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의료보험 도입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환자와 의사 간 유지되어 오던 사회적 계약에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거의 50년간 의료정책은 공급자 일변도의 규제로 일관되었다.
그 결과물인 OECD 통계지표를 보면, 한국인 1인당 외래진료횟수 (평균대비 2.5배, 세계 1위), 입원환자의 병원재원일수 (평균대비 2.3배, 세계 2위) 등 지표에서 소비자들이 과잉으로 의료를 이용하고 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는 저수가 정책과 무제한적인 의료선택권이 결합된 결과로 추정된다.
의료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있을 때마다 공급자인 의료인을 압박하는 제도를 도입했으나,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필수의료 인력이 부족해지자 의대 입학 정원을 대폭 증가시켜 문제를 풀겠다고 나섰다.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대표적인 쟁점 사안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자.
1.필수 의료
응급실에 빈 병상이 없어서 환자를 받지 못하는 '응급실 뺑뺑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우리나라는 총 병원 병상수는 OECD 평균의 3배(세계 1위)이고 급성기병원 병상수도 세계 1위이다. 응급실이나 중환자 병상도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응급환자가 도착했을 때 비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 일까? 경증 환자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우, 응급환자를 항상 수용하기 위해서, 병상의 15%를 비워두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료인은 일정 간격으로 기존의 입원환자를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재평가하여 하급 의료기관으로 전원 시킬 권한을 가지며, 환자들은 의사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환자는 퇴원을 거부할 수 있지만, 거부이후에는 보험지원이 중단되고 자비로 입원비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 입원 병상은 오래전부터 공급과잉 상태이다. 필요한 것은 그 병상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응급환자가 들어갈 병상이 없다.
2. 지방 의료
KTX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의 대형병원에 방사선치료를 받기 위해 매일 서울로 2달간 출퇴근하는 환자를 본 적이 있다. 대구에도 같은 기종의 방사선치료기가 있고, 유능한 의료진이 있는데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지방 의과대학의 입학 정원을 크게 늘리고 지역별로 대형 병원을 건립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억원의 연봉을 제공해도 지방의료원에 의사가 없다고 언론에서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 저출산과 노령화로 지방소멸이 가시화되는 사회적 환경에서, 의료기관을 유지하기에는 환자가 부족한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또, 함께 일할 의료진이 구성되지 못하면, 기존의 의료기관조차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권역별로 의료제도를 운영하는 영국이 지역의료를 관리하는 원칙을 소개하면, 지방인 사우스햄프턴 지역에서 폐암으로 처음 진단된 경우, 주치의는 권역내 병원 중 폐암 수술이 가능한 병원 3곳을 소개해 주고 환자가 선택하게 한다. 그런데, 환자가 런던에 있는 특정대학병원에서 수술 받기를 원한다면, 의뢰서는 작성해 주지만 보험에서 비용은 더이상 지원해주지 않는다. 자비로 수술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권역내의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더라도 성과는 동일할 수 있도록, 의료의 질 관리를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한다.
3. 의료비 증가
의료비의 지속적인 증가는 모든 나라의 고민이다. 이에 대한 대책 중 하나가 공제액 (deductible) 제도이다. 공제액 이하의 진료비가 발생하는 경증환자는 본인 부담으로 진료를 받아야 한다. 경증 환자의 의료기관 이용을 줄여, 재정을 중증 환자 진료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감감 무소식이다.
우리나라는 공급자를 통제해서 더 이상 새로운 의료대책이 나올 것이 없는 상황이다. 현재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들 중 다수는 소비자의 의료기관 이용 원칙을 바로잡음으로써 단기간 내에 개선될 수 있다. 하지만, 선거에서 다수의 표를 가진 소비자들에게 이러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정치인이 우리나라에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대신 소수집단인 의료인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다.
단기간의 지지율에 영합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수립해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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