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고 /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지 /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 와요. /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 곳으로 떠나 버리고. /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 없이 흩어져 /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 가요.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 웬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지려 하여도 /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 같아 /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거리에서> - 동물원
영화 JSA에서 송강호는 말한다. “광석이는 왜 그렇게 빨리 죽었지?” 그의 말처럼 김광석의 노래는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김광석을 특별하게 추억하는 사람이 있다. 남다른 추억을 가지려면 친구나 같이 음악활동을 했던 사람이거나 아주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일 테다.
“광석이를 떠올릴 때면 더 속상한 것은 꽤 좋은 친구 하나 잃었다는 이기적인 속상함이다”고 말하는 그는 김광석의 친구이자 같이 음악을 했던 김창기(42 김창기 정신과)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에서 김창기는 아련한 노랫말과 선율을 만들었으며 김광석은 구수하고 애절한 목소리를 덧입혔다.
김광석은 가고 김창기는 남았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을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둘은 동일하게 과거다.
부러질 성냥개비
김창기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병원 식구 9명을 거느린 개원 6년차 정신과 의사이다.
추석 이후 환자가 많이 줄어서, 시간이 남는다고 너스레를 떨며 개원의로서 그는 순응하며 살고 있다. 단순하게 물 흐르는 데로 가는 척 하려는 거란다. 노랫말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이다.
의사사회에 깊숙이 개입한 적도 없고 개입한다 치더라도 능력이 없단다. 정신과를 택한 이유가 가장 의사 같지 않아서이다. “사회에 잘 적응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과를 많이 간다”고 농담을 던지지만 지금은 제일 잘 맞는 것 같다.
아침마다 자전거로 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하루 종일 환자를 보고, 퇴근해서는 아이들과 놀다가 아내랑 술을 한잔한다. 주말에는 아이들이랑 자전거도 타고 배드민턴, 줄넘기 그림도 그리고, 체스도 같이 하는 평범한 아버지다.
집에 음반도 없다. 다 주고 없단다. 음원이 있으니까 나중에 음반을 다시 내면 된다고 한다.
오는 9일에 아름다운 재단 행사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1년 한두 번 가수로서 노래를 한다. 동물원 시절에도 공연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80년대와 동물원
80년대 후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이념 논쟁이 치열하던 대학가. 프로가 되기를 강요하던 사회 분위기. 그 속에서 그룹 ‘동물원’은 소소한 일상을 노래한 그 시대의 새로운 코드였다.
프로가 태동하던 그 시절, 프로가 아닌 철저한 아마추어를 꿈꾸었던 그들. 겨우 1년 1~2번 공연장에 섰을 뿐이었지만 모두의 기억에 아련한 추억이 된 그들이었다.
동물원에서 김창기는 <거리에서>,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 부터> <널 사랑하겠어> 등 주옥같은 노래를 쏟아냈다. 김광석과 함께 화려한 동물원의 초기를 이끌었다.
본과 1학년 때 첫 음반을 냈다. 전공의 4년차에 ‘널 사랑하겠어’가 담긴 6집을 발표했다. 김창기는 7집 이후 동물원을 떠난다.
그는 ‘꿈의 대화’로 대학가요제에 입상한 연세의대 선배 이범용과 ‘창고’라는 그룹을 결성해,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솔로 음반을 통해 간간히 자신의 음악을 발표하고 있다.
“우울한 세대들이 동물원을 좋아했다”는 말처럼 그는 80년대를 우울증과 학습된 갑갑함이 지배하는 시대로 기억한다. 그 시대를 탈피하는 하나의 탈출구가 동물원의 음악이었고 그가 생각하는 의미 이상 동물원은 상징성을 띄게 된 것이다.
비록 그는 “여학생들의 인기를 많이 받으면서 동아리 활동 잘했다”고 스스로를 낮추지만 말이다.
동물원→창고→솔로, 어른이 되다
김창기는 “동물원의 노래는 소년·소녀 취향에 착하고 어린 분위기였으며 늘 버림 받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그 모습으로 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창고 시절에는 감정표현을 배설하듯이 분노도 터트리고 불안감도 보여줬다. 조금 더 성숙해서 바라본 사회는 소년·소녀의 착함만으로, 더군다나 버림받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이후 솔로 음반에서는 과거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사진 찍듯이 음악으로 담았다. 어릴 적 눈썰매 타던 기억을 그림처럼 음악으로 만들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픈 나이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것.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거다. 과거는 그립고 시간은 좋은 것들만 기억하기 나름이다. 김창기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가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가수 김창기
음악과 정신의학은 결코 다르지 않다. 정신의학과 음악 모두 타인의 공감을 얻어내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남의 감정을 수용할 능력이 필요하다. 정신과 의사도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타인의 감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김창기는 음악과 의사를 두 손에 쥐고 있다. 음악은 취미라고는 하지만. 의사로서 좀 더 환자를 편안하게 만날 수 있는 고민을 한다. 공부도 더하고 병원을 때려치우고 심리상담소를 개설할까 싶기도 하다. 환자들과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자전거에서 그는 영감을 받아 노래를 작곡한다. 그래서 저녁에 다시 악보에 옮긴다. 아직도 틈틈히 음악을 만든다. 내년쯤에는 다시 음반을 낼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 주말이면 축구를 한다. 문대헌, 안치환, <동물원>,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활동했던 친구들과 만난다. 인원도 40여명에 달한다고. 예전에는 회색분자니 빨갱이니 서로 으르렁 거렸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축구 전술 모임을 핑계 삼아 술자리도 자주 갖는다.
직업과 취미와 친구들과 놀이가 있는 2000년대다. 쉽게 부러질 성냥개비 하나 같은 2000년대를 살아간다는 김창기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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