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하여 한 뼘의 그늘을 찾는 일에 관심이 더 간다. 그러다보니 보아야 할 것에 가까이 가는 일이 소홀해진다. 가이드를 따라가는 구경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볼거리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마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면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기억에 남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에페소스의 북쪽으로 입장하였는데, 도리아식이던 북문은 폐허로 남았다고 한다. 에페소스 유적에 들어서면서 세 개의 아치만 남은 무너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로마 목욕탕이다. 로마 목욕탕을 지나 국립 아고라가 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인 돌덩이들이 늘어 서 있고, 그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나무그늘에 의지하여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야외음악당인 오데이온(Odeion)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에페소스 구경을 시작했다. 국립 아고라와 오데이온 사이에는 ‘신성한 길(Hiera hodos)이 나 있다. 길 양쪽으로 이오니아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지금은 1단이나 2단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축제 때 아르테미스 신상을 모시고 행진을 한 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2세기 무렵 에페소스의 부유한 시민 푸불리우스 베디우스 안토니우스(Publius Vedius Antoniu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이아나(Flavia paiana)가 지은 오데이온에서는 각종 공연이나 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1500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오데이온의 무대는 2층으로 되어 있었고, 기둥으로 장식되었다. 오케스트라석보다 1m 정도 밖에 높지 않은 지휘대(podium)는 좁았는데, 무대에서 지휘대로 통하는 3개의 문이 있었다. 오데이온은 상황에 따라서 나무로 된 지붕으로 덮을 수 있었다.
오데이온을 지나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최고위직 사람들의 집합소 프리타네이온(Prytaneion)의 유적이다. 프리타네이온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지었던 것인데, 이곳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순수하고 성스러운 불을 모셨다고 한다. 흩어진 돌더미 사이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 유적복원을 위하여 조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신성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는 기둥들이 이어지지만 왼쪽으로는 축대가 시작되는 내리막길로 연결된다. 축대가 끝난 곳에는 길 양쪽으로 조각이 새겨진 돌이 있다는데, 앞서가는 일행을 뒤쫓아 가는데 정신이 팔려 놓쳤다. 한쪽에는 여행자를 보호하는 신 ‘헤르메스’가 어린 양과 같이 있는 모습과 그의 상징,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휘감고 있는 뱀을 새겼다. 다른 쪽에는 아폴론이 숫양과 함께 있는 모습과 지구의 배꼽인 바위 그리고 발이 세 개인 솥을 새겼다. 두 개의 돌은 구역을 가르는 표시였다.
우리가 지나온 구역은 고위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프리타네이온, 회의장소인 오데이온, 도시의 영웅을 모시는 사당, 신성한 불을 지키는 헤스티아 신전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한마디로 에페소스를 움직이는 중요한 장소였던 것이다. 에페소스 사람들은 이 구역을 ‘행정지구’라고 불렀다.
이곳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흩어진 돌더미 사이로 조각상이 몇 개 붙어 있는 건물의 잔해를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 말기 독재관을 지낸 술라의 손자 멤미우스(Memmius)에게 바친 기념비이다. 헬레니즘양식으로 된 이 기념비는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참고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 - 78)는 6개월로 되어 있던 독재관의 임기를 없앴다. 공화정 로마에서 개인이 처음으로 절대 권력을 차지한 사례로, 뒷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아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으로 이행하게 되는 길을 터놓은 셈이다.(1)
멤미우스 기념비를 지나면 두 개의 돌기둥이 길을 가로막는다. 기둥에 헤라클레스가 새겨져 있어 ‘헤라클레스문’이라고 부르는데, 기둥 아래에 세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말이나 수레가 지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일종의 하마비(下馬碑)인 셈이다.
헤라클레스문에 못 미쳐 왼쪽, 그러니까 멤미우스 기념비 건너편에 있는 널찍한 폐허는 도미티아누스광장이고, 헤라클레스문을 장식했던 승리의 여신 니케의 대리석판이 있다. 가이드가 헤라클레스문과 니케여신상을 중점적으로 설명하고는 지나치는 바람에 이 부근에 몰려 있는 칼키디움이나 에페소스에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건설한 섹스틸리오스 폴리오를 기리는 기념비,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저수조 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헤라클레스문을 조금 내려가면 트라이아누스(Traianus) 저수조가 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세워진 이 저수조는 2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많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고 한다. 에페소스의 곳곳에 저수시설을 만든 것은 로마시대에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던 목욕탕에서 사용할 물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리라. 로마 사람들은 그 옛날 이미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고, 상하수도 체계를 분리함으로써 전염병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문 가까이에서 만난 로마목욕탕을 비롯하여 에페소스에는 여러 개의 목욕탕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신전 뒤쪽에 붙어 있는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은 남녀공용으로, 시간을 달리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탈의실을 비롯하여 온탕, 냉탕, 열탕, 증기탕 등 요즈음 우리나라의 목욕탕에 가면 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목욕탕에는 일종의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는데 벽을 따라 좌변기가 늘어서 있고, 좌변기 밑에는 도랑이 있어 물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봉헌된 신전은 셀수스 박물관과 함께 에페소스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은 터키의 20리라 지폐에 인쇄되어 있을 정도이다. 푸불리우스 퀸틸리우스(Publius Quintilius)에 의하여 117년부터 119년 사이에 건축된 원래의 신전은 4세기 무렵 지진으로 무너졌고, 지금 남아 있는 신전은 그 이후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신전이라기보다는 기념비에 가까운 것으로 하드리아누스황제, 아르테미스여신 그리고 에페소스의 시민들에게 봉헌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2)
신전은 문간방(pronaos)과 작은 주실로 구성되었다. 문간방에는 코린토 양식의 기둥으로 받쳐진 두 개의 아치가 세워져 있다. 첫 번째 아치에는 도시의 수호여신 티케(Tyche)의 흉상이 가운데 새겨졌고, 두 번째 아치에는 아칸서스 잎으로 둘러싸인 메두사의 반신상이 새겨졌다. 사실 이 건물이 아르테미스여신에게 봉헌되었다고 하면 첫 번째 아치에 아르테미스 여신을 새겼어야 할 것이다.
가이드는 이 상이 아르테미스여신상이라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티케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의 수호여신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린 것도 아닐 것 같다. 메두사를 새긴 이유를 악귀와 불행을 쫓아주는 부적의 의미였다는 설명도 있지만, 우리 가이드는 미의 여신의 안내를 받아 신전에 입장하면서 뻣뻣하게 고개를 들 수 없도록 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문간방의 아치 옆으로는 부조가 새겨진 네 개의 패널이 있다. 처음 세 개의 패널은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에페수스를 건설한 안드로니코스가 맷돼지를 뒤쫒는 장면,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등 그리스 사람인과 아마존의 여전사 사이의 전투가 새겨졌다. 3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4세기 무렵 재건축될 때 여기에 자리한 것이다.
네 번째 패널은 4세기 무렵 제작된 것으로 이교를 금한 테오도시우스황제와 가족들이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여신을 비롯하여, 아테타, 아폴로, 안드로클로스, 헤라클레스 등 그리스신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새겼다. 이런 이유로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 신전을 재건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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