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면 오전 9시가 좀 넘어가고 있다. '도대체 대면 강의하던 시절 선배들은 어떻게 9시까지 강의실에 가서 수업을 들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졸린 눈을 비비고는 기숙사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편다. 하루 종일 방에 구어박혀 노박이(한곳에 붙박이로 있는 사람. 충청 지방 방언)로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는 코로나 시대의 의대생에게, 이 책상은 강의실이요 도서관이요 세상의 창이다.
첫 번째 강의를 틀고 업로드된 강의록을 펼치자, 세 자리 숫자의 페이지 수를 자랑하는 크고 아름다운 분량의 PPT가 나를 반겨준다. 혹시나 중간중간에 강조 표시가 있지는 않을까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강의록을 쭉쭉 훑어보지만, 끝없는 글과 그림의 향연만이 있을 뿐이다.
벌써부터 심사가 울민해진 나는 강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영상 속에는 나처럼 노트북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이크에 대고 어색한 듯 입을 떼는 교수님이 보인다. "네, 여러분,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코비드 나인틴 사태로 인해…" 앗, 잠깐, 코로나가 터진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갑작스러운'이라고?
작년 강의 재탕의 냄새를 맡은 나는 빠르게 선배들로부터 받은 작년 필기를 뒤져 같은 교수님의 강의록을 찾아내 펼쳐 본다. 역시,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작년 필기 내용과 올해 수업 내용이 일치한다. 무지막지한 양을 모조리 읽어 놓고는, 마지막에 "비록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느라…"라는 의례적인 수습용 멘트를 덧붙이는 것까지 완벽히 작년 강의와 똑같다. 부디 강의가 똑같은 만큼 시험문제도 작년과 똑같길 바라며, 나는 재빨리 다음 강의의 재생 버튼을 클릭한다.
COVID-19 시대, 본과 2학년으로서 나의 일과 중 일부를 약간의 조미료를 쳐서 다소 익살스럽게 재구성해 보았다. 비대면 수업을 시작한 지 2년차에 접어들며 작년과 비교해 생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작년과 동일한 강의가 업로드(일명 재탕)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위와 같이 아예 똑같은 강의가 올라오기도 하고, 때로는 강의 중 일부만 새롭게 촬영한 영상이 올라오기도 한다. 이제는 방에 홀로 앉아 헤드셋을 쓰고 강의를 듣는 데 익숙해지다 못해 이골이 난 2021년의 의대생과, 아직 바뀌어버린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대면 강의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2020년의 교수님이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이 진풍경은 COVID-19로 인해 변해버린 의과대학의 교육환경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강의 재탕을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의대생들에게 가르칠 기초 수준의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을 텐데, 한 번 제대로 찍어서 여러 번 활용하고 필요한 부분만 조금씩 보충/수정하면 얼마나 경제적이고 효율적일 것인가? MIT와 같은 곳에서는 아예 유튜브에 MIT OpenCourseWare이라는 채널을 운영하여, 몇 년 전에 촬영된 강의들을 일반 대중들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들을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
다만 수업을 듣는 학생 입장에서 한 가지 주제넘게 바라는 게 있다면, 한 번 강의를 찍을 때 '잘' 찍었으면 한다. 수많은 교수님의 강의들을 듣다 보면 정말 이해가 쏙쏙 되는 강의도 있지만, 가끔 워드 파일을 그대로 PPT로 만들어 읽고 있는 듯한 강의, 지엽적인 부분을 설명하느라 한참 시간을 쓰고는 뒷부분에 시간이 모자라 정작 중요한 부분은 후다닥 수박겉핥기로 넘어가는 강의도 있다.
물론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시고 바쁘신 시간을 쪼개어 강의를 하시느라 그러신 줄은 알고 있으나, 솔직한 말로 이런 강의는 듣고 나도 도대체 뭘 들은 것인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껏 열심히 강의하신 교수님도 손해고, 강의를 다 들어 놓고 또 따로 교과서와 논문을 찾아봐야 하는 학생도 손해가 아닌가. 적어도 중요한 부분은 중요하다고 강조해주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확실히 설명을 해 주는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COVID-19 사태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마무리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그에 따라 지금과 같은 온라인 강의 체제도 장기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나중에 다시 대면 수업이 가능해진 뒤에도, 이렇게 수고해서 찍어 놓은 양질의 강의들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처음 강의를 찍을 때 여러 번 쓸 생각으로 조금만 더 공을 들여 잘 찍은 뒤 몇 번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이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강의 재활용이라면 적극 찬성한다.
COVID-19으로 인해 온라인 수업으로 부득이하게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된 이 상황을, 오히려 교수님들의 수고는 덜고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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