는 텁텁한 듯 진한 커피맛이 좋다. 하지만 절반이 넘어가면 커피가루가 씹혀 불편하다. 터키 스타일은 맑은 위쪽만 마신다고 한다. 터키사람들은 커피를 마신 뒤에 남는 커피가루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친다. 커피점은 컵에 남은 커피 가루를 그대로 보는 방법과, 다 마신 후에 컵받침을 뚜껑 삼아 위를 덮고 한번 뒤집은 후에 컵에 남은 것을 보는 방법이 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점사를 잘 풀어내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2) 이날은 커피점보다도 커피를 마시는 일이 중요했다. 뜨거운 커피를 식혀가며 마시다 보니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급하게 집결장소로 갔는데 일행들이 벌써 출발해서 꽁무니가 저만치 가고 있다. 제 시간에 갔는데… 헐레벌떡 쫓아가 겨우 따라 잡는다. 길모퉁이를 돌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히포드럼이다. 블루모스크를 지나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향한다. 이곳은 휴대품 검색을 거친 다음에 입장이 가능하다.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입장하는 순간 성당의 왼쪽 절반을 가득 채운 비계를 발견하고 실망한다. 성당의 내부를 제대로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 그래도 웅장한 성당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넓은 성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선 기둥을 제외하고는 내부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는 놀라운 공법을 그 옛날 구사했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것은 174개나 되는 기둥은 새로 깍은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에서 뽑아온 것 이란다. 이 성당을 지은 사람들은 이민족의 믿음을 무너뜨린 위에 자신들의 믿음을 세웠던 것이니 제대로 된 믿음이 될 수 있었을까? 이곳은 비잔틴제국 시절에는 아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으로, 오스만제국이 점령한 이후로는 그리스 이름인 아야 소피아(Aya Sofya)사원으로 부르다가 1934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도 성당으로 916년, 사원으로 481년 그리고 박물관으로 81년의 세월을 사랑받아왔으니 참 다행이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외관(좌), 내부 돔의 구조(우) 지금 전하는 건물은 세 번째로 세워진 아기아 소피아 성당이다. 목조로 된 첫 번째 성당은 콘스탄티누스2세 황제 시절인 360년 2월에 같은 장소에 세워졌는데, 404년 아르카디우스황제의 아내 에브도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박해하여 추방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불타버렸다. 두 번째 성당은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 의하여 415년 10월 세워졌지만, 532년 1월 유스티아누스 1세 황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역시 불타버렸던 것이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성당이 소실된 지 39일 만에 재건을 시작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그리스도교의 우주관을 구현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동서 길이 77미터, 남북 너비가 71.7미터의 직사각형 구조물 위에 남북지름이 30.9미터의 타원형 돔을 얹게 되었다. 성당 내부에는 기둥이 없는데 이는 교회의 통일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건물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서도 지름 30.9미터의 타원형 돔을 올려놓는 일은 당시 로마의 건축술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다른 벽돌의 12분의 1에 불과한 로도스섬의 공기구멍이 많은 진흙벽돌로 만들었지만 돔의 전체 무게는 여전히 엄청났다. 그런 돔을 무너지지 않게 올려놓은 것은 이오니아 트랄레스 출신인 안테미오스(Anthemios)와 밀레토스 출신인 이시도로스(Isidoros)였다. 두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라 기하학과 수학에 정통한 수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커다란 아치로 분산시키고, 아치와 아치가 만나는 곳에 기둥을 세웠다. 그 아치들을 작은 아치와 반원의 돔으로, 그리고 그 아래로 더 작은 아치와 작은 돔으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성당의 내부에는 107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42개의 아치가 하중을 떠받치고 있다. 이런 구조는 지진에 취약하여 557년에 콘스탄티누폴리스 일대를 강타한 지진의 영향으로 558년에는 동쪽 지성소의 돔과 아치가 무너졌다. 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설계한 이시도로스의 조카 이시도로스가 돔의 높이를 7미터 더 높이면서 골조를 강화하고, 남북 쪽의 외벽을 더 두껍게 보강하여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오스만제국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성당의 외부에 네 개의 미나렛을 세워 하중 떠받치도록 보강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가 아기아 소피아 성당을 손상시켰지만 결정적으로 피해를 입힌 것은 사람들이었다. 730년 레오3세 황제가 모세의 십계명에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음을 들어 성상을 파괴하라는 내용을 담은 칙령을 공포한 것이 발단이 된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있는 많은 모자이크와 성화들이 파손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성화들은 9세기 후반에 복구한 것들이다.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도였다. 1204년 갑자기 콘스탄티누폴리스로 쳐들어와 점령한 제4차 십자군들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이들은 성당 안에 있던 금은보화는 물론 성유물까지 빼돌려 팔아먹었다. 심지어는 아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그 만행이 오죽했으면 동로마 제국의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겠는가. 1453년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드2세는 신하와 장군 그리고 이슬람 이맘을 대동하고 아기아 소피아 성당에 도착하였다. 말에서 내린 술탄은 마당의 흙을 한 줌 쥐어 자신의 터번에 뿌려 승리를 내려준 알라에 감사를 표하였다. 성당의 내부를 둘러본 술탄은 병사들의 약탈을 금하고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이때 선임 이맘은 설교단에 올라 "알라후 아크바르(Allahu Akbar;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외쳤다. 역시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내부의 모자이크에 회칠을 하여 성화들을 가리도록 했다. 오스만제국이 성화들을 뜯어내지 않고 회칠을 한 덕분에 우리는 비잔틴제국이 남긴 동방정교의 성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칠을 걷어내는 작업은 1932년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회칠한 위에 그려진 문양들 역시 500년이나 내려온 뜻깊은 문화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3~5) 참고자료 (1) 연합뉴스 2015년 11월 2일자 기사. “터키 총선 대이변…쿠르드 반군 유혈사태가 결정적” (2) 스텔라 카페 블로그. ‘[세계의 점술] 세계의 점슬 시리즈3 커피점. (3) 나무 위키. 하기아 소피아. (4) Wikipedia. Hagia Sophia. (5)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32-52쪽, 책문, 2010년
2015-12-03 05:10:53오피니언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Ⅱ

메디칼타임즈=양기화신과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완벽한 작품, 이스탄불(3) 술탄 아흐메트1세 자미. 블루모스크에서 나와 톱카프 궁전으로 이동한다. 모스크 앞에는 널따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정원의 끝에서 돌아서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블루모스크의 모습이 강건해 보이면서도 아름답다. 전성기보다 못한 제국의 사정으로 황금 미나렛을 세우지 못한 술탄의 심기는 잠시 불편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세키 휘렘 하맘.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지나친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조금 못 미쳐 하세키 휘렘 하맘(haseki Hürem Hamam)이 숨어 있다. 가이드가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하맘은 중동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전통적인 공중목욕탕이다. 하세키 휘렘 하맘은 술탄 슐레이만1세의 명령으로 1556년에 완공된 이 하맘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아야소피아 대성당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하세키 휘렘은 술탄 슐레이만1세의 황후이자 셀림2세의 모후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은 알렉산드라 리소노브스카(Alexandra Lisonovska)이나, 알렉산드라 라 로사(Alexandra La Rossa)로 불리기도 하는데, 서방에서는 록셀라나(Roxelana)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제국에서 하세키 휘렘이 주목받는 것은 할렘의 모든 여성들이 제국의 대를 이을 남아를 낳는 역할에 머물렀던 전례를 깨고 제국 최초로 술탄과 정식을 결혼하고, 황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술탄 슐레이만의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변화였을 것이다. 성직자의 딸인 휘렘은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 지혜로웠고 술탄이 많은 도움을 구할 정도로 지적이었다고 한다. 휘렘으로 말미암아 술탄이 오스만제국의 오래 된 관습들을 깼다고 해서 총명한 군주를 흐리게 한 악녀로 인식되어 왔지만,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술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주체적 여성으로 재해석한다. 하이든의 교향곡 제63변 C장조에 붙어있는 프랑스어 부제 ‘록슬란’이 휘렘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 나의 목숨과 같은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이, 아름다움의 제왕인 나의 술탄(…)"으로 시작되는 연애시를 헌정할 정도로 술탄의 사랑은 지극했던가 보다.(1) 톱카프 궁전의 제1문 그리고 아흐메드3세의 샘.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끝나는 지점에 비진탄제국의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세운 톱카프 궁전의 제1문이 서 있다. 톱카프 궁전의 제1문 바로 앞 오른쪽으로 ‘아흐메드3세의 샘’으로 불리는 화려한 정자가 있다. 비잔틴 제국시절부터 있던 샘터에 아흐메드3세가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메흐메드2세가 지은 톱카프궁전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거처하던 곳이다. 메흐메드2세는 지금의 이스탄불대학교가 있는 구시가지의 세 번째 언덕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궁전을 완공하고 불과 몇 년 뒤에 동로마제국의 성곽이 있던 첫 번째 언덕, 즉 보스포루스해협과 마르마라해, 황금뿔만이 합류하는 곳을 굽어보는 첫 번째 언덕 위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도록 명령해서 1478년 완공하였다. 언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짚어보면,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로마를 따라서 만든 7개의 언덕 위에 건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7개의 언덕 위에 건설된 리스본 역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 새로운 궁전이 완공 된 다음 그때까지 사용하던 궁전을 옛날 궁전이라는 의미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부르고, 새로 지은 궁전은 새로운 궁전이라는 의미로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렀는데,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톱카프 사라이(Topkapı Sarayı)'라고 불렀다. 터키어로 '톱'은 대포를, '카프'는 문 그리고 '사라이'는 궁전을 의미한다. 톱카프 궁전에는 세 개의 문과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이 있다. 첫 번째 문은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으로 아랍어로는 '바브 휘마윤(Bâb-ı Hümâyûn)'이라 부른다. 문의 바깥쪽에는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하도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라고 아랍어로 적혀 있다.(2) 황제의 문에 들어서면 예니체리 마당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제1중정을 만난다. 궁전을 지키는 예니체리 근위대가 있던 곳이다. 제1중정은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허용되던 곳으로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만 남아 있다. 예니체리(yeniçeri)는 평상시에는 수도의 경비를 맡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술탄과 함께 참전하여 용맹을 떨친 술탄의 친위부대이다. 오스만 제국 초기인 1364년에 술탄 무라드1세가 창설하였다. 투르크어 예니센 에서 유래한 말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이다. 창설초기에는 전쟁포로나 점령지의 기독교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구성하였다. 병사들은 이슬람과 투르크의 전통을 익혀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고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했다. 술탄의 개인 경호부대였기 때문에 알라와 술탄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이 확장되어가면서 예니체리 부대의 지위도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부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예니체리들은 발탁되어 중요한 국사를 맡기도 했다. 이들은 점차 권력집단이 되어갔고 타락해갔다. 정부요직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고, 1622년에는 심지어 예니체리를 해체하여 군대조직을 일신하려고 했던 오스만2세를 암살하기도 했다. 1807년에는 유럽식으로 군대를 현대화하려던 술탄 셀림 3세를 하야시키고 마무드 2세를 술탄에 옹립했다. 대세의 흐름에 저항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술탄까지도 갈아치웠다는 예니체리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일본식 신식군대 별기군과의 차별에 무력함을 느끼던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무너진 임오군란이 떠오른다. 임오군란 초기에 일시적으로 기선을 제압했다지만 결국은 몰락하고 말았던 것처럼 예니체리 역시 1826년 자신들이 옹립한 마무드2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살을 당하고 해체되고 말았다.(3) 시대적 흐름을 잘 읽고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톱카프 궁전의 첫 번째 문을 지나 두 번째 문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카페가 있고, 그 곁에는 다소 퇴락한 건물이 보인다. ‘신성한 평화’를 의미하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다. 비잔틴제국이 처음 세운 성당으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아야소피아 성당이 건설되기 전까지 동방정교회의 대주교좌 성당이었다. 지금은 퇴락해 보이지만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아타나시오스의 성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하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4)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532년 니카 반란 때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함께 불타버렸으나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에 의하여 546년 다시 완공했으며, 740년에는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레오3세가 복구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 비잔틴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웅장하게 지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검박하게 지어졌다. 오스만제국이 들어선 이후에 이곳은 예니체리의 무기고로 사용되다가 제국말기에는 전쟁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특별전시회나 이스탄불 여름축제기간 중에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5) 참고자료 (1) 나무 위키. 휴렘 슐탄. (2) 이희철 지음.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95-102쪽, 리수, 2007년 (3) 위키백과. 예니체리. (4) 위키백과. 공의회. (5)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 84-90쪽, 책문, 2010년
2015-10-08 05:20:33오피니언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Ⅱ

메디칼타임즈=양기화신과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완벽한 작품, 이스탄불(1) 본격 터키여행의 첫날이다. 가이드는 첫날임을 감안해서 5시에 모닝콜을 넣었다고 했다. 마침 이날이 일요일이었던 까닭에 도로사정도 좋았는데도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27명이었는데, 버스가 약속한 시간보다 3분 앞서 출발할 정도로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우리 일행은 해외여행의 달인들인 모양이다. 이스탄불(İstanbul)은 2014년의 기준으로 14,377,019명이 거주하고 있어, 터키는 물론 중동과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세계에서도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해협을 가운데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대륙에 걸쳐 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도시(都市)로’라는 의미의 중세 그리스어 이스 띤 뽈린"(εἰς τὴν Πόλιν)에서 유래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세계의 수도로 인식되어 도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폴리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향하여’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국가들에게 콘스탄티누폴리스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도시로 보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330년 건설된 이래로 678년과 718년의 아랍함대의 공격, 913년 불가리아의 공격, 1090-91년 페체네그족의 침공에서도 굳건히 버텼으며, 내부적으로 혼란하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속임으로 단 한 차례 함락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너뜨린 사람이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2세였다. 메흐메드2세의 전략은 매우 치밀하였다. 1452년 술탄은 먼저 보스포루스해협의 폭이 700미터밖에 되지 않은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성을 쌓았고, 증조부 바예지드1세가 보스포러스해협의 아시아 쪽에 세운 아나돌루 히사르(Anadolu Hisar) 성을 증축한 다음 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나는 모든 배에 통행료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존재감을 공식화한 것이리라. 1453년 3월 26일 수도 아드리아누폴리스에서 출정한 메흐메드2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한 것은 4월 11일, 술탄의 출정소식을 들은 비잔틴제국이 황금뿔만을 쇠사슬로 봉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이었다. 비잔틴제국이 구매를 거부하여 오스만제국으로 온 헝가리출신의 대포기술자 우루반이 제작한 초대형 대포로 가공할 위력의 포격을 가했지만,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벽은 금방 무너지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전이 두 달 넘게 진행되자 메흐메드2세는 결정적 한방을 준비해야 했다. 황금뿔만 안으로 해군력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봉쇄된 만입구를 피하여 4월 22일 야밤에 지금의 돌마바체 궁전 자리에서 탁심언덕을 넘어 카심 파샤 쪽의 황금뿔만 안으로 레일과 통나무를 이용하여 67척의 함선을 육로로 옮긴 것이다. 전함을 육로로 이동시킨 것은 전세계의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해군의 반격이 강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5월 28일 밤 총공격을 퍼부은 끝에 콘스탄티누폴리스는 함락되었다. 비잔틴제국의 7천명의 군사가 당시 최강이었던 오스만제국의 16만 대군을 상대로 50여일을 버틴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4만 인구 가운데 살해당한 사람은 약 4천명이었다고 한다. 테오도시오스 오벨리스크. 휴일아침 텅빈 도로를 달려 버스에서 내린 곳은 블루 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박물관 앞이다. 가이드는 널따랗게 펼쳐지는 정원을 따라 블루 모스크의 오른쪽 광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곳은 비잔틴제국 시절 원형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경기장 가운데 세워져 있던 오벨리스크가 광장 중앙에 남아 있다.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테오도시오스의 오벨리스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3세(Thutmose III)가 시리아 정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오벨리스크다. 이 오벨리스크의 원래 길이는 60m, 무게는 800톤에 이르렀기 때문에 옮기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셋으로 잘라낸 윗부분만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기단 6m를 포함한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6m이다.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한 오벨리스크는 390년 테오도시우스1세의 명에 의하여 이곳에 세워졌다. 테오도시오스 오벨리스크의 남동쪽 기단 상부의 조각.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당시의 새긴 조각작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향한 북동쪽의 아래쪽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이 조각되었고, 위쪽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가족이 작업을 구경하는 모습을 새겼다. 북서쪽으로는 무릎을 꿇은 이방인에게서 충성서약을 받는 네 명의 황제 가족을 조각했고, 아래쪽에는 이 오벨리스크를 세우게 된 과정을 설명한 그리스어 비문이 있다. 남서쪽 아래에는 전차경기 모습을, 상단에는 경주를 구경하는 황제가족을 조각했다. 남동쪽의 위에는 경기의 승리자에게 관을 씌워주는 테오도시우스황제의 모습을, 그 아래로는 경기의 관람객과 승리에 취해 춤추는 군중의 모습을 새겼다. 세 마리 뱀의 기둥. 오벨리스크 뒤로는 세 마리의 뱀이 몸을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의 청동제 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서기 330년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명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기둥은 479년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플라테이야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군인들의 청동방패를 녹여서 만든 것이다. 기둥의 밑부분에는 31개의 그리스 도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기둥꼭대기에 뱀들의 머리 사이에 있는 삼각발이 황금그릇을 받치는 형상이었는데 이것은 일찍 없어진 상태였고, 뱀의 머리도 오스만제국의 술탄과 폴란드대사가 잘라버렸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 오벨리스크. 히포드럼광장의 남쪽 끝에는 외관이 지저분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4세기 콘스탄티노스 대제 때 세운 32미터 높이의 오벨리스크로 당시에는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을 입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함락시킨 제4차 십자군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장식물들을 떼어내는 바람에 심각한 정도로 훼손되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가 대대적으로 수리하고는 명문을 남긴 것이다. 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흉물스러운 모습이 남아 십자군의 만행을 지금에까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십자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덧붙이면,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십자군들은 짧은 시간임에도 수많은 예술품들을 파괴하고 약탈해서 해외로 반출해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있는 성 마르코 성당 입구 위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는 네 마리의 청동말 조각은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그리스의 델포이에서 가져와 히포드롬 광장에 세웠던 것을 십자군들이 옮겨놓은 것이다. 빌헬름2세의 정자. 히포드럼 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는 독일 황제 빌헬름2세(Wilhelim II)가 1901년 터키방문을 기념하여 당시 술탄 압뒬하미드2세에게 기증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독일편에 서서 싸우는 불행한 사태가 우연한 일이 아님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참고자료: (1)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 책문, 2010년
2015-09-30 05:18:46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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