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푸생의 비너스와 머큐리는 고전 신화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조화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비너스(아프로디테)와 머큐리(헤르메스)는 황금마차 옆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다. 이 그림에서 비너스는 감성과 미, 사랑과 본능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머큐리는 이성과 언어, 예술과 지성의 상징으로 대비되고 있다. 이러한 두 인물을 나란히 그림으로써 푸생이 추구한 고전주의 이상 다시 말해 조화와 질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비너스는 이상화된 여성미와 육체적 아름다움을 지닌 신으로 표현되며, 그녀의 주변에 등장하는 장미, 거울, 비둘기 등은 사랑의 본능성과 그 유희적 속성을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반면 머큐리는 날개 달린 샌들과 카두세우스를 통해 지성과 소통의 신으로 표현되며, 발치에 놓인 류트, 악보, 책, 그리고 화가의 팔레트는 예술을 상징하고 있다.
푸생은 이 대비를 통해 삶 속에서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회화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신의 대비는 단순한 신화적 병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합적 긴장과 균형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구조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두 신의 자식인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us)를 상상적으로 작품에 연결시켜 해석하면, 푸생의 회화는 보다 심오한 상징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헤르메스의 이름의 앞부분과 아프로디테의 이름의 뒷부분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 두 신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의학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지닌 양성적 존재로 정의한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라는 조각은 뒤에서 보면 아름다운 여성의 형상이지만, 앞에서 보면 여성과 남성의 2차 성징인 유방과 남자 생식기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신화 속에서는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님프 살마키스와의 융합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는 통합체로 변모하는데, 이는 단지 신화적 변신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의 이중성, 감성과 이성의 융합, 본능과 사유의 조화라는 철학적 상징을 품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인도 신화에서도 유사하게 찾아볼 수 있다. 힌두교 신화에서 시바와 그의 배우자 파르바티가 결합된 형태인 아르다나리슈바라(Ardhanarishvara)는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동시에 지닌 존재로, 완전한 조화를 상징한다. 시바의 오른쪽 반신은 남성성을, 파르바티의 왼쪽 반신은 여성성을 나타내며, 두 성별의 경계를 허문 초월적인 신성을 상징한다. 이는 단순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아닌, 우주적 조화와 창조의 근원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작가 미상의 18세기 인도 만콧 지역에서 제작된 아르다나리슈바라 작품은 이러한 상징을 도상학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샌디에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신성한 통합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신의 절반은 시바로, 나머지 절반은 파르바티로 묘사되며, 조화롭고 신비로운 형태가 강조된다. 두 상반된 존재가 하나의 신체 안에서 공존하는 모습은 단순 결합이 아니라 신성한 통합을 상징한다.
최근 '콘클라베'라는 영화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거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 회의인 콘클라베의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권력과 신념, 그리고 인간적 의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교황 선출의 과정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최종적으로 선출된 교황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 이유는 새롭게 선출된 교황이 여성의 자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콘클라베는 단순한 교황 선출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결정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확신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반대로 의심은 인물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러한 확신과 의심 사이의 긴장 구조는, 아르다나리슈바와 헤르마프로디토스라는 신화적 상징과 맞닿아 있다.
아르다나리슈바는 시바와 파르바티, 즉 남성과 여성, 상반된 에너지의 완전한 통합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통합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긴장과 모순을 그대로 품고있는 상태이다. 이는 인간이 어떤 하나의 확신에 도달하기보다, 의심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수용하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통합이라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유동적 존재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콘클라베가 말하는 신앙과 리더십,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복잡성에 대한 메시지와 정확히 맞물린다.
이때, 의학적 시선은 이 신화적 해석에 현실적인 깊이를 더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헤르마프로디토스’라는 이름에서 파생된 단어 ‘hermaphrodite’를 의학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발생학적으로 미분화된 상태가 태어날 때까지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특성이 혼재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성기 형태의 차이를 넘어, 유전자, 호르몬, 생식샘의 구조에서부터 심리적이고 인식적인 성 정체성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의학적 사실은 성별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 즉 인간의 신체와 정체성이 본래부터 다양하고 스펙트럼적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르다나리슈바라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고대 신화 속 존재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경계적 존재성은 오늘날 의학에서도 그 실체가 확인되고 있다. 이 점은 신화가 단지 상징이 아닌, 인류가 오래전부터 직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다양성의 진실임을 시사한다. 또한 의학적으로는 자연의 특성이면서 인간 다양성의 일부라는 관점이 점점 더 존중받고 있다.
결국, 콘클라베 속에서 '확신'이 갈등을 낳고 '의심'이 공존의 틈을 열듯이, 우리 사회도 더 이상 확정된 이분법만을 기준으로 존재를 판단할 수 없다. 아르다나리슈바라와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모두 모호함, 유동성, 경계성 속에 살아있는 진실을 말해준다. 의심은 결코 불신이나 약함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다름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적·의학적 공간이다. 확신의 강도보다 의심의 깊이가 더 중요한 시대, 신화와 의학은 나란히 우리에게 공존과 이해 그리고 다양성의 시선을 열어주고 있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조차 마지막 순간에는
확신하지 못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치셨죠.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것은
의심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믿음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콘클라베 영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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