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제약이 리베이트 제공을 목적으로 동영상을 제작하면서 의사가 아닌 배우자가 강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제약업계가 약 처방 확대를 위해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의사의 배우자에게까지 거액의 리베이트가 흘러갔다는 사실은 '갑을' 관계의 심각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갑과 을 관계는 비단 제약업계에만 존재할까?
복수의 의료기기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치료재료를 공급하는 다국적의료기기업체 A사 임원은 최근 의사인 남편을 따라 해외로 출국했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의 모 대학병원 교수로 안식년을 맞아 외국대학에서 과제수행을 위해 연수를 떠난 것.
여기까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 교수와 A사가 갑을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그는 A사 주요 고객으로 과거 매출 확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A사는 여자 임원이 남편의 장기 해외연수에 동행하겠다고 하자 휴직계를 받지 않고 해외 재택근무를 하도록 했고, 고액의 급여까지 계속 지급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소문이 업계에 퍼지면서 갑을 관계에 있는 대학병원 교수와 A사 간 모종의 '딜'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A사 내부사정에 밝은 업체 관계자는 "A사 임직원들은 해당 임원에 대한 배려를 의아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개인적인 일로 해외에 1~2년 나갈 경우 휴직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의사 남편의 안식년을 따라가는데 고액의 연봉까지 주는 건 철저한 윤리경영 준수를 내세우는 다국적기업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불만이 높다"고 덧붙였다.
또한 "A사 사례는 어디까지나 남편이 의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며 "업체 입장에서도 의사 남편이 향후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편의를 봐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국적기업 B사에서 10년간 윤리경영을 담당한 임원 역시 상식 밖의 일이라고 단언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장시간 해외에 나가면 보통 휴직 처리를 하지만 휴직계도 내지 않고, 심지어 무급이 아닌 유급으로 하는 것은 다국적기업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는 것.
합법 가장한 불법 리베이트 제공 여전
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A사의 사례가 점잖은 편에 속한다"고 환기시켰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의사와 의료기기업체의 갑을 관계에서 고착화된 각종 리베이트 관행을 감안해서 하는 말이다.
이 관계자는 의사가 진료권을 이용해 업체에 리베이트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단수지정'을 언급했다.
단수지정이란 의사가 특정업체 제품을 지정해 병원에 구매를 요청하는 것으로 합법을 가장한 불법 리베이트 제공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가령 의사가 동일 품목 의료기기를 취급하는 A사ㆍB사ㆍC사 영업사원을 불러 제품을 구매하는 대가로 판매금액 중 몇 %를 리베이트로 줄 수 있는지 사전에 조율한다.
이후 가장 높은 리베이트를 제시한 업체를 선정해 해당 제품이 갖는 기능상의 장점 또는 사용의 익숙함 등 구매해야하는 특별한 이유를 적은 '단수지정서'를 병원에 제출하게 된다.
만약 의사의 병원 매출 기여도가 크거나 혹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품목이라면 병원 구매과 또는 관리과 입장에서는 단수지정 품목을 구매할 수밖에 없어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인 리베이트 제공이 성사되는 셈이다.
다국적기업ㆍ국내 대리점 갑을 관계 '악순환'
의사와의 관계에서 '을' 위치에 있던 의료기기업체가 반대로 대리점에게는 우월적 지위를 갖는 '갑'으로 존재한다.
특히 일부 다국적의료기기 기업들과 국내 대리점은 불공정 거래가 만연한 갑을 관계로 얼룩져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대리점 관계자는 다국적기업과 체결한 '물류대행계약서' 또는 '대리점계약서'만 보더라도 갑의 횡포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알 수 있다고 제보했다.
실제로 메디칼타임즈가 입수한 다국적기업 2곳과 대리점간 물류대행계약서, 대리점계약서를 분석한 결과 일부 계약조건의 경우 대리점에 불리하게 적용돼 있었다.
계약서 내용과 대리점의 말을 종합해보면, 우선 대리점 계약 해지 조건이 다국적기업에게만 유리하도록 일방적이고 명문화돼 있지 않다는 게 대리점들의 전언.
다국적기업은 대리점에 30일 전에만 해지를 예고하면 언제든지 바로 계약관계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약 해지 시 대리점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단서조항이 없는 것도 문제다.
즉, 해지 시점에서 대리점에 남아 있는 재고물품 인수나 대리점 운영과 제품 판매를 위해 점주가 투자한 유ㆍ무형 가치를 보상해주는 아무런 장치가 없다는 지적이다.
대리점에 요구하는 과도한 물품대금 연체이자 역시 불합리한 독소조항.
대리점은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사들인 물품 대금을 보통 30일, 늦어도 60일 안에 지불해야 한다.
만약 이 기간 안에 물품대금을 입금하지 못하면 최소 12%에서 최대 25%에 달하는 연체이자를 물어야 한다.
금리가 떨어져 은행 대출이자가 3~4%대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너무 높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대리점 한 관계자는 "병원에 물건을 납품하면 6개월에서 8개월, 심지어 1년을 넘겨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연체이자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양유업의 제품 '밀어내기' 또한 대리점 입장에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대리점의 한 달 판매수량 목표계획이 10개라고 가정하면 다국적기업은 수량을 15대로 책정해 떠넘기기 식으로 물품 주문을 강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다국적기업 배 불리는 '물류대행회사' 우려
다국적기업들이 대리점 마진율을 줄이기 위해 기존 대리점을 '물류대행회사'로 전환해 판매계약을 체결하는 영업방식의 확대 우려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입업체 모 이사는 "과거 4~5년 전만 하더라도 다국적기업들이 대리점 마진율을 30~40% 정도 보장했다면 이제는 대리점이 아닌 물류대행회사를 두면서 마진율을 7%까지 줄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 대리점 체계에서는 투자를 통해 제품 판매와 마케팅에 기여했기 때문에 충분한 이윤을 보상해줬지만 물류대행회사의 경우 말 그대로 물류만 담당하기 때문에 수수료 정도의 마진율만 보전해주면 된다는 것이 일부 다국적기업의 논리다.
하지만 대리점 관계자는 "다국적기업이 물류대행회사를 두는 것은 결국 자기들 이윤을 높이고 대리점 마진은 줄이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물류대행계약을 체결한 대리점 역시 '을' 입장에서 마진율만 줄어든 채 여전히 다국적기업이 요구하는 영업ㆍ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물류대행과 대리점계약을 병행하고 있는 다국적기업 B사 임원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물류대행 계약은 치료재료 원가조사와 수가 인하 등으로 수익률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비용절감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며 상당수 다국적기업들이 대리점 체계에서 물류대행회사를 두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기존 대리점 마진율이 30~40%였고, 심지어 일부 정형외과 제품의 경우 70%에 달했다"며 "물류대행 계약은 과도한 대리점 마진이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로 제공되는 부작용을 개선해 다국적기업들의 윤리경영 실천과 의료기기 유통 투명화에도 순기능을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부 다국적기업을 바라보는 대리점들의 불신은 여전하다.
대리점 관계자는 "다국적기업들은 갑을 관계를 내세워 대리점과의 상생을 내팽개친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고 있다"며 "다국적기업들 중 국내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한국 시장에 재투자하는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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