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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는 당신이 있다

단국의대 1학년 유우선
발행날짜: 2025-05-12 05:00:00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1학년 유우선
투비닥터 편집팀

9호선 급행 열차는 늘 사람이 많다. 고속터미널역에서 9호선 열차를 탈 때면 헙, 하고 숨을 한 번 들이키는 식의 각오와 함께 몸을 실을 정도다. 1월 초의 어느 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열차는 만원이었고, 나는 간신히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9호선에 몸을 실었다.

기우뚱 몸을 세우자, 내 바로 앞 좌석에서 조그마한 아기가 엄마의 무릎에서 방싯방싯 웃고 있었다. 이렇게 예쁜 아기 앞에 서 있다니 오늘은 행운이네, 생각했다. 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가장 즐겨 듣는 노래. 왠지 오늘의 9호선 여정은 금방 지나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어팟을 뚫고 날카로운 외침이 들린 것은 그 예감이 든 직후였다.

"국민 여러분! 광주 사태에 속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다음에는 '광주 사태'라는 말에 광주에서 무슨 사고가 났나 덜컥 겁이 났다. 광주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목포로 이사를 간 10대 시절에도 툭하면 놀러 다니던 이웃 도시였다.

여전히 부모님은 주말마다 광주를 찾으시고, 내 친구들도 광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고함이 터질 만한 일이 대체 무엇일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즉각 뉴스 앱을 켜려고 서둘러 음악을 멈췄다. 그러자마자 즉각 더 날카로운 고함이 귀에 내리꽂혔고, 나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여러분은 지금 다들 속고 계신 겁니다! 5·18은 민주화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도입니다! 죄다 간첩들입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고함의 근원지를 눈으로 좇았다. 희끗한 머리를 질끈 동여맨 중년의 여자가 내 옆에서 위의 문장을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하철 칸 내에서 그녀를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자는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쳐들고 지껄였다.

"폭도, 그래, 폭도들이라고. 그것도 모르면서 당신들은 나를 미친 인간이라고 부르지? 여러분, 지금 뜨끈뜨끈하게 보일러 틀고 사시지요? 나는 말이야, 보일러도 틀고 살지 않아! 관리사무소가 간첩들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이지. 간첩, 간첩 투성이야! 사기꾼, 폭도, 간첩!"

아, 그 여자를 무어라고 지칭하면 좋을까. 대충은 알았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것. 이들은 유튜브에도, 뉴스 댓글창에도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칭하고, 1980년 목숨을 잃은 광주의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았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폭도'라며 고함을 내지르는 이를 목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여자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보다 못한 젊은 남자가 조용히 하시라고, 신고하겠다고 말을 꺼냈으나, 그녀는 신고라는 말에 더욱 흥분했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동작역이 목적지였는지(용산에 가려고 했던 걸까?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방 내렸다. 내리는 순간까지도 내 건너편에 서 있는 중학생 소년들에게 너희는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해, 하며 삿대질하던 그녀를 나는 지하철 문이 닫힐 때까지 똑바로 응시했다.

그 후에도 나는 오래 음악을 다시 틀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 대다수는 신기한 구경을 했다 생각했는지 일행과 속닥거리고,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웃지 않는 아기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는 별로 웃기지가 않았는데, 아기도 그런 모양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모든 사람들이 5·18 민주화 운동이 내가 배운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대학에 입학해 고향인 전라남도를 떠난 직후에 깨달았다. 5월이 이렇게나 조용하게 지나간 것이 처음이었다. 나의 5월은 늘 바빴고 다채로웠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5월이면 늘 행사가 가득했다. 5·18 민주화 운동 기념 영상을 시청하고, 민주화를 주제로 하는 백일장에 참여하고, 5·18 민주화 운동 기념 공원으로 소풍을 가고. 그 5월은 마치 다른 세상의 시간인 양, 대학 입학 첫해의 5월 18일은 너무도 평범했다. 추모 행사도 기념 활동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문제 삼는 사람도 없었다.

하기야, 나도 수많은 행사를 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해 대단히 깊이 고민하거나, 역사 속에 희생된 시민들을 떠올리며 처절하게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나에게도 그 일은 그냥 교과서와 영상 자료가 반복적으로 읊는 역사 속 사건일 뿐이었으며, 먼 과거의 시간에 존재하던 타인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나는 내가 태어난 고장에서 벌어진 사건이니까 행하던 당연한 관습이 끝이 났구나, 하고 결론내렸고, 고요한 18일의 위화감은 금세 해소되었다.

그러나 2024년 12월의 3일, 해소된 줄 알았던 위화감은 섬뜩한 환영이 덧씌워진 채로 내게 엄습했다. 유리창이 깨진 국회의사당, 무장한 군인, 울부짖는 시민들이 생중계되는 화면은 끔찍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 그토록 보았던 5·18 민주화 운동 다큐, 역사책 하단에 삽입된 폐허가 된 광주의 사진이 화면과 겹쳤다.

그 잔혹한 친숙함 하에서 우리 가족은 분주히 서로의 안위를 확인했다. 누군들 그 비상식적인 사태에 그러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12월에 나는 유별나게 부모님께 자주 연락했고 부모님 역시 일가친척들에게 여느 때보다 자주 연락하셨다.

1980년 광주의 군인이셨던 외삼촌 할아버지는 극도의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다시금 떠올리시곤 일주일을 앓아누우셨고, 외할머니는 몇 번이고 그 해에 외할아버지가 광주에 가지 못하게 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훔치셨다. 12월 3일은 독극물처럼 우리 가족 사이에 퍼져 있었다.

한 가지 또 인상적인 점은, 우리 가족은 그 독극물에 지지 않으려 바득바득 반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로 뭉쳤다. 주말마다 목포 평화 광장에 집결한 시위 사진이 분노에 찬 활자와 함께 가족 단톡방에 올라왔다. 할머니와 가족들은 광주 음악 분수 앞에 모여 민주화를 갈구하는 표어가 적힌 플래카드를 자랑스러워했다. 생전 왕래하지 않던 친척과도 얼굴을 마주하고 연락을 하며 서로의 마음과 기억을 살폈다.

그리고 비로소 9호선에서 '광주 사태'라며 무자비하게 고함을 지르는 여자를 마주하고서야 나는 12월 3일이 내 주변에서 선명한 족적이 된 이유를 정확히 깨달았다. 나의 윗세대는 경험했고, 나는 교육받은 1980년의 역사가 2024년의 우리와 맞닿아 잔혹한 이야기로 흐르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 여자가 나간 9호선에 흐르던 가벼운 키들거림은 내게 더 이상 해소되지 못할 정도로 커진 위화감을 부풀렸다.

5·18 민주화 운동은 더 이상 어느 지역의 관습으로, 납작한 교과서 속 활자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었다. 미약하게만 느껴지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 그로부터 기인하는 공포와 절망이, 다시 그것으로부터 쌓아 올리는 결의가 현 상황에 필요할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 길로 나는 5·18 민주화 운동을 짚어 나갔다. 역사책을 탐독했고 어린 시절 보았던 다큐를 다시 시청했으며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광주에 가서 5·18 민주화 운동의 전시관으로 쓰이는 전일빌딩에 방문했다. 전일빌딩에 오래 서서 당시 시민들의 사진과 일기, 영상과 보고서를 읽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이 생경하게 피부에 다가왔다.

무장한 군인들의 얼굴은 어느 순간 나의 외삼촌 할아버지 같았고, 피 흘리며 쓰러지는 여자는 엄마 같았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행진하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꼭 나와 같았다. 전시된 모든 화면의 모습이 12월 3일 생중계되고 보도되던 그 화면과 꼭 같았다. 2024년 12월과 1980년 5월은 한 겹으로 포개져 내가 서 있는 시간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나는 1980년에 서 있었다.

그리고 1980년 5월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신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현재를 살아가는 당신 역시 그 시대에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남의 것으로만 생각했던 역사의 아픔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라는 것. 멀게만 생각했던 역사의 흐름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물결과 매우 유사한 모양새라는 것. 역사는 당사자성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역사와 주변인에 관심을 갖고 현상에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며 멈추지 않고 개선해야 한다. 나아가려는 투지를 가져야 한다. 역사의 위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소리도, 타인을 위한다는 도덕적인 명분도 아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단 한 가지 이유에서 기인하는 제안이다.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현재를 위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쟁취하는 결의를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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