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라면 누구나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태움'. 하지만 한 병원 내에서도 이러한 악습이 이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간호사 조직 내에서만 은밀하게 행해지기도 하지만 의사직 중심의 병원 구조 속에서 전공의 수련환경의 문제점에 가려져 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움으로 인해 고통받는 간호사들은 이직을 반복하며 인력난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으며 사직을 넘어 소송전을 벌이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더이상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외부의 도움없이 '태움'의 악습을 철폐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작게는 병원장이, 크게는 정부가 나서야 실타래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직과 사직으로 이어지는 '태움'…악순환의 연속
지난해 4월 청주지방법원은 간호사에 남을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 바로 '태움'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판결이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 A씨는 선배 간호사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며 법원을 찾았고 이러한 호소에 재판부는 A씨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다면 A씨는 어떠한 태움을 당했을까.
사건은 A씨가 동기 간호사들과 대화중에 선배 간호사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이 말이 돌고 돌아 결국 선배 간호사에게 전해졌고 그때부터 선배는 A씨를 본격적으로 태우기 시작했다.
이 선배 간호사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A씨를 집단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은밀하게 폭력행위까지 일어났다.
결국 A씨는 병원에 입사한지 10개월만에 사직해야 했고 고향인 청주로 돌아와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극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해당 병원과 선배 간호사에게 500만원을 배상할 것을 주문했다. 집단 괴롭힘으로 사직한 정황과 증거가 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소송으로 A씨는 간호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병원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 간호사로 낙인이 찍혀 그 어느 곳에서도 A씨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A씨는 극단적이나마 대응을 한 경우다. 대부분 간호사들은 태움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이직하거나 사직서를 내고 있다.
실제로 대한정신간호학회가 임상 간호사 161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60.9%의 간호사가 직장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답했다.
언제 괴롭힘을 당했냐는 질문에는 입사 후 1년 이내가 58%에 달했다. 신규 간호사에 대한 태움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누구에게 괴롭힘을 당했냐고 묻자 60%가 선배 간호사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이직을 고민했다는 응답도 절반이 넘었다. 태움으로 인한 이직이 실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B대학병원에서 파트장을 맡고 있는 간호사는 이에 대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매년 신규 간호사 정원이 늘어나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는 설명.
"대형병원들 보면 매년 수백명씩 신규 간호사를 뽑잖아요. 매년 그렇게 간호사를 늘릴 이유는 없죠. 절반은 1~2년차에 다 나가기 때문이에요. 일도 제대로 배우기 전에 나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태움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간호사도 있었다. 실제로 지난 2005년과 2006년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간호사 2명이 잇따라 자살했다.
고인이 된 그 간호사들은 모두 한마디씩을 남겼다고 한다. 선배 간호사들의 괴롭힘을 참을 수 없다고.
태움을 간호사 조직만의 규율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짚어봐야 할 것들이 많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부서장도 병원장도 난감한 해법…"큰 틀에서 개혁해야"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누구나 태움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으로 기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병원의 수장인 병원장들은 이를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문제라고 답한다. 간호부서의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다.
C대학병원 원장은 "사실 간호부는 대학병원에서 일종의 자치구라고 봐야 한다"며 "그들만의 문화와 자체적인 규율과 제도가 있어 함부로 터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태움과 같은 행위는 판단이 매우 주관적인데다 은밀하기까지한 그들만의 규율 아니느냐"며 "혹여 폭력 등 가혹행위가 일어난다거나 업무 방해 등의 눈에 보이는 문제가 도출되지 않는 이상 개입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털어놨다.
간호계에서는 간호인력 부족이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부족한 인력으로 병원을 지탱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신규 간호사를 교육하고 수련하면서 병원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은 현재 대학병원의 인력 구조에서 불가능하다는 지적인 셈이다.
D대학병원 간호부장은 "선진국에서 간호사 5명이 하는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신규 간호사 혼자 맡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업무가 가증되니 누구를 배려하고 챙길 여력이 없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신규 간호사건 10년차 간호사건 5~6인분의 역할을 못하면 누군가가 그 일을 떠맡게 되니 업무 능력이 부족한 신규들은 골칫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며 "태울려고 태우는게 아니라 업무를 떠맡게 되니 이를 다시 밀어내는 방어기전으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의견도 나온다. 수련제도를 비롯해 우리나라 임상 현장이 다 뒤틀려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된 업무 프로세스가 없는 것이 이유라는 설명이다.
끝없이 대형화되는 대학병원들이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전공의에 대한 폭력과 폭언을 쉬쉬하며 넘어가듯 간호사들 또한 같은 상황이라는 것.
B대병원 간호파트장은 "제대로된 규정과 시스템이 없으니 의사는 의사대로,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자신들이 만든 프로세스와 규율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며 "그래야 우선 병원이 유지되니 의사결정권자들도 이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결국 이러한 시스템 부재가 태움이라는 이상한 기전을 불러온 것 아니겠느냐"며 "제대로 된 업무 프로세스와 시스템만 만들어도 자연스레 풀릴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태움을 단순히 간호사 조직내의 병폐로 여길 것이 아니라 보다 큰 틀에서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공의 특별법을 통해 뒤틀린 수련제도에 대한 개편을 본격화한 것처럼 간호법 제정 등의 방법을 통해 간호사의 업무와 역할을 정확히 명시하고 인력기준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대한간호협회 김옥수 회장은 "OECD 국가 평균 수준 이상으로 간호인력 기준을 개선하는 노력이 시급하다"며 "또한 간호법 제정을 통해 간호사의 업무와 역할을 법적으로 정확히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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