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팔라시오 안달루즈(El Palacio Andaluz)에서 7시부터 시작되는 플라멩고 공연을 보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이곳은 플라멩코를 무대공연으로 발전시켜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기 때문에 주차가 어렵다고 했다. 공연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갔다.
가이드에 따르면 스페인 어디에서도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은 집시들이 처음 플라멩코를 추던 동굴처럼 좁은 장소에서 공연한다고 한다. 그런 장소에서는 가까이에서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강렬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비야에서는 플라멩코를 무대예술로 발전시켜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플라멩코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공연장에 도착하자 미리 예약한 좌석으로 안내한다. 식사를 하지 않고 공연만 관람하는 우리들의 좌석은 무대 가까이였는데, 자리에 앉자 잠시 뒤에 상그리아를 한 잔씩 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저녁에는 상그리아를 맛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그리아는 와인을 기본으로 하고 과일과 탄산수 그리고 오렌지주스를 섞어서 하루 정도 숙성한 다음 마신다. 재료로 들어가는 과일의 풍부한 향과 달콤한 맛으로 알코올음료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시에 막이 오른 무대에는 노래를 하는 3명의 가수와 역시 3명의 기타리스트들이 무대 뒤편의 가운데에 자리한다. 그리고 좌우로는 주역을 맡은 무용수를 응원하는 역할을 하는 무용수 두 쌍이 각각 앉았다. 무대의 전면은 플라멩코 무용수들이 춤추는 공간이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플라멩코의 유래와 플라멩코를 즐기는 방법, 엘 플라시오 안달루스에서 활동하는 무용수들에 관한 이야기, 레파토리가 끝났을 때 무용수를 격려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무대를 격렬하게 두드리는 발놀림이 눈길을 끌지만 묘하게 움직이는 손놀림이 시선을 붙든다. 하지만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춤추는 사람들의 표정이다. 기쁨을 표현할 때는 한껏 밝은 미소를, 슬픔을 표현할 때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연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인지 막상 춤이 끝났을 때는 "올레!"하는 추임새를 넣기가 망설여진다.
스페인을 다녀와서 우연히 읽게 된 '플라멩코로 타오르다'를 먼저 읽었더라면 엘 플라시오 안달루즈의 플라멩코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플라멩코로 타오르다'는 스페인을 여행하다 우연히 본 플라멩코에 홀려 3년이 넘게 스페인을 왕복하면서 플라멩코를 배우고, 한국에 정통 플라멩코를 소개하는데 열정을 바치고 있는 오미경대표가 쓴 책이다.
플라멩코가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분명하게 어디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카디스, 헤레스 데 프론테라 그리고 세비야를 이는 삼각형 안 어딘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 플라멩코를 느끼려면 세비야로 가야 하는가 보다. 집시들이 시작했다는 이 춤을 왜 플라멩코라고 부르게 됐는지도 분명치 않다. 춤추는 모습이 플라밍고 새와 닮아서라거나, 안달루시아어로 '땅 없는 농민'을 뜻하는 '펠라 민 구에르 아드'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박정은, 스페인 소도시 여행 220-225쪽, 시공사, 2013년)
그래서 후안 디에고 마틴이 '혼도(Jondo)'에 적었다는 "플라멩코의 원천을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문화, 민족들이 이 플라멩코라는 춤을 서서히 변화시켜 왔고, 지금의 플라멩코는 여러 흔적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멩코는 하나의 움직임과도 같다.(오미경. 플라멩코로 타오르다 31쪽, 조선앤북, 2014년)"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름다운 무용수가 아름답게 추는 춤을 기대하고 갔던 그라나다의 집시동굴에서 처음 만난 플라멩코가 오미경을 두엔데(duende, 강렬한 춤을 통해 영혼의 폭발을 체험하는 순간)로 이끌었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미소는커녕 절망과 체념으로 응어리진 표정에 대충 만진 머리며, 균형이라고는 없는 무너진 몸매에 허름한 의상을 걸치고 춤추는 무용수들이 퀭하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뿜어내는 세상의 모든 비탄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플라멩코에 집시들의 애환이 진하게 스며든 것은 1749년 스페인의 페르난도왕이 집시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한 때부터라고 한다. 왕은 집시를 없애버리면 범죄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집시들의 언어, 옷차림 등 집시 특유의 문화가 모두 금지되었고 수천 명의 집시들이 감옥으로 끌려갔다. 19세기 무렵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들이 살고 있는 동굴의 앞마당에서 지친 하루를 달래고 집시의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기 위하여 춤을 추었던 것이 지금의 플라멩코로 발전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멩코 만큼 인간의 희노애락을 강하게 표출하는 춤은 없다"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춤을 추는 사람이 애절한 심정을 담아내는 플라멩코가 역설적이게도 보는 이의 내면에 쌓여 있는 고통을 풀어내고 영혼을 정화시키는 치유효과를 나타내면서 낙천적이고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 되었다.
처음에는 춤과 노래만으로 구성되던 플라멩코가 요즈음에는 춤(바일레, baile), 노래(칸테, cante), 기타연주(토케, toque) 그리고 손뼉치기(팔마스, palmas)가 어우러진 형태로 공연이 구성된다. 손뼉치기는 플라멩코 특유의 박절을 뿜어내는 동시에 리듬에 악센트를 주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플라멩코 기타로 연주하는 토케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춤공연 사이에 단독으로 연주하는 시간을 넣을 정도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플라멩코에서 칸테, 즉 노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적인 듯하다. 무용수가 삶의 애환을 춤에 담아내듯 가수 역시 삶의 고통을 노래에 담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켜켜이 쌓인 고통과 어둠, 절망, 슬픔 등을 담은 거친 목소리는 단순히 노래나 괴성이라기보다는 영혼을 흔드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우리 전통의 판소리에서 귀신의 울음소리같이 낸다는 창법을 말하는 귀곡성(鬼哭聲)에 비유하면 될까?
마지막으로 춤, 바일레는 자기 안에 있는 거친 에너지와 광기를 폭발시키거나, 심연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를 표현하듯 절절하게 녹여내는 것이므로 젊은 무용수들보다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깊이를 알수록 표현이 풍부해진다고 한다. 주름치마를 입고 발을 구르는 춤 정도로 알고 있던 플라멩코의 바일레에도 수많은 요소가 들어있는데, 오미경은 '플라멩코로 타오르다'에서 사진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먼저 손동작 마노(mano)는 팔동작 브라세오(braceo)와 함께 현란하게 펼쳐지면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손뼉치기 팔마스는 보는 사람들이 추임새로도 넣지만, 무용수도 춤에 곁들이기도 한다.
발 움직임은 스텝을 이르는 파소(passo)와 발동작 사파테아도(zapateado)로 구성되며, 발동작에는 구두 바닥 전체로 치는 골페(golpe), 뒤꿈치는 치는 타콘(tacon), 앞창을 치는 플란타(planta), 앞코를 치는 푼타(punta)가 있는데, 요란한 소리를 내는 사파테아토는 보는 이의 청각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몸동작으로는 회전을 하는 부엘타(vuelta) 그리고 격렬히 춤을 추다가 순간적으로 멈추는 데스프란데(desprande)가 있다.
특히 엘 플라시오 안달루즈에는 스페인 플라멩코 경연에서 상위권에 입상한 무용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고 한다. 카르멘에서 에밀리오 역을 한 남성무용수는 매해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미역을 한 여성 무용수 역시 좋은 표정연기와 현란한 춤솜씨를 보여 감동이었다. 치미를 연기한 무희는 적당하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분장으로 춤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고 하며, 주무용수가 공연하는 사이에는 신참들의 공연이 곁들여지는 것 같다.
그리고 잘생긴 기타리스트의 독주도 들을 수 있다. 기타연주는 물론 가수들이 읊조리듯 부르는 노래는 춤꾼들의 춤사위와 어우러져서 처연함을 더하거나 즐거움을 고조시켜주었다.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여성무용수의 몸매가 끝내줄 뿐 아니라 남성 무용수 역시 군살 하나 없이 쫙 빠졌다. 그토록 격렬하게 춤을 추니 살이 붙을 틈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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