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를 꼽으라면 역시 지난주 시행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일 것이다.
한때 신조어처럼 여겨졌던 '갑질'은 이제 국어사전에도 올라갈 만큼 전 국민이 인식하는 단어가 됐고 종국에는 속칭 갑질 방지를 위한 법안까지 시행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료계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관행이라는 단어로 하얀거탑안에서만 회자되던 악습들은 몇 년전부터 수면 위로 올라서기 시작됐고 그들만의 은어였던 태움은 이제 의료계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단어가 된지 오래다.
그만큼 의료계도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 일명 갑질 방지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듯 하다.
노동조합들은 잇따라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고 각 병원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메뉴얼을 제작하며 이에 대비하고 있다.
이제 시행된지 일주일여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발빠른 병원들은 벌써부터 메뉴얼을 만들어 대외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고 다양하고 특색있는 구호를 만들어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의료원장으로 비롯되는 의료기관의 최고 책임자와 보직자, 원로 교수들, 이들과 함께 나란히 선 막내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이 밝게 웃으며 갑질 퇴치를 외치는 모습은 누가봐도 아름답다.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알지 못하면 말이다.
그 아름다운 사진과 구호, 캠페인 일정과 일주일만에 뚝딱 튀어나온 갑질 방지 메뉴얼은 어느 곳에서 나왔을까. 그렇다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막내들의 손에서 나왔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법안인데 그들은 되려 손사래를 친다. 메뉴얼을 만들고 선포식을 진행하고 이를 전 병동과 부서에 전달하고 추후에 진행 상황을 점검해 보고서를 만드는 것까지 오히려 일이 늘었다며 하소연이다.
들여다보면 법안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이를 의료기관에 적용하면 절차가 다음과 같다.
의사를 예로 들면 전공의가 부교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병원장에게 이를 신고하게 된다. 이후 병원장은 이 둘을 분리해 배치한 뒤 원내 메뉴얼에 따라 징계 등을 논의하게 된다. 전공의든 부교수든 누구 한명은 다른 진료과로 가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이 법안은 고인이 된 간호사들의 태움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데서 시작됐다. 이로 인해 처음 발의된 법안의 명칭도 태움 방지법이었다. 하지만 법안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사이 덩어리는 커졌지만 그 알맹이는 사라졌다.
전공의들을 향한 폭언과 폭행, 간호사회의 태움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태움 신고센터부터 전담반 설치, 수없이 진행된 캠페인과 구호가 지나간 뒤 남은 것은 또 다른 피해자들 뿐이었다.
변화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한다. 매번 이름을 바꿔가며 나오는 법안과 각 병원이 쏟아내는 구호와 캠페인이 공염불에 그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괴롭힘 없는 더 좋은 직장을 만들기 위해 구호와 캠페인을 만들라며 의사, 간호사,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문화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구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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