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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에서의 마지막 진료일

경북의대 이진규 졸업생
발행날짜: 2025-06-23 05:00:00

이진규 경북대학교 의대 졸업생(전공의 수료)

"OO 님, 오늘 저 마지막 진료하는 날이에요"

환자와 의사 관계는 특별하다. 친구 같기도, 가족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중간쯤에 놓인 듯하다. 환자는 의사가 있어야 병을 이겨낼 수 있고, 의사는 환자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애틋하고 소중하다. 환자 없는 의사는 헛똑똑이고, 의사 없는 환자는 그저 아픈 사람일 뿐이다.

좋은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위대한 의사는 환자를 치료한다고 한다. 나는 병을 치료하기에도 부족한 초보 의사라서 좋은 의사가 되기를 매일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만한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의사이고 싶다. 병이 아니라 환자를 보고 싶다.

그래서 바쁘다. 의미를 좇느라 현실을 희생할 순 없다. 이상을 품되 현실을 외면할 순 없는 법. 의사는 환자의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병원에 수익도 남겨야 한다. 그래야 오래 환자를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환자의 삶에 귀 기울이고, 함께 울고 웃어주는 일은 마치 사치처럼 느껴진다. 어떤 선배 의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나는 고집이 센 편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떠돌아다니는 이유들로 타협하지 않는다. 배타적이거나 고리타분한 것은 아니다. 유연하게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다만, 나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나만의 색깔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다.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4살배기 어린아이부터 93세 할머니까지 나이도, 성별도, 성격도 정말 다양하다. 해맑은 얼굴로 손 흔들며 아장아장 걸어 들어오는 아이부터 '아이고 우리 원장님' 하며 함박웃음과 함께 넉살 좋은 얼굴로 들어오는 아주머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모두 기억난다. 그래서 이직을 앞두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뿐이다.

"OOO 님, 잘 지내셨어요? 특별히 불편한 데는 없고요?"

"네 원장님, 잘~ 지냈습니다"

"그럼 이번 달 약 오늘 받아 가시고요, 다음 달에는 피검사랑 소변검사"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여러 생각들이 내 입을 굳게 닫았다. 다음 달에 나 대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다른 의사가 약도 주고, 검사도 처방할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질투가 났다. 내 사람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그랬다. 동시에 느껴지는 환자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안함에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다.

"OOO 님, 앞으로는 술, 담배 줄이시고, 운동 열심히 하시고, 살도 빼시고 꼭 건강하셔야 해요"

"에이, 원장님. 어디 떠날 사람처럼 왜 그런 말을 해요"

"제가 있든 없든 건강하셔야죠. 저랑 약속해요. 자, 약속!"

환자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고 나서야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도 몰래 환자분과 마음으로 이별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그날 제 마음에는 다른 얼굴의 도장 수십 개가 찍혔다.

"원장님, 저 왔습니데이~"

남편과 다투고 마음이 불편할 때면 술로 마음을 달래곤 했던 69세 아주머니. 진료실에 들어올 때마다 입술에 검지를 올리고 '우리 남편한테 술 마시는 거 비밀, 그 사람 알면 큰일 나' 하시며 들어오셨던 분이 다시 오셨다.

당뇨 치료를 받으시는 분이셨지만, 진료실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참 좋아하셨는데, 특히 남편 욕을 그렇게 털어놓고 가셨다. 한껏 밝아진 아주머니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다음에 올 때는 술을 줄여보기로 매번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해왔다.

"나는 내과 와서 2원장님이랑 이야기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 밑에 가서도 간호사한테 얘기했어. 눈이 얼매나 이쁘게 생겼다고"

"아이고, 감사해요. 근데 OOO 님, 저 오늘 마지막 날이에요"

"엄마야, 어디로 가는데예? 나도 따라가야겠다"

나는 아주머니의 눈을 마주 보며 아쉬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곧 서울로 올라가요"

"원장님… 우리 원장님… 우짜노 원장님 보는 재미로 오는데, 인연이 있으면 또 언제 안 보겠어요. 사랑합니데이"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매주 교회에서 듣는 그 단어를 진료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에도 따스함이 은은하게 차올랐다.

"저도 사랑해요. OOO 님,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시다가 또 뵈어요"

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만날 땐 반갑지만, 헤어질 땐 아쉽다. 더 이상 일상을 함께할 수 없어 그렇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내게 소중했던 그들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그들과 마음만은 함께할 수 있다. 가끔씩 생각날 때면 마음속 페이지를 펼치고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열어볼 수 있다. 그렇게 위대한 의사가 되어가리라 믿는다.

언젠가 들었던 유명 만화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은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꿰뚫렸을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 수프를 먹었을 때? 천만에!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다"

환자들은 나를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 아픔과 기쁨을 마음에 새기고 간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치료이자, 첫 번째 치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내과 진료실을 떠났다. 빈 의자 하나가 남았지만, 그곳에 남은 추억은 가득했다. 문을 닫으며 돌아본 그 자리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이별을 뒤로 내가 걷고자 하는 길로 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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