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과 지옥을 오가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3개월.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의 불신임과 비대위와의 갈등, 원격진료 시범사업, 그리고 보궐선거까지 남들은 수년간에 한번 쯤 겪을 일을 불과 3개월 안에 다 겪었다. 그리고 부회장 타이틀마저 반납했다.
최근 의료정책연구소로 돌아간 최재욱 소장의 이야기다.
보궐선거가 끝나고 그의 방을 두드렸다. 방 한켠 벽면을 빼곡히 수 놓은 한시들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간 그가 느낀 심경들이 행간 속에 묻어났다.
不如眼前一醉是非憂樂都兩忘(불여안전일취시비우락도양망 : 눈앞에서 한잔하며 옳고 그름과 근심 기쁨을 모두 잊는 것이 낫다네)
소동파의 <薄薄酒>뿐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에 쓴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 한 사람이 길목을 제대로 지키면 천명의 적도 상대할 수 있다)의 문구도 눈에 들어왔다.
한시를 쓴 이유를 묻자 속에 묻어놨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남들은 3년에 걸쳐 겪을 일을 3개월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구절을 되내이며 스스로 채찍질을 했어요. 구절 구절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느꼈던, 제 심경을 적은 것입니다."
그가 취임한 4월부터 시끄러웠다. 탄핵 임총부터 불신임 논란, 그리고 이어진 집행부-대의원간의 소송 시비 사태까지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할 여러 압박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들이 너무 많아서 누가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도 지쳤다. 백이숙제처럼 정치를 잊고 산 속에 들어가 술 한잔 마시고 시름을 잊고 싶다는, 시 한 구절로 '할 말'을 다한 셈.
"의정협상도 최선이라고 했는데 시시비비 논란이 있었고 의협에 토의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라 힘들었습니다. 시도의사회-비대위-대의원회 사람들이 자주 만나 술 한잔했다면 못 풀었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벽면의 글귀는 儉以不陋 華以不移로 이어졌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지만 행간의 의미는 역시 의협의 사태와 이어진다.
"백제는 화려한 듯 하면서 절도가 있고 사치스럽지 않았습니다. 평소 마음 속에 좌우명처럼 있던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100% 장점만을 강조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단점도 귀 기울이자는 의미입니다."
원격진료 시범사업을 추진해야 하는 집행부의 입장에서 반대파의 이야기에도 나름 귀를 기울이자는 다짐을 했다. 집행부가 100%는 옳다는 만용 대신 수용할 부분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글귀로 대신했다.
노환규 전 회장의 낙마. 그리고 37대 집행부의 레임덕. 먼 곳에 떨어진 김경수 직무대행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못하던 찰라 그가 적은 마지막 문구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一夫當逕 足懼千夫 구절.
한 사람이 길목을 제대로 지키면 천명의 적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뜻처럼 한 사람이라도 길목을 지키고 제 역할을 해야만 의협을 둘러싼 정치, 정책적 이슈에도 대응할 수 있지 않겠냐는 절박함을 대신한 말이리라.
"많은 언론 매체 분들과 상대하는데다가 의협 상황이 급작스레 돌아가자 대변인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구절을 들려주며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냐, 힘들어 하지 마라'는 메세지를 전달했습니다."
최근 그는 부회장 직함을 반납하고 의료정책연구소장으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니 그의 마지막 행보가 그에게 더욱 '잘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보다는 학자가 그를 더 뽐내게 해주는 옷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가 물러나며 사람들에게 보낸 문자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잘 배우다 갑니다."
한 동안 시간이 지나면 한번 쯤 연구소에도 들러볼 생각이다. 틀림없이 벽면 한 귀퉁이에는 어떤 글귀가 적혀있을 것이다. 다짐 혹은 체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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