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터키여행의 첫날이다. 가이드는 첫날임을 감안해서 5시에 모닝콜을 넣었다고 했다. 마침 이날이 일요일이었던 까닭에 도로사정도 좋았는데도 첫날부터 강행군이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27명이었는데, 버스가 약속한 시간보다 3분 앞서 출발할 정도로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우리 일행은 해외여행의 달인들인 모양이다.
이스탄불(İstanbul)은 2014년의 기준으로 14,377,019명이 거주하고 있어, 터키는 물론 중동과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세계에서도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마르마라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해협을 가운데 두고 아시아와 유럽 양대륙에 걸쳐 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도시(都市)로’라는 의미의 중세 그리스어 이스 띤 뽈린"(εἰς τὴν Πόλιν)에서 유래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세계의 수도로 인식되어 도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폴리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향하여’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국가들에게 콘스탄티누폴리스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도시로 보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누폴리스는 330년 건설된 이래로 678년과 718년의 아랍함대의 공격, 913년 불가리아의 공격, 1090-91년 페체네그족의 침공에서도 굳건히 버텼으며, 내부적으로 혼란하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속임으로 단 한 차례 함락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너뜨린 사람이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2세였다.
메흐메드2세의 전략은 매우 치밀하였다. 1452년 술탄은 먼저 보스포루스해협의 폭이 700미터밖에 되지 않은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성을 쌓았고, 증조부 바예지드1세가 보스포러스해협의 아시아 쪽에 세운 아나돌루 히사르(Anadolu Hisar) 성을 증축한 다음 보스포러스해협을 지나는 모든 배에 통행료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오스만제국의 존재감을 공식화한 것이리라.
1453년 3월 26일 수도 아드리아누폴리스에서 출정한 메흐메드2세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한 것은 4월 11일, 술탄의 출정소식을 들은 비잔틴제국이 황금뿔만을 쇠사슬로 봉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다음이었다. 비잔틴제국이 구매를 거부하여 오스만제국으로 온 헝가리출신의 대포기술자 우루반이 제작한 초대형 대포로 가공할 위력의 포격을 가했지만, 콘스탄티누폴리스의 성벽은 금방 무너지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전이 두 달 넘게 진행되자 메흐메드2세는 결정적 한방을 준비해야 했다.
황금뿔만 안으로 해군력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봉쇄된 만입구를 피하여 4월 22일 야밤에 지금의 돌마바체 궁전 자리에서 탁심언덕을 넘어 카심 파샤 쪽의 황금뿔만 안으로 레일과 통나무를 이용하여 67척의 함선을 육로로 옮긴 것이다. 전함을 육로로 이동시킨 것은 전세계의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해군의 반격이 강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5월 28일 밤 총공격을 퍼부은 끝에 콘스탄티누폴리스는 함락되었다. 비잔틴제국의 7천명의 군사가 당시 최강이었던 오스만제국의 16만 대군을 상대로 50여일을 버틴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했다. 콘스탄티누폴리스의 4만 인구 가운데 살해당한 사람은 약 4천명이었다고 한다.
휴일아침 텅빈 도로를 달려 버스에서 내린 곳은 블루 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박물관 앞이다. 가이드는 널따랗게 펼쳐지는 정원을 따라 블루 모스크의 오른쪽 광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곳은 비잔틴제국 시절 원형경기장이 있던 곳으로 경기장 가운데 세워져 있던 오벨리스크가 광장 중앙에 남아 있다.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테오도시오스의 오벨리스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3세(Thutmose III)가 시리아 정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오벨리스크다. 이 오벨리스크의 원래 길이는 60m, 무게는 800톤에 이르렀기 때문에 옮기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셋으로 잘라낸 윗부분만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기단 6m를 포함한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6m이다.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누폴리스에 도착한 오벨리스크는 390년 테오도시우스1세의 명에 의하여 이곳에 세워졌다.
오벨리스크의 기단에는 당시의 새긴 조각작품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향한 북동쪽의 아래쪽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작업이 조각되었고, 위쪽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가족이 작업을 구경하는 모습을 새겼다. 북서쪽으로는 무릎을 꿇은 이방인에게서 충성서약을 받는 네 명의 황제 가족을 조각했고, 아래쪽에는 이 오벨리스크를 세우게 된 과정을 설명한 그리스어 비문이 있다. 남서쪽 아래에는 전차경기 모습을, 상단에는 경주를 구경하는 황제가족을 조각했다. 남동쪽의 위에는 경기의 승리자에게 관을 씌워주는 테오도시우스황제의 모습을, 그 아래로는 경기의 관람객과 승리에 취해 춤추는 군중의 모습을 새겼다.
오벨리스크 뒤로는 세 마리의 뱀이 몸을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의 청동제 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앞에 있던 것을 서기 330년 콘스탄티노스 대제의 명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기둥은 479년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플라테이야 전투에서 31개의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연합군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페르시아군인들의 청동방패를 녹여서 만든 것이다.
기둥의 밑부분에는 31개의 그리스 도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기둥꼭대기에 뱀들의 머리 사이에 있는 삼각발이 황금그릇을 받치는 형상이었는데 이것은 일찍 없어진 상태였고, 뱀의 머리도 오스만제국의 술탄과 폴란드대사가 잘라버렸다고 한다.
히포드럼광장의 남쪽 끝에는 외관이 지저분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예네토스황제의 오벨리스크’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4세기 콘스탄티노스 대제 때 세운 32미터 높이의 오벨리스크로 당시에는 대리석에 금박 청동 장식을 입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콘스탄티누폴리스를 함락시킨 제4차 십자군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장식물들을 떼어내는 바람에 심각한 정도로 훼손되었던 모양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가 대대적으로 수리하고는 명문을 남긴 것이다. 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흉물스러운 모습이 남아 십자군의 만행을 지금에까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십자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덧붙이면, 당시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점령한 십자군들은 짧은 시간임에도 수많은 예술품들을 파괴하고 약탈해서 해외로 반출해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있는 성 마르코 성당 입구 위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는 네 마리의 청동말 조각은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그리스의 델포이에서 가져와 히포드롬 광장에 세웠던 것을 십자군들이 옮겨놓은 것이다.
히포드럼 광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정자는 독일 황제 빌헬름2세(Wilhelim II)가 1901년 터키방문을 기념하여 당시 술탄 압뒬하미드2세에게 기증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독일편에 서서 싸우는 불행한 사태가 우연한 일이 아님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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