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노력이 빛을 발할 때다. 엄동설한에 얼마나 발품을 팔았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허니버터칩'이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다. 진료실 대기실에 앉아 '이 친구 참 센스 있단 말이야'라는 의료진 피드백을 기대하며 '장그래' 웃어본다.
나는 다국적 제약사 영업사원이다. 짧게는 MR(Medical Representative)로 불리며 사전적 의미는 의학정보전달자다. 뭔가 거창하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는 잊은지 오래다. 국내 제약업계 현실상 우린 그저 의료진에게 말 잘 듣는 존재일 뿐이다. 새 임상 데이터를 수시로 제공하고 노무와 편익을 제공하는 뭐 그런 정도다. 그 외의 역할은 솔직히 찾아보기 힘들다.
연말이 다가오자 모든 회사원이 그렇듯 나 역시 실적 압박에 쫓긴다.
원래 영업을 잘 해왔던 터라 연초 목표치가 높았는데 이것이 발목을 잡았다. 리베이트 투아웃제 등으로 활동의 폭이 줄다 보니 목표 달성에 빨간등이 켜졌다.
잘한다고 오냐오냐 칭찬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오늘 아침 회의 때는 오랜만에 된통 깨졌다.
회사에서 핀잔을 들으며 정신없이 나왔지만 오늘은 발걸음이 가볍다. 그저 과자일 뿐인 이 녀석 '허니버터칩' 때문이다. 의료진에게 점수 좀 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꽤 들뜬다. 진료실 대기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모처럼 즐겁다.
'허니버터칩' 주인공은 관련 질환 키닥터다. 그래서인지 오후 시간인데도 환자들이 줄을 섰다. 나 역시 약속은 했지만 만남이 30분째 지연되고 있다.
하지만 불만은 없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료진 만남을 위한 기다림은 제약사 MR만의 미덕 아닌 미덕이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이내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약속 시간이 40여 분 지나고 진료실 문이 열린다. 간호사가 들어와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훈련병 시절 조교가 나를 지목했을 때처럼 재빠른 동작으로 진료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교수님께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모니터에 시선을 응시한 채 교수님이 묻는다. 얼굴 좀 쳐다보면 어디 덧날까라는 생각도 찰나, 이내 긴장을 한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네, 다름 아니라. 새 임상 데이터가 나와서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풀 데이터는 물론 간략한 서머리도 준비했습니다."
데이터 얘기는 장황해서는 안된다. 관련 분야 최고 브레인 앞에서 아는 척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괜히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 묻는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진료실에 들어간 지 1분 정도 흘렀을까. 데이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가벼운 대화가 이어진다.
"자료는 거기 놔두고… 요새 일은 할 만해?"
"네,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잘 됐구먼. 그럼 또 보자고…"
헤어질 시간이다. 비장의 무기 '허니버터칩'을 꺼낼 타이밍이다.
"왜 안 가고 서 있어?"
"다름 아니라 이 과자가 그렇게 유명세를 탄다고 해서 한 번 구해봤습니다. 교수님도 맛보시고 자녀들에게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럼 임상 데이터와 함께 놔두고 가겠습니다."
과자일 뿐인데 효과가 좋다. 나를 만나고 한 번 안 웃던 교수가 살짝 미소를 보인다. 센스 있다는 소리도 나왔다. '안 그래도 애들이 허니버터칩, 허니버터칩해서 골칫거리였는데'라는 추임새도 달아준다.
이때다 싶어 새 임상 데이터에 대한 부연 설명도 곁들였다. 의미 있는 데이터라는 피드백도 얻었다. 목표 달성이다. 회사 디테일 기록지에 뭔가 적을 수 있는 의료진 멘트가 하나 생겼다.
그렇게 '허니버터칩'은 1분 머물 진료실에 무려 3분을 넘게 있도록 도와줬다.
진료실을 나왔다. 이제는 새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앞으로 이런 과정을 3번 더 해야 한다. 오늘은 일명 '허니버터칩 데이'니까.
남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미생 중의 미생이라고 부른다.
나름 SKY 출신에, 스펙 쌓기 등 그 고생해서 들어간 글로벌 회사에서 의사 비위나 맞추고 있느냐는 잔소리도 상당하다. 극단적으로 "너가 의사한테 과자나 사다주려고 영업사원하냐. 한심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물론 이런 생활에 가끔 회의도 든다.
리베이트 등으로 잡상인 및 영업사원 출입금지라는 병원 내 스티커를 볼 때면 욱하는 성격에 화가 치민다.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고객은 사회 최고의 브레인이다. 또 환자를 살리고 치료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의약품을 알리는 직업이다. 허니버터칩으로 좋은 약을 한 번 더 처방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걸로 됐다.
모르겠다. 내 인생이 미생인지 아닌지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인생은 미생이 아닌가. 의사라도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완생은 아닐 것이다. 병원장도, 교수도, 펠로우도, 전공의도 역시 미생일 것이다.
본질은 자신의 위치에서 본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설령 과자를 사다주는 일이라도 말이다. 미생 역시 완생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니까.
오늘은 비록 과자를 들고 다니는 제약사 MR이지만 더 나은 내일은 분명히 온다. 아니, 지금의 미생은 내일의 완생을 그렇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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