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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단국의대 3학년 박정은
발행날짜: 2025-02-03 05:00:00

단국대학교 의대 본과 3학년 박정은

낯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상념들이 출렁인다. 그런 날은 허공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돌곤 한다. 그날 내가 그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발자국을 통해 길바닥에 생각들을 배수하는 이 귀갓길 의식 덕분이었다.

겨울을 맞은 나무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잎과 색 같은 요소들을 계절에게 전부 빼앗기고, 획일적인 흑갈빛 껍질만을 두른 채 겨울 풍경의 소품이 된다. 시각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무개성 속에서 돌연 한 그루의 나무가 나의 초점을 되찾게 했다.

바짝 마른 제 껍질을 찢고 그 틈으로 새 가지를 살뜰하게 밀어 올리고 있는 나무였다. 보기만 해도 아파서, '으' 하는 침음을 나도 몰래 삼켰다. 치열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고 느낄 만큼 전형을 벗어난 형태였다. 하지만 내게는 겨울날에 막 터진 꽃망울이라는 환상 같기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무에게서 나를 보았다. 안온하면서 고루했던 몇 겹의 겉껍질들을 나 역시 올해 뚫고 나왔다. 의술이 직업적 책무의 전부인 줄 알던 순진한 편협함을 깨고 나온 일이 시작이었다.

이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몹시 신중했던 성향에서 세상과 융화하는 표면적을 넓힌 일, 사람과 집단에 대해 '헤어질 결심'을 한 일, 변화와 가능성을 유쾌한 가벼움으로 맞이하기로 결심하고 두 번의 이사를 혼자서 해낸 일까지. 작고 뒤틀린 껍질과 비판적 사고 없이 받아들였던 세상의 기본값을 나도 나무처럼 하나씩 분쇄했다.

이 파열의 과정 자체는 내게 고스란히 희락이었다. 백지상태의 아이가 세상을 환희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책상이 없는 사회의 다른 분야에 무지했던 나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 AI를 비롯한 테크, 창업, 경제, 사회, 디자인, 코딩 등 배우고 알아서 나를 채울 수 있는 분야가 너무 많았다. 그 사실에 가슴이 뛰고 눈이 반짝였다.

어릴 적 처음 도서관에 간 날, 000 총류 서가부터 900 역사 책장까지 모두 읽어야지 다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의 설렘과 열의가 다시 피어오른 듯했다. 분야를 막론한 지식들을 흡수했고 새로운 경험과 체험을 허겁지겁 삼켰다.

해커톤, 스타트업 PM, 랩 인턴, 각종 세미나와 박람회 등 사회의 다양한 지형을 주체적으로 탐색하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을 희락보다 섬세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없었다. 확장하는 시야를 알아채는 일은 '희'를, 미지에 가지를 뻗는 행위는 '락'을 주어 나를 전율케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삶이 생동했고 재밌었다. 나는 경험의 총량이 개인의 성장 정도를 결정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올해 내가 한 경험은 그 수만큼 나를 성장시킬 것이었고, 이런 나의 믿음은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며 더 열정적으로 경험을 찾아 나서게 했다.

하지만 연말이 되자 나는 이 믿음을 폐기해야 할 혼란에 처했다. 다양한 경험보다 하나의 경험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게 정답이었을까? 경험의 연속에서 깊이를 백안시한 적은 없지만, 매끈한 완결성을 가진 단일 경험이 조잡한 이음매를 가진 다수의 경험보다 좋은 선택 같았다. 한 분야에서 쌓아 올린 경험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복리효과를 내곤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분야의 경험들은 때때로 너무 낯설어서, 경험의 주인인 나조차도 가끔 가지들을 연결하는 서사를 상기해야 했다. 그 밤, 걸음을 늘어뜨려 나를 나무 앞에 서게 한 고민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들 사이 연속성을 헐겁게 느꼈고, 가지를 뻗을 수 있는 수많은 방식 중 나의 것이 최적이었는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매섭게 뺨을 때리는 바람을 무시하고 오래 나무를 올려다봤다. 볼이 얼얼해질 즈음, 읽고 있던 소설에서 모티프가 되는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상념의 굴레에 빠진 나를 보다 못한 나무가 열쇠를 떨어뜨려 준 것 같았다. 그렇다. 하물며 내 앞에 굳건하게 서있는 이 나무도 제 선택이 최선인지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곧고 높게 뻗은 그의 가지는 봄볕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축복이 될 수도, 장마철 강풍의 첫 번째 시험대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내린 선택이 정답인지, 최선인지, 가장 큰 보상을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삶은 예측 불가능할뿐더러, 잭슨 폴록이 흩뿌리는 물감처럼 무질서한 궤적을 그려내는 삶을 우리는 오직 한 번 살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 속을 헤매는 대신, 앞으로 나는 포착에 집중해 순간을 풍성하게 만들어보려 한다. 포착에 대한 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험과 거리를 두며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태도를 버리고, 모든 경험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희락 같은 감정을 날카롭게 느끼고 발견하는 일'

이는 경험을 하나의 논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다. 경험 고유의 빛과 결은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되며, 오직 그 안에서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개성 강한 경험들 사이 마찰을 줄이고, 지나간 경험과 다가올 경험을 더 편안하게 소화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결심의 기념으로 내가 포착한 나무의 분투를 찍어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삼았다. 그의 격렬한 의지로 탄생한 앙상한 가지뿐만 아니라, 녹음의 풍성한 머리채, 여름 햇살에 몽땅 타 빨갛고 바삭 거리는 머리칼, 흰 가발을 쓴 나무의 민머리 등 나무의 여러 모습이 앞으로 나의 사진첩에 가득 포착될 것 같다고 예감하며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칼럼에 등장하는 소설 속 문장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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