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에서 '김경수'라는 이름 석자는 '부산시의사회장' 또는 '37대 의협회장 직무대리'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4월 19일 임시대의원총회에서 노환규 전 회장의 불신임안이 통과되자 긴급 상임이사회를 열고 의협 부회장인 김경수 부산시의사회장을 직무대행으로 추대했다.
당시 의협은 정부의 원격진료 시범사업 추진을 비롯해 의정협의, 집행부와 대의원 간 갈등, 회장마저 탄핵으로 자리가 비어있는 등 총체적 난관을 겪고 있었다. 의협회장 직무대행으로 긴급 수혈된 김경수 부산시의사회장은 추무진 회장 당선 이후 지금은 부산시의사회 회무와 진료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김 회장에게 작은 바람이 하나 있다. 임기 후 시(詩) 창작에 몰두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에게 시는 진료 못지 않게 의미가 깊고 또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김 회장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재학시절 의대 동인 '회귀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詩作)과 인연을 맺고 본과 3학년이던 1981년 부산대학교 문학상 시부문에 당선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1993년 '현대시'로 등단함으로써 국내 문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하얀 욕망이 눈부시다'(문학세계사 1998), '다른 시각에서 보다'(하늘연못 2001),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시와사상 2004), '달리의 추억'(한국문연 2009) 등의 시집을 발간하면서 지치지 않는 필력을 과시하면서 지금은 한국 문단의 중견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한 다섯 번째 시집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시와사상 2012)는 시쓰기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과 고통,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고통보다 앞서는 것은 시에 대한 사랑이다. 그에게 시는 자신의 분신이고 자식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의 말'을 통해 "새로운 시 형식을 찾아나서는 시의 사냥꾼이 되려고 하지만 그런 작업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꼭 내 시를 시집으로 묶어 발표를 해야 하나 의문도 든다. 그러나 내가 생산한 시들은 결국 나의 분신이고 나의 자식들이니 그 시들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불쌍해서 다시 그 시들을 위한 언어의 집을 내고야 만다"고 말한다.
김경수 회장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깊은 사랑과 통찰력을 기본으로 개성적이면서도 세밀한 시적묘사를 통해 시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관을 풀어내고 있다.
산 속에 있는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그 안개는 물고기 모양을 하였다가
밤새 혼자서 불을 밝히고 논다.
찻집 카페가 있는 그 밤의 산 속 어두컴컴한 안개
공원에
나무들이 흑백 영화관을 열었다.
빛과 어둠만이 있는 그 공간에서는
소리와 감촉만이 진정한 시민이다.
소리들과 차가운 감촉이 뛰어다니면 놀았고
모든 생물들이 관객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는
낙엽들도 저희들끼리 모여서
몸을 부딪혀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위치를 알린다.
('산 속 찻집 카페에 안개가 산다' 중에서)
특히 그의 시는 감정의 폭발과 배설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해방됐다는 점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벌거벗은 젊은 여인으로 변해
잘록한 허리를 보여주며 앉아있던 바다가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다 되돌아가
우윳빛 거대한 지느러미를 흔들다가
등을 굽혀 수평선을 만든다.
진부한 인생을 지우기 위해 벌거벗은 바다가
술잔 속에 쏙아놓은 말言들의 나체裸體를 감상한다.
달빛이 금빛 가루가 되어 쏟아져내리는
모든 사물들이 다 잠든 늦은 이 밤에
집에 가지 않고 바다와 함께 있는 사람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포장마차의 등불이
쓸쓸한 색조의 노래가 되어 합창처럼 퍼져나간다.
('바닷가 옆 포장마차' 중에서)
시 안에서 밤바다 포장마차에 앉아있는 그는 자신의 감정을 시어(詩語)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시간과 바다, 포장마차의 등불에 투영시키고 있다. 그렇게 시 안으로 사라진 그는 비로소 바다가 되고 포장마차가 되고 등불이 되고 깊은 밤이 돼 독자의 가슴에 절제된 감동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의사들이 문학과 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저도 의사지만, 의사들은 의료만 공부하다보니 일반적으로 노는 쪽 취미를 많이 갖는 것 같아요. 물론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 갖는 의사들도 있지만 많지는 않아요."
"문학은 예술의 근간인데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특히 시는 좀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조금 답답하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이런 이유로 그는 고전주의부터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문예사조와 현대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해 이론서 '알기 쉬운 문예사조와 현대시'(시와사상 2006)을 펴내기도 했다.
"의사들이 시를 잘 모르고, 접근을 못 하는 이유는 이론을 알아야 이해하는데 이론을 쉽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문예사조책을 내게 됐어요."
"문예사조를 보면 어느 시대에는 시가 이끌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미술이 이끄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시도, 음악도, 미술도 그 시대의 문예사조의 프레임에 맞춰서 가는 거에요. 그걸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어요."
"의사들도 문예사조만 알면 시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지식만으로 시를 보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문예사조 책을 내면서 미술의 문예사조와 시의 문예사조를 연관했어요. 미술은 딱 보면 이해하기도 쉽고 설명하기도 쉽잖아요. 그래서 쉽게 그림과 비교하면서 문예사조를 설명했어요."
그가 발행인으로 있는 계간지 '시와사상' 활동도 열심이다.
'시와사상'은 지난 1994년 창간호를 시작으로 단 한 호도 쉼없이 달려와 벌써 20년을 맞았으며 지금은 부산 최고의 시 전문지로 인정을 받고 있다.
"시 전문지로는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듭니다"는 그의 말에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김경수 회장이지만 부산시의사회장직이라는 명함은 창작의 욕구를 이겨내기 쉽지 않은 무게이다.
"부산시의사회장직을 2년간 하다보니 글을 잘 못쓰겠던데요. 이제 임기가 일년 조금 덜 남았는데 마치면 일반 의사로 돌아가 창작에 몰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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