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에 도착해서 여섯 번째 맞는 아침이다. 이날은 6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가장 늦은 시간이었다. 전날 일찍 잠들었기 때문인지 3시 반에 이미 깨어 있었지만 아내가 곤하게 자는 것 같아서 침대 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샤워를 하면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보름달 같다. 전날 밤에 서울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먹고는 금방 잠들었기 때문이다.
터키에서 먹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얼큰한 국물이 아쉬웠고, 다음날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이동하려면 가방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우리가 탈 페가수스항공은 탁송화물이 15kg이 초과하면 돈을 내야 한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버릇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언덕이 있었다. 집들 사이로 모스크가 있음을 알리는 미나렛이 곳곳에 서 있다. 옛날에 필자가 살던 월곡동이나 봉천동 달동네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미나렛들을 교회당 십자가로 바꾸면 말이다. 언덕 위에는 커다란 터키 국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정말 터키 사람들의 국기사랑은 본받을 만하다.
기왕 나왔으니 터키 사람들 이야기를 더해보자. 터키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부분 터키 사람들이 친절하다고 이야기한다. 때로는 오지랖이 넓다 싶을 정도이다. 친절함도 종류가 있겠지만 터키사람의 선한 눈을 보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겠다.
공연한 오지랖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든 터키사람들 가운데 배가 나오고 몸집이 비대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터키 어린이는 물론 청년들까지도 날씬하고 잘 생긴 것을 보면 선천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느긋한 성격 때문일까? 사실 느림은 장수에 유리한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달거나 짠 터키의 음식문화 탓일 수도 있겠다.
2013년에 발표된 OECD 보건통계를 보면 2007년 50대 중반이던 터키국민의 기대여명은 2011년에는 74.6세에 이르고 있다. 기대여명이 우리나라와 비교될 만큼 획기적인 개선을 이룬 유일한 나라이다. 터키도 고령화사회에 접어들면서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생활습관질환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즈미르에서 하루를 묵었으면서 시리아 난민 문제를 빠트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유럽으로 이주하려는 난민들 이야기는 스페인여행기에서도 적었지만, 최근에는 터키와 그리스를 경유해서 유럽으로 가는 경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터키 근해에 있는 섬들이 그리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최근 터키를 경유하는 난민을 막기 위하여 그리스 정부는 터키와의 국경선에서 감시를 강화하였지만, 해상경로를 감시하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로 가는 길이 EU국가로 가는 최단거리가 되었다. 터키 근해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의 섬들 가운데 사모스섬이 가장 가깝다.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이기도 한 사모스섬은 이즈미르에서 그리 멀지 않다.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려고 하는 난민들은 주로 시리아사람들이 많다. 지난 9월 2일 이즈미르와 가까운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어 유럽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세 살 바기 아일란 쿠르디도 시리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아일란의 죽음이 있고서야 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동 및 아프리카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시리아의 난민사태는 1971년부터 이어진 알아사드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세력의 저항이 커지면서 내전상태에 빠져들면서 심각해진 것이다. 시리아 국내에는 헤즈볼라와 이슬람전선, 쿠르드인민수비대 등 반정부세력들이 정부군과 대치해왔다. 최근에는 IS가 이를 이용하여 국가를 세우려고 시리아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부군과 반정부세력 사이에 낀 국민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쫓겨 난민신세가 된 사람들이 무려 400만명에 이른다. 터키는 일찍 시리아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해서 곳곳에 난민캠프를 운용하고 있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몇 군데 난민캠프를 지나기도 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 아랍 부호국가들은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1)
시리아 난민들을 수용한 터키 정부지만 시리아와 이라크 등지에서 몰리고 있는 쿠르드난민들에게는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터키 국내에 거주하는 쿠르드민족을 통제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터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터키의 국경지대에서 떠도는 쿠르드난민들의 어려운 삶은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는 조너선 캐플런이 쓴 에서 엿볼 수 있다.
터키-이라크 국경의 터키 군인들은 강 건너의 이라크 쪽 난민 캠프에서 진료를 막고, 터키 영토에 진료소를 세우는 것을 겨우 허락하였다는데, 결국은 이라크 쪽의 쿠르드난민 환자가 터키 쪽으로 와서 진료를 받아야만 할 정도이다.(2)
호텔을 나선 버스는 30분 정도 달려 이즈미르공항에 도착했다. 이즈미르의 신공항은 인천공항설계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관이나 내부 분위기가 인천공항과 흡사해서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보안검색을 마치고 탑승 게이트에 도착하니 탑승까지 2시간이나 남았다. 멍 때리고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놀이 개발자 전기호씨는 2014년 10월 27일 서울광장에서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의 ‘멍때리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멍때리기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순간을 의미한다. 잠시의 멍때리기는 뇌가 쉴 수 있는 짬을 주고, 휴식을 취한 뇌에서는 뇌신경회로가 활성화되어 정보전달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억력이 좋아지고 무의식 상태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멍때리기를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게 되면 세포의 노화가 빨라져 기능이 쇠퇴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일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보니 날개 위에 있는 비상구 옆이다. 여기 앉는 승객은 비상시에 다른 승객들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자리를 배정할 때는 승객의 의향을 묻기 마련이다. 평소 같으면 절대로 앉지 않는 자리인데 탑승수속을 할 때 그런 질문을 받은 기억이 없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나가면서 스크린이 내려오고 탑승안내를 시작한다. 승무원복장을 한 여자 어린이가 설명하고 남자 어린이가 시범을 보이는 모습이 정말 깜찍하다
그리고 보니 승객들도 모두 어린이들이다.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 탑승을 즐기란 메시지가 읽힌다. 발상이 참신하다. 저가항공인 탓인지 비행 중 식사는 물론 음료도 비용을 지불하는 승객에게만 제공한다.
1시간여 비행 끝에 비행기는 이스탄불 국제공항에 착륙한다.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는 마치 바다로 돌진하는 듯해서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홀연 육지가 나타나 숨을 돌리게 한다. 영화 인디애나존스에서 절벽 밖으로 한 발을 내미는 순간 홀연히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타나 듯 말이다. 터키에 도착하던 날 이용했던 국제선청사 바로 옆에 있는 국내선 청사에서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
참고자료
(1) 테크홀릭 2015년 11월 7일자 기사. 시리아 난민 사태는 왜 일어났을까.
(2) 조너선 캐플런 지음. 아름다운 응급실 131-208쪽,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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