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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F2024

바로에이아이, KHF에서 수냉식 서버 포세이돈 공개

메디칼타임즈=이인복 기자바로에이아이가 KHF 2024에서 수냉식 서버 포세이돈을 선보인다.바로에이아이가 오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KHF 2024)'에서 수냉식 서버 포세이돈(POSEIDON)을 전시한다. 포세이돈은 수냉식 멀티 지피유(Multi-GPU)서버로 복잡한 AI 트레이닝, 추론, 시뮬레이션 등을 지원해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최적화된 솔루션을 제공한다. 바로에이아이는 창립 2년 만에 Kibo-Star 밸리 벤처 기업으로 선정됐으며 글로벌 AI 선도기업 NVIDIA 출신의 경영진과 각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AI 기술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이를 통해 최근 서울대와 건국대 연구팀에 포세이돈 서버를 구축해 특화된 LLM 을 구축하고 알츠하이머 진단 AI 모델 개발에서 성과를 거둔 바 있다.포세이돈은 별도의 서버룸 없이 연구실이나 사무실에서도 쉽게 운영할 수 있는 수냉식 시스템을 제공하며 특히 소음을 최소화해(최대 39dB)로 쾌적한 작업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바로에이아이 관계자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입증된 성능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의료 분야에서 인공지능 기술 적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2024-09-03 11:11:31의료기기·AI

동·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파묵칼레냐, 히에라폴리스냐?

메디칼타임즈=양기화파묵칼레냐, 히에라폴리스냐? 우리 일행이 파묵칼레(Pamukkale)에 도착한 것은 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파묵칼레라는 지명이 유래한 석회봉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유적을 구경하게 된다. 파묵칼레는 우리말로 '목화(木花)의 성'이다. 아주 오래전에 석회암으로 된 산의 위쪽에서 온천이 분출해서 온천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석회암 위를 흘러내렸다. 그 온천수 녹여낸 하얀 침전물이 쌓여 만들어낸 장관이 마치 하얀 성벽을 이룬 것이다. 우리네 같으면 '눈의 성'이라고 했을 법하다. 그런데 평생 눈을 구경해본 적이 없다는 이 지방 사람들은 주변에 흔히 보는 하얀 목화밭과 닮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는 페르가몬왕조(기원전 282-기원전 133)로부터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는 유적이다. 파묵칼레 석회봉의 장관 우리 가이드는 히에라폴리스와 파묵칼레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고는 1시간 반 정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목화의 성 맨 위에 섰다. 눈앞으로는 목화의 성이 펼쳐지고 뒤로는 히에라폴리스의 유역이 흩어져 있다. 목화의 성 위에 서는 순간 널따랗게 펼쳐지는 순백의 향연에 그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이시여, 진정 당신이 이것을 만드셨습니까"하는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하늘 가까이 두둥실 떠오른 행글라이더가 눈길을 끈다. 부럽다. 석회봉의 진정한 장관을 보려면 가장 멀리 있는 세 번째 욕조까지 내려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적어도 40분은 걸릴 것 같다. 결국 히에라폴리스를 모두 돌아보기를 원하는 아내의 말대로 파묵칼레의 맨 위쪽에 있는 욕조에 발을 담가보는 정도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신발을 벗어 비닐봉지에 담고 맨발로 조금은 미끄러운 돌 위를 걸어 욕조에 들어섰다. 맨 위의 욕조는 이미 순백을 잃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발길에 묻어온 돌가루 때문에 오염된 탓일게다. 아내와 나는 이내 히에라폴리스 쪽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별로 만나볼 수 없었다. 우리 일행들도 대부분 파묵칼레 욕조의 온천수에서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참고로 이종헌 기자는 '이곳의 진수는 파묵칼레가 아니다. 바로 그 뒤에 있는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다.(1)'라고 적었다.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190년 무렵 페르가몬왕국의 에우메네스2세(Eumenes II)가 세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 발굴된 비문은 그보다 오래된 기원전 2~3세기 셀레우코스왕조 무렵에 이미 도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기 6세기 무렵 비잔틴의 스테파노스가 편찬한 지리학 사전에는 이곳에 신전이 많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의 히에라폴리스라고 불렀다고 적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페르가몬왕국의 시조인 텔레포스(Telephos)의 부인 히에로(Hiero) 혹은 히에라(Hiera)에서 따온 것이라고 알고 있다. 이 곳에는 아폴론, 하데스, 키벨레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폴론의 어머니 레토와 같은 소아시아 태생의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많았는데, 아마도 온천과 함께 지하로부터 올라오는 유독가스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페르가몬왕조가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이후, 기원전 17년과 기원후 60년에 큰 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네로황제의 지원으로 복구하였다. 비잔틴제국 시절까지 번영을 누려오던 이곳은 아랍과 투르크의 공격을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2세기 무렵 이곳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웃에 있는 데니즐리로 강제이주시켰고, 1334년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도시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석관들이 흩어져 있는 네크로폴리스의 정경(위), 프론티누스문(왼쪽 아래), 아고라(오른쪽 아래) 히에라폴리스는 생각보다 넓게 흩어져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네크로폴리스[사자(死者)의 도시]까지 정신없이 걸어가는데도 거의 10분 이상 걸렸던 것 같다. 1,200여기의 석관이 흩어져 있다는 사자의 도시 입구에서 발길을 돌렸다. 웬지 유령들이 어슬렁거릴 것처럼 황량함에 질렸기 때문이다. 흩어져있는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을 돌아보기 위하여 숨이 턱에 차게 돌았다. 북쪽 끝 사자의 도시 입구에서 길을 되집어 목욕탕, 도미티아누스황제가 세워다는 프론티누스 문을 지나 아고라를 가로 지른 다음에 대극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히에라폴리스의 옛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내렸지만, 그래도 말짱하게 남아 있는 원형극장이나 기둥들을 보면 그때의 대단했을 풍경들이 그려지는 것 같다. 엉뚱한 길은 아닐까 하는 걱정 속에 대극장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쪽으로 빌립보 순교지가 손에 잡힐 듯 한데 시간에 쫓겨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극장 방향을 고수했다. 멀리서 본 대극장(상), 대극장 내부(하) 대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엄청난 지진에도 살아남았다는 대극장은 너무 멋있었다. 크레옹왕과 안티고네가 무대 위에 등장해서 치열한 대결을 펼칠 듯하다. 아니 내가 바로 저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치는 환상에 젖는다. 대극장은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 때 세운 것으로 로마시대의 원형극장들 가운데 아펜도스에 있는 것 다음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지금도 연극공연이나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여덟 개의 계단으로 50줄의 객석이 나뉘어져 있어 모두 12,0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다. 객석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지만,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던 그 옛날처럼 지금도 무대에서 배우들이 주고받는 대사가 객석 맨 끝까지 똑똑하게 들린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찍은 사진과 다소 차이가 있어 보였는데 보수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쫓겨 파묵칼레를 물러나면서 장은정씨가 적은 이곳의 황혼을 부러워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물러나고 작은 시골 마을에 붉은 빛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눈부시게 하얗던 석회붕이 붉은 노을빛을 그래도 받아들여, 때로는 오렌지빛이었다가 잠시 보랏빛이 되었다가 다시 붉은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2)" 그놈의 양고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다운 파묵칼레의 석양을 볼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베드로가 하루 세 번 예수를 부정했다던가? 오전에 안탈리아에처럼 아내 말을 듣지 않아 후회하는 일이 또 생겼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아내는 햇볕이 뜨거우니 팔토시를 하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불과 20미터를 걷고서 바로 후회했다. 쏟아지는 햇볕에 팔뚝이 따갑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던 것이다. 아쉬운 대로 선크림으로 응급처지를 했다. 하지만 파묵칼레의 너무 화창한 날씨 덕분에 버스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술이라도 마신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녁을 먹은 아내가 얼굴팩을 해주겠다는 특별한 부탁을 했을 때는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용모가꾸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지만, 이날은 아내의 특별한 부탁에다 유난히 뜨거웠던 햇볕에 시달렸던 것을 생각해서 팩을 해보게 되었다. 팩이 끝나고 나서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없어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날 나는 베드로와는 달리 적어도 한번은 아내의 말을 들었다는 거다. 석회봉에서 15분쯤 버스로 이동하여 꼴로쎄(Colosae)호텔에 짐을 풀었다. 방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는 온천욕을 즐겼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온천물은 36°C 수준이었다. 깔끔한 욕탕에서 50여분 동안 느긋하게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염소냄새가 나는 것 같아 온천욕이 끝난 다음에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다시 했다. 참고자료 (1) 이종헌 지음. 우리가 미처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 262쪽, 소울메이트, 2013년 (2) 장은정. 언젠가는 터키 158쪽, 리스컴, 2013년
2015-11-16 05:10:32오피니언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40]

메디칼타임즈=양기화스페인 미술애호가들의 자존심, 프라도 미술관(2) 프라도가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와 고야는 많은 점에서 대비가 된다. 스페인의 황금시대였던 17세기를 살았던 벨라스케스와 달리 고야가 활동했던 18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식민지배를 받는 등 사회적으로 어수선했다. 세비야출신으로 천재적 재능을 일찍 꽃피운 벨라스케스가 24살에 궁정화가로 발탁되어 펠리페4세의 총애를 받으며 작품활동을 했던 것과는 달리, 아라곤의 푸엔데토도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고야는 인정받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없는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했다. 사라고사에서 프란시스코 바예우라는 스승을 만나 화가 수업을 받고 이탈리아 여행을 상품으로 주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그림을 여러 번 보냈지만, 선정되지 못하고 결국은 자비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 요즈음으로 치면 자비로 이탈리아 그림연수를 다녀온 셈이다. 프라도 미술관 서쪽에 서 있는 고야의 동상. 20대 후반에서야 태피스트리용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궁정에 들어간 고야는 당시의 지식인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의 초상화는 인물의 특징이나 성품을 잘 드러낸다는 평판을 얻었고 결국에는 왕실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략하여 호세 보나파트르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도 고야는 왕실화가였는데 프랑스의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1814년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페르난도7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을 때 고야는 운 좋게도 궁정화가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야는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프랑스의 호세 보나파트르, 그리고 페르난도7세에 이르기까지 4명의 왕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야의 말년은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1819년 마드리드 외곽에 산 집을 ‘귀머거리의 집’이라고 불렀는데, 46살이 되던 해 심하게 앓은 열병으로 청력을 잃었던 그가 친프랑스파로 간주되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고립되어있던 시기였다. 그는 ‘귀머거리의 집’의 회칠한 벽에 직접 유화물감을 칠해 모두 열네 점의 그림을 남겼는데, 검은색을 주조로 하였기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부른다. 적장의 목을 자르는 '유딧', 불길한 느낌을 주는 '마녀의 연회', 양발을 땅에 묻은 채 죽을 때까지 싸우는 '곤봉으로 서로 때리는 사람들',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인간의 생사를 희롱하는 '운명의 마녀들', 지금 당장이라도 모래 속에 파묻혀 버릴 것 같은 모습의 '개', 그리고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이 있다. 기존의 회화문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들은 ‘귀머거리의 집’이 철거되면서 소유주가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거절당하면서 프라도로 오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무렵 고야가 그린 그림들은 주문을 받지 않고 그린 것들로 스스로의 의지와 예술적 영감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그린 것들로 현대미술과 맥이 통하는 점이라고 한다. ‘검은 그림’ 연작 가운데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로마신화의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하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남신인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인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12명의 티탄족 가운데 막내이며 지도자인 남신이다. 우라노스는 자식들을 지옥인 타르타로스에 감금하였는데, 결국은 크로노스가 어머니 가이아와 함께 연대하여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상의 왕이 된다. 하지만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크로노스에게 자신의 자식에게 폐위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크로노스는 아내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의 5명의 자녀를 낳는 족족 삼켰는데, 제우스를 낳게 된 레아는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제우스를 구하게 된다. 결국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이미 삼킨 형제들을 구한다는 것이 신화의 내용이다.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좌:고야 作) (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우:루벤스 作) (클릭시 관련 페이지 이동) 그런데 프라도 미술관에는 루벤스의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도 있어 두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검은 구름에 올라탄 백발의 노인이다. 왼손으로 안은 아이의 가슴에 막 입을 대고 놀란 아이는 몸을 제키면서 바둥대는 모습이다. 사투르누스의 전신이 안정되어 있는 모습과 아이의 신체가 손상되어 있지 않은 탓인지 그렇게 끔찍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반면에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투르누스는 아이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머리부터 게걸스럽게 씹어 삼키고 있다. 없어진 아이의 머리, 손가락 사이를 흐르는 피는 아이의 생명이 이미 끊어진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아이를 먹어치웠다면 나중에 제우스가 사투르누스를 토하게 만들었대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싶다.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에서 두 그림의 차이를 사투르누스의 눈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루벤스의 사투르누스는 ‘지적이고 노회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비정함과 냉혹한 계산이 번득이는 지배자의 눈’을 가졌는데 반하여 고야의 사투르누스는 ‘축생도에 떨어진 자의 눈을 가지고 있어, 얼굴과 몸이 녹아 허물어지듯 머릿속, 정신까지도 무너져 버렸음이 튀어나온 눈에서 느껴진다.’라고 적었다. 고야에 이어 프라도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펠리페4세의 가족)'를 보았다.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물로 보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스페인 미술관 산책'은 무려 9쪽을 할애하여 파격적으로 이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고 눙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수많은 화가, 시인, 소설가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주었기 때문이란다. 피카소만해도 이 그림을 리메이크한 작품을 수도 없이 그렸는데,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최경화작가는 '시녀들(펠리페4세의 가족)'을 볼 때, 우선 5미터 정도 떨어져서 등장인물들을 꼼꼼히 살펴볼 것을 권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졸고 있는 개를 빼놓고는 왠지 모르게 굳어 있는 듯이 보인다. 마치 ‘얼음 땡’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조형진 가이드는 고야의 초기 작품까지 설명을 하고는 개인적으로 더 보고 싶은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약 45분간의 자유시간을 주었다. 톨레도에서 예기치 않은 사고 때문에 지체한 것도 있었겠지만, 보고 싶은 작품은 많았고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처음 간 미술관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작품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여유가 있다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면 되겠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골라서 보아야 한다. 다행히 프라도 미술관에서 준비해놓고 있는 우리말로 된 ‘미술관 안내’ 팜플릿을 보면서 거의 뛰다시피 했다. 폴 퀸네트가 말하듯 마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을 하거나 루브르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듯 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속독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나절에 다 읽기를 바란다. 대문호의 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하는 것이나 루브르 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난 해 성탄절에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점 ‘오, 홀리 나잇!(O, Holy Night!)’에서 예수의 일생에 관한 30점의 연작을 관람했던 기억 때문에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 대한 이야기로 프라도 미술관 이야기를 정리한다. ‘수태고지’는 ‘그리스도의 책형’, ‘성모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유럽회화와 조각 작품들의 주제라고 한다. 누가복음서에 나오는 수태고지란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는 위대하게 되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고하는 장면을 말한다. 수태고지를 그리는 데는 몇 가지 약속이 있다고 한다.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는 대천사 가브리엘,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령의 비둘기이다. 그밖에 성모의 무구함을 상징하는 백합, 성모가 예루살렘의 신전에서 사제의 의복을 짰다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실감개, 또는 털실을 담은 바구니, 펼쳐진 책장 등이 있다. 수태고지의 모습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천사의 방문에 놀란 마리아, 수태하리라는 말을 듣고는 당혹스럽고 두려워하는 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수태한 사실을 수긍하는 마리아이다. 많은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렸지만,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정밀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한다.
2015-05-12 05:30:27오피니언

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20]

메디칼타임즈=양기화컬럼버스와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2) 르네상스 양식의 천정 돔. 폭 116미터 높이 76미터의 세비야 대성당은 바티칸 대성당(San Pietro Basilica),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성당이다. 12세기 후반에 지었던 이슬람사원을 부수고, 1401년에 착공하여 125년이 지나 완공을 보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건축이 진행되다보니 고딕과 신고딕 그리고 르네상스양식이 섞여있다고 한다. 세비야대성당에는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산 페르디난도 왕을 비롯하여 중세 스페인의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안치실 앞에는 무리요의 그림 「성모수태」가 있는 회의실이며, 고야와 수르바란 등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이 있다. 세례당에 있는 무리요의 산 안토니오의 환상(좌)과 면류관의 가시를 모신 성보(우). 성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우선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튼튼한 쇠창살 안에 있는 황금빛 주제단을 보고 놀랐다. 아무래도 속물근성이 발동한 듯하다. 주제단은 80년에 걸쳐 완성한 고딕양식의 목제 제단으로 얼마나 정교한 지 사람이 만들었을까 싶다. 이들 조각들은 성서를 바탕으로 새겨졌고,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을 포함하여 신대륙에서 가져온 1.5톤의 황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창살이 촘촘하게 세워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리고 역시 쇠창살로 보호하고 있는 수많은 미술작품과 성보들의 규모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다. 세비야 대성당은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었다. 어디부터 보아야 할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결국은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그림과 조각들 그리고 성보들을 감상할 수밖에 없다. 성보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쓰셨다는 면류관의 가시를 모셨다는 것도 있었다. 이 성보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절집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탑이 떠올랐다면 필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실 것이다. 네 명의 가톨릭 왕들이 멘 콜럼버스의 관(좌)과 알폰소 10세의 상(우). 중앙복도 부근에 콜럼버스의 둘째 아들 페르디난드 콜럼버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모은 책을 세비야 대성당에 기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콜럼버스의 유해는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 등 가톨릭왕들이 메고 있다. 스페인에 황금시절을 가져다 준 콜럼버스를 기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오른편 뒤쪽에 있는 아라곤의 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콜럼버스가 처음 출항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왕들의 발 가운데 오른쪽을 만지면 부자가 되고, 왼쪽은 세비야에 다시 돌아온다고 전해진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왼쪽인지 헷갈린다. 이럴 때는? 그렇다. 양쪽을 다 만지면 된다. 콜럼버스의 관 옆에 걸린 그림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그린 것이라는데, 아마도 뱃사람일 수밖에 없는 콜럼버스가 항상 마음에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3년까지 네 번에 걸친 항해를 하였지만, 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와는 대접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말년에 통풍으로 고생하던 콜럼버스가 1506년 바야돌리드(Valladolid)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죽었을 때 스페인의 왕들은 그의 죽음을 본체만체했다고 한다. 자신은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고 싶지 않다면서 이스파니올라(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콜럼버스의 섭섭한 심정이 이해된다. 콜럼버스의 유해는 여러 곳을 떠돌았는데, 처음에는 바야돌리드의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가, 세비야 부근의 카르투하 수도원으로 옮겼다가 1542년에서야 그의 유언대로 이스파니올라섬의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795년 프랑스가 이스파니올라를 점령하자 외국인의 손에 넘길 수 없다 하여, 쿠바의 아바나로 옮겼고, 쿠바가 1898년 독립하자 다시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유해를 가톨릭왕들의 어깨에 올려놓은 것은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콜럼버스의 유언을 존중한 것이라고 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항로의 발견은 스페인이 영광의 시대로 향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럼버스의 유해는 따로 안장되어 있고, 네 왕이 메고 있는 관은 비어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는 콜럼버스의 유해는 진짜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랫동안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이 1877년 산토 도밍고의 성당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남성: 크리스토발 콜론 경"이라고 적힌 상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납으로 된 이 상자에는 13개의 큰 뼈 조각과 28개의 작은 뼈 조각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이것이 콜럼버스의 진짜 유해이고, 스페인은 1795년 당시 다른 유해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유전자검사를 통하여 세비야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콜럼버스 아들의 유해와 비교해보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가 궁금하다. 우리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는 잘 모른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증거로 보여준 다음에 노예로 삼으려고 원주민들을 배에 태웠다. 그들 중 일부는 힘든 항해 때문에 배안에서 죽음을 맞았다.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와 같이 왔던 선원들 가운데 일부는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남았는데, 이들은 원주민들을 강간하고 무자비하게 살육하였다. 결국 분노한 원주민들이 남아 있던 선원들을 모두 죽였다. 2차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죽은 선원들의 복수를 위하여 살아남은 원주민을 모두 잡아다가 유럽에 노예로 팔았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원주민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천연두의 대유행이 일어나 심각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스페인 사람들 역시 원주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매독을 유럽으로 옮겨 오랫동안 유럽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다. 세비야성당에서 만나는 알폰소10세왕은 왼손에 둥근 지구본을 그리고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 당시 신대륙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인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세비야성당의 남쪽벽(좌)과 이슬람식 정원에서 올려본 히랄다탑(우). 히랄다탑을 오르는 경사(좌)과 히랄다탑에서 내다본 세비야 시내풍경(우). 눈길이 닿는 곳마다 예술작품인 성당 안을 그야말로 주마간산식으로 훑어보고는, 나가기 전에 히랄다(Giralda)탑을 올랐다. 정사각형으로 된 탑의 한 변을 오르는 비탈이 한 층인데 0층에서 시작해서 34층까지 간 다음에 다시 한 층을 올라가야 하니 9층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물로 치면 5층 정도 높이이다. 경사가 완만해서인지 그리 힘은 들지 않는다. 교황께서 이 성당을 방문했을 때는 나귀를 타고 오르셨다고 한다. 탑 안에서 나귀냄새가 나는 느낌은 그래서일까? 교황께서도 걸어서 오르셨어야하지 않았을까? 히랄다탑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세비야성당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이슬람 사원의 미나렛이었다. 모로코 라바트에 있는 하산2세탑과 쌍둥이탑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지만, 위키피디아는 모로코, 마라케시에 있는 쿠투비아 모스크(Koutoubia Mosque)의 미나렛과 닮았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이슬람사원의 미나렛에 가톨릭의 종탑을 얹어놓았고, 1568년에는 가톨릭의 승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히랄다(El Giraldillo)라는 이름의 성모상을 올렸다고 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다. 차라리 미나렛을 부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무게 2톤의 성모상이 바람이 불 때 마다 돌아가는 것은 서있는 자리가 불편해서는 아닐까? 성당 문 앞에 오렌지 나무와 낮은 분수가 세워져 있는 작은 정원 역시 이슬람사원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가톨릭 나름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다. 따리파에서 점심을 먹고 세비야로 이동해서 세비야대성당, 산타 크루즈 지역을 지나 스페인광장을 보고 플라멩코공연까지 한나절로 세비야를 돌아보려니 아무래도 일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슬람교도들이 요새에 세웠다는 성, 알카사르는 구경도 못했다. 세비야 대성당 부근에 있었던가 본데 아쉽다.
2015-02-17 05:45:34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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