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문학의 경사와도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최초의 수상이며, 21세기 수상 작가 중 최연소로 이룬 쾌거이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곧장 대한민국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각종 서점 사이트에서는 접속량 초과로 인해 마치 티켓 예매 사이트처럼 접속 대기 순번이 부여되는 진귀한 현상이 발생했고, 항상 다음날 오던 택배는 며칠간 받아볼 수 없었다. 각종 서점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기 위한 '오픈런'이 성행하기도 했다.
본 적 없는 광경이 생경했지만, 불편하다거나 언짢은 감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치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 것 같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독서 열풍'을 단지 '과시용 독서'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있었다. 몇몇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를 풍자하는 방송까지 진행했을 정도이니, 결코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과시용 독서'가 비판받아야 하는 주제일까? 정말로 본래의 목적이 뚜렷하지 못한 독서는 공허하기만 한 것일까?
비록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독서를 시작하더라도, 책을 읽는 내 모습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든다면, 자연스레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올라간다. 처음의 목적이나 본심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닉 채터 교수의 저서 『생각한다는 착각』(김문주 옮김, 웨일북, 2021)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인간은 즉흥적인 경험으로 만들어질 뿐인' 것이다. 우리는 즉흥적인 경험을 내면화하여 이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에 탁월한 동물이다.
원래부터 쓰인 이야기 같은 것은 없으므로,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주저하기보다는 이루고자 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이야기를 새롭게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그 바깥의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은 마치 높은 담장을 넘어가는 것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나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있어서도 독서는 아주 훌륭한 사다리가 되어준다.
독서, 그 중에서도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은 그 자체로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지 위에 건설된 수많은 세상을 탐험하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시간대의, 다른 세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는 원래부터 정해진 세계의 틀 같은 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흔히들 세상은 이미 쓰인 이야기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공적인 시나리오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이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새로 쓰이고 있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마치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모두를 놀라게 했지만, 수상 이후 그동안의 수많은 작품이 재조명되면서 '애초부터 예정되어 있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당장 기존의 이야기를 모조리 부정하거나 바꾸는 일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또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가능성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펜을 쥐고 이야기를 만들어 갈 작가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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