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의 천사가 백의의 전사가 되는 고된 우리나라의 의료환경속에서도 제2의 나이팅게일을 꿈꾸는 학생들은 늘어만 가고 있다.
그중 누군가는 그렇게 꿈을 이뤄 간호사 휘장을 달지만 막상 꿈꾸던 병원에 들어왔을때 녹록하지 않은 현실은 그들을 눈물짓게 하고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새롭게 만나는 수많은 환자들의 응원으로 새롭게 힘을 얻기도, 함께 하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의료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다잡기도 하는 곳이 바로 간호부다.
그렇게 희노애락이 얽혀가는 대학병원에 첫 발을 딛은 신규 간호사는 과연 어떠한 고민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그렇다면 20년을 넘게 대학병원이라는 전쟁터를 헤쳐온 베테랑 선배 간호사는 이들의 고민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래서 준비했다. 1998년 삼성서울병원에 첫 발을 딛어 올해로 20년차에 접어든 안과 허수경 간호사와 2017년 막내로 병원에 첫발을 딛은 박채정 신규 간호사의 만남이다.
자칫 서먹하고 어색할 수 있는 만남에도 자칭 안과의 '분위기 메이커'라는 당찬 신규 간호사와 자칭 '관계의 달인'이라는 수석 간호사와의 만남은 무려 3시간을 넘겼다.
독자들을 위해 그 긴 시간의 대화를 압축 또 압축해 풀어본다. 아마 우리의 신규 간호사의, 우리의 수석 간호사의 허심탄회한 마음들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성장하고 있을까요?" "그 질문은 20년이 지나도 여전하단다"
박채정 간호사(2017년 입사): 졸업반일 때는 당장이라도 임상에 나설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간호실습을 나오면서 그 자신감이 무너졌고 병원에 들어오면서 더더욱 그랬어요. 나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있나 하는 생각들이 하루하루 이어졌죠. 이제는 그나마 사람구실을 하지만(추임새:물론 지금도 모자라요ㅠㅠ) 불과 몇달 전만해도 0.5인분도 못했던거 같아요.
허수경 간호사(1998년 입사): 당연히 그렇지. 내가 올해로 20년차를 맞았지만 지금도 내가 있었던 부서가 아닌 곳에 가면 나도 한동안은 1인분을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걸.
그건 비단 신규만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곳에 떨어지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아닐까?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모든 직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새로운 환경에서의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랄까. 결국 시간이 필요한 거지. 그래서 그런 고민이 들때면 난 늘 같은 말을 되뇌였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박채정: 어찌 보면 비슷한 고민이기도 한데 이제는 '성장'이라는 고민이 생겼어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아쉬운 제가 과연 지금 성장을 하고 있을까? 하는 부분이요. 1년이 지났는데 과연 1년의 시간으로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래서 혹시 1년이 더 지났는데도 모자라면 어쩌지? 3년이 지나면? 하는 고민이요. 어서 빨리 성장해서 환자에게도 선배님들에게도 든든한 간호사가 돼야 할텐데요.
허수경: 사실 그 고민은 간호사라면 누구나 안고 있는 부분 같아. 의사를 예로 들면 의사면허를 따고 전공의 1년차, 2년차 이렇게 착착 올라가는 코스가 있잖아. 4년차가 되면 치프가 되고. 하지만 간호사는 그런 것들이 없으니 막연하지. 내가 2년차 간호사의 역할을 하고 있나? 5년차 역할을 하고 있나? 수없이 되돌아 볼수 밖에 없어. 나도 여기서 20년을 보냈지만 여전히 그 고민은 안고 있는걸.
그렇기에 중장기적인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전문간호사 자격, 대학원 진학 등의 목표를 삼아가며 내 나름대로 성장의 척도를 계획했었어.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 후배들에게도 조언하는 부분이고.
"무엇부터 해야할지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돼요""결국 핵심은 사람이더라"
박채정: 처음 병원에 와서 고민했던 부분 중 또 하나가 인간관계였던 것 같아요. 저는 여기가 처음이지만 선배님들은 이미 3~5년간 함께 하셨던 분들이잖아요. 어떻게 그분들 속으로 들어갈까 고민이 많았죠.
궁여지책으로 저는 그래서 수첩을 활용했어요. 이 선배님은 이런걸 좋아하시고 이 부분에 예민하시고 이 선배님은 이렇고 하는 식으로 매일매일 메모하고 주의하고 맞춰보려고 애썼죠. 계속해서 인사드리고 카카오톡 등을 통해서 연락드리고요. 그래서 요즘은 좀 예뻐해 주시는 것도 같고 그래요.(웃음)
허수경: 그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 어떻게 그걸 알았지?(웃음) 결국 핵심은 사람이거든. 특히 병원이라는 조직 자체가 그런 것 같아. 그래서 나도 후배들에게 늘 얘기하는 부분이 그거야. 자세히 사람을 살펴보면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가 보인다는 거지. 사람마다 같은 상황에도 반응하는 것이 다르잖아.
예를 들어 나는 예의없는 행동에 가장 큰 화가 나거든. 하지만 동기들을 보면 후배들이 공부를 안했을때 화를 내는 경우도 있어. 나는 머리보다는 예의가. 그 친구는 예의보다는 실력이 우선인거지.
가장 중요한 건 선배들고 환자들도 사람이라는 거야. 반대로 그들도 박 간호사를 대하는 것이 힘들수 있다는 거지. 혹시 그러한 부분들이 힘들다면 믿고 따르는 선배들을 찾아 조언을 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누구나 고민했던 부분들이니까 각자의 노하우들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
박채정: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도 늘 가지고 있어요. 스테이션이 차곡차곡 일이 오지는 않잖아요. 일이 쏟아질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 하는 부분이요.
그래도 저는 프리셉터(3~5년차 간호사로 신규 간호사들의 교육을 맡는다) 선생님과 파트장님을 너무 좋은 분을 만나서 많이 여쭤보고 조언도 얻지만 그래도 어려운건 사실이거든요. 다들 너무 바쁘시니 질문하기도 참 어려운 부분이 있고요. 언제까지 계속 여쭤보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허수경: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다른 것보다 나랑 잘 맞는 선배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해. 이건 꼭, 반드시,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야. 아무리 일 잘하고 똑똑한 간호사라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거든. 누군가 한명에게는 진심으로 조언을 받고 심리적으로도 위로를 받고 해야 버틸 수 있어.
보통의 경우는 프리셉터가 그런 역할을 하지. 그래서 좋은 프리셉터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 내가 신규일때 프리셉터 선생님이 아주 무서웠거든. 하루는 환자 앞에서 호되게 혼이 났는데 그후로 환자들이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 느껴지는 거야. 그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로 남았었어.
그래도 박 간호사는 좋은 멘토들을 만난 것 같아 다행인 것 같아. 선배들을 보며 많이 공부해. 나중에 가면 내가 신규일때 했던 고민들이 경험이 되거든. 혹여 욕을 먹고 무시를 당했다 해도 그걸 감정으로 기억하지 말고 교훈으로 남겨 후에 후배들에게 그 교훈을 넘겨줄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선배가 되겠지.
"동기, 후배에게 어떠한 모습일지 두려워요""흘린 눈물만큼 성장해"
박채정: 어느덧 1년이 지나 이제 몇달 뒤면 후배 간호사가 들어와요. 아직 저는 신규 간호사 티를 못 벗은 것 같은데요.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여질지 궁금하고 두려워요. 경쟁이라기 보다는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죠. 옆 병동 신규 간호사와 비교되지 않을까. 후배가 갑자기 나보다 잘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죠.
특히 같은 병동에 '슈퍼 신규'라고 불렸던 전설의 학교 선배가 있는 것도 사실 든든하기도 하지만 부담도 되요. 선배는 저렇게 월등한데 후배는 왜이래? 하는 말을 들을까봐(웃음).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속에 늘 그 두려움은 여전한 것 같아요.
허수경: 사람이다 보니 늘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간호사는 홀수년마다 슬럼프에 빠진다고 해. 1년차에는 너무 힘들고 두려워서, 3년차에는 이제 몸에 익으니까 반복되는 일상으로, 5년차에는 이걸 내가 평생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말이지.
중요한 것은 늘 겸손하게 노력하는 자세라고 봐. 그리고 나의 장점을 찾아내는 일이지. 그 어느 사람도, 그 어느 간호사도 누군가에 비해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믿어. 본인의 그 재능을 믿는다면 지금의 그 걱정은 어느 정도 사라지지 않을까?
20년차인 지금도 슬럼프에 빠지고 매일매일 고민을 해. 나는 어느 정도인가. 나는 잘하고 있는가 하면서. 그 모든 것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그 과정에서 고민한 시간만큼, 그 속에서 흘린 눈물만큼 더 빠르게 성장할꺼야. 믿으라고. 자신을 그리고 동료를.
박채정: 그래서인지 저도 최근에는 목표를 세우기 시작했어요. 우선 저 혼자서도 스테이션을 지킬 수 있는 한명의 간호사가 되는 것이 목표에요. 선배님들은 주말에 홀로 지키시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아직 못하거든요. 간호사만큼 평생 공부를 해야하는 직업이 없는 것 같아요. 병동마다 환자마다 너무나 많은 지식들이 필요하니까요.
최근에 모교에 와서 선배 간호사와의 만남식의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어요. 사실 이게 학생때 꿈이었거든요. 간호사가 되서 후배들을 끌어주는 것 말이죠. 삼성서울병원에 제 롤모델들이 너무나 많아요. 너무 멋지고 훌륭한 선배님들이 많아서요. 허수경 선생님도 정말 대단해요. 결혼과 출산, 육아의 허들을 넘고 여기에 서셨잖아요.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신규 간호사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에요.
허수경: 나도 그랬어. 내가 한명의 간호사로 설 수 있을까.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낳고도 일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최근에 외래 파트로 옮긴 후에는 과연 내가 환자들을 교육할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하지만 정답은 없는 것 같아. 누가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결국 다른 것이거든. 세상에 같은 인생이 어디 있겠어. 환자들을 봐봐. 코 앞까지 닥쳐진 죽음 앞에서도 이를 이겨내고 또 세상으로 나아가잖아. 우리도 그래야겠지. 당장 한치앞이 두렵고 무섭고 때로는 울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같이 한발짝씩 앞으로 가보자. 그렇게 박 간호사가 나를 믿고 내가 박 간호사를 믿고 같이 격려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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