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유소영 교수] 상편에 이어서 연재합니다<클릭>.
04 규제도 사람만 규율한다
이런 선호는 응답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각국이 의료 AI에 두는 안전장치를 한자리에 모아 보면, 대부분이 사람을 규율하는 데 쏠려 있습니다. 의사를 교육하거나, 의사에게 편향을 자각하도록 요구하거나, 사업자에게 문서를 남기게 하는 것입니다. 정작 제품이 내놓는 결과 자체를 규율하는 장치는 드뭅니다.
관할 | 안전장치 | 무엇을 규율하나 | 상태 (2026.7) |
|---|---|---|---|
EU | AI법 제4조 - AI 리터러시 의무 | 이용·배포자의 교육 이수 | 2025.2.2 시행 |
EU | AI법 제14조 4(b) - 자동화 편향 '계속 인식' | 감독자의 인식 상태 | 의료 AI는 2028.8.2로 연기 |
미국 | 치유법 요건 4 - 근거의 독립적 검토 | 개발사의 설계 의도 | 유지(의도 확인에 그침) |
미국 | FDA 2022 - 단일 특정 권고 금지 | 제품의 출력 형태 | 2026.1.6 집행재량으로 완화 |
한국 | AI기본법 제34조 - 고영향 AI 조치 | 사업자의 관리 절차·문서 | 디지털의료제품법 이행으로 간주 |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규율 대상이 '사람'에서 '제품'으로 옮겨 갑니다.
위의 넷은 사람 아니면 절차에 관한 것일 뿐, 제품이 무엇을 내놓을지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제품의 출력 형태 자체를 제약한 장치는 이 표에서 단 하나, FDA의 2022년 지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가 올해 1월 풀렸습니다.
표의 맨 윗줄이 특히 눈에 띕니다. 유럽이 의료 AI와 관련해 가장 먼저 시행한 의무가 제4조, 곧 AI 리터러시입니다(2025년 2월 발효). AI를 배포하거나 쓰는 쪽이 그 기술을 이해할 만큼 교육받게 하라는 요구입니다. 규제가 맨 먼저 꺼내 든 카드가 사람 교육인 셈인데, 이는 앞서 설문에서 다수가 고른 방향과 같습니다.
그런데 리터러시 교육이 이 문제를 실제로 푸는지는 따로 물어야 합니다. 이 시리즈 지난 편에서 한 번 소개한 연구지만, 규제를 이야기하는 지금 다시 꺼낼 값어치가 있습니다. 2026년 〈NEJM AI〉의 무작위 대조시험입니다[3]. 이 연구의 힘은 대상자 선정에 있습니다. 참여한 의사 44명은 모두 20시간의 AI 리터러시 교육을 이미 이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AI의 오류 가능성도, '자동화 편향'이라는 개념도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군에 오류가 섞인 대규모 언어모형(LLM)의 추천을 주자, 진단 추론 정확도가 84.9%에서 73.3%로(조정 -14.0%포인트), 최선의 진단을 맞힌 비율은 90.5%에서 76.1%로 떨어졌습니다. 편향을 배운 의사조차, LLM이 그럴듯하게 틀리자 그 오류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리터러시의 한계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교육은 '아는 것'을 바꾸지만, 자동화 편향은 '아는 것' 아래에서 작동합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그럴듯한 답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연구진의 처방도 같은 방향입니다. 리터러시 교육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자동화 편향을 막을 수 없으며, 판단을 먼저 기록하게 하거나 검증 절차를 두는 등 '작업 흐름' 차원의 장치와 함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제가 가장 먼저, 가장 널리 채택한 안전장치가 바로 교육(리터러시)인데, 정작 그 교육으로는 자동화 편향 자체를 막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머지 장치들도 결이 같습니다. 하나씩 보겠습니다.
4.1 유럽 -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인식하라는 요구
EU AI법 제14조 4항 (b)호는, 감독을 맡은 사람이 'AI 출력에 자동적으로 의존하거나 과도하게 의존하려는 자신의 경향(자동화 편향)을 계속 인식(remain aware)'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설계·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4]. 인식해야 할 대상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감독자 자신이 AI에 기대려는 성향입니다.
여기에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자동화 편향은 정의상, 그 의존을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기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 채 기댑니다. 그것이 이 편향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조문은 바로 그 '알아차리지 못함'을 '계속 알아차리라'는 의무로 되받습니다.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의인 현상에, 인식하라는 의무를 걸어 둔 셈입니다. 법학 문헌도 이 조항이 다른 기술적·운영적 요구들 사이에서 홀로 심리 상태를 겨눈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며 실행이 어렵다고 지적합니다[5].
게다가 의료 AI에 대해서는 이 조항의 적용 시점 자체가 뒤로 밀렸습니다. 의료기기는 EU AI법에서 '규제된 제품에 내장된 고위험 AI'(부속서 I)로 분류됩니다. 2025년 말 시작된 디지털 옴니버스 논의에서 고위험 의무의 적용일이 재조정되었고, 의료기기는 부속서 I 계열에 드는데, 이 계열의 적용일은 2028년 8월 2일로 미뤄졌습니다(2026년 5월 정치적 합의, 6월 채택)[6]. 요약하면, 의료 AI를 감독하는 사람에게 자동화 편향을 계속 인식하라는 유럽의 요구는, 실행이 의심스러운 데다 발효까지 2년 넘게 남아 있습니다.
4.2 미국 - 명문 요건은 남기고, 유일한 출력 제약은 풀다
미국으로 가면 구조가 더 선명합니다. 2016년 21세기 치유법 제3060조는 연방 식품의약품화장품법(FD&C법) 제520조(o)를 신설해, 아래 네 요건을 모두 갖춘 임상의사결정지원(CDS) 소프트웨어를 '의료기기' 정의에서 제외했습니다[7]. 기기가 아니면, 시장에 나오기 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안전성·유효성을 확인하는 '시판 전 심사(premarket review)'를 받지 않습니다. 네 요건은 이렇습니다.
비기기 CDS의 네 요건 (미국 FD&C법 §520(o)(1)(E)) ① 의료영상, 또는 체외진단기기·신호취득장치에서 나오는 신호를 직접 취득·처리·분석하지 않을 것 ② 의학 정보(환자 데이터, 임상 지침·문헌 등)를 표시하거나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③ 의료인에게 질병의 예방·진단·치료에 관한 권고(recommendations)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④ 의료인이 그 권고의 근거를 '독립적으로 검토(independently review)'할 수 있게 하여, 의료인이 그 권고에 '주로 의존하지 않도록(not rely primarily)'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
이 가운데 마지막 요건 4가 이 글의 핵심입니다. 소프트웨어는 의료인이 권고의 근거를 스스로 검토하게 하여, 의료인이 그 권고에 '주로 의존하지 않도록(not rely primarily)'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의사가 소프트웨어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근거를 스스로 따져 볼 수 있어야 하고, 소프트웨어보다 의사 자신의 판단이 최종 결정을 지배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과의존 방지는 이렇게 미국 법의 명문 요건입니다. 그런데 법이 그 요건을 담보하는 방식이 '정보 제공'입니다. 근거를 보여 주어 의사가 스스로 검토하게 하라는 것으로, 앞의 설문에서 다수가 1위로 고른 ③(신뢰도·한계 제시, 34.4%)와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FDA는 2022년 지침에서 여기에 한 가지 제약을 더했습니다[8]. 법 조문은 소프트웨어가 의료인에게 '권고들(recommendations)'를, 곧 권고를 복수형('권고들')으로 제공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FDA는 이 복수형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여러 선택지를 함께 내놓는 것(복수 권고, 예: '항생제 A·B·C 중에서 고르십시오')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답을 단독으로 내놓으면(단일 권고, 예: '항생제 A를 처방하십시오'), 그것은 비기기 CDS가 아니라 기기로 본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여러 후보를 늘어놓으면 의사가 스스로 골라야 하지만, 답이 하나뿐이면 의사는 '수락' 버튼만 누르기 쉽습니다. 즉 '단일 권고 금지'는, 의사가 소프트웨어의 답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판단하도록 강제하는 장치였습니다. 미국 규제에서 제품이 화면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직접 정한 장치는 이것 하나뿐이었고, 이것이 바로 요건 4의 '주로 의존하지 않도록(not rely primarily)'을 현실에서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앞의 설문에서 사람들이 최하위로 밀어낸 ⑤(저신뢰 출력 제한, 8.4%)와 같은 계열입니다.
2026년 1월 6일(1월 29일 재발행), FDA는 그 버팀목을 뺐습니다[9].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FDA는 법 해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대신 '집행재량(enforcement discretion)'을 선언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의학적으로 타당한 선택지가 애초에 하나뿐이라면(예: 특정 진단에 표준 치료가 단 하나뿐인 경우), 그 하나만 제시하는 소프트웨어도 나머지 요건을 갖추는 한 기기로 규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022년에는 '단일 권고를 제시하면 기기'로 보았는데, 이제 '임상적으로 선택지가 하나뿐인 경우의 단일 권고'만큼은 눈감아 주겠다고 물러선 것입니다. 조문상 그 소프트웨어가 여전히 기기 정의에 들 수 있다는 점은 FDA도 인정합니다. 다만 규제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단일 권고만 내놓는 CDS가 심사 밖으로 나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로 의존하지 말라'는 요건 4의 명문은 조문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요건을 현실에서 작동시키던 장치, 곧 소프트웨어가 답을 하나만 내밀지 못하게 해 의사가 스스로 고르도록 강제하던 2022년 규칙은 사라졌습니다. 미국 규제에서 제품의 출력 형태를 직접 겨눈 장치는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규칙은 남고, 그것을 지키게 하던 장치는 빠졌습니다. 선언은 남고, 구조는 빠졌습니다.
4.3 한국 - 제품이 아니라 절차를 규율한다
한국은 어떤가. 2026년 1월 22일 시행된 AI기본법은 사람의 생명·신체·기본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영역, 보건의료가 여기 명시되어 있는데, 그 영역의 AI를 '고영향 인공지능'으로 분류하고, 사업자에게 안전성·신뢰성 확보 조치를 요구합니다(제34조 제1항)[10]. 시행령은 그 조치를 위험관리방안 수립, 설명 방안 마련, 이용자 보호, 사람에 의한 관리·감독, 그리고 근거 문서의 5년 보관으로 구체화합니다.
이 조치들은 사업자의 '관리 절차'를 겨눕니다. 무엇을 문서화하고 무엇을 게시하고 누가 감독하는지를 규율할 뿐, 제품이 무엇을 출력할 수 있는지는 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의료 AI에는 완충이 하나 더 있습니다. AI기본법은 다른 개별법상의 의무를 이행하면 본법상의 고영향 책무를 이행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의료기기인 AI가 디지털의료제품법의 요구를 충족하면 그것으로 고영향 AI 책무는 이행된 것으로 봅니다[11]. 즉 한국의 의료 AI 규율은 기기 규제로 흡수되고, 그 어디에도 제품의 출력 형태를 직접 제약하는 장치는 없습니다.
세 관할을 한자리에 겹쳐 보면 빈자리의 모양이 같습니다. 사람과 절차를 규율하는 장치는 늘어나는데, 제품의 출력을 규율했던 단 하나는 빠졌습니다.
4.4 세 관할이 공통으로 비운 자리
관할 | 사람·절차를 규율하는 장치 | 제품의 출력을 규율하는 장치 |
|---|---|---|
유럽 | 리터러시 교육(제4조) · 자동화 편향 인식(제14조) | 없음 |
미국 | 근거의 독립적 검토(요건 4) | 단일 권고 제시 금지(2022) → 2026년 허용 |
한국 | 위험관리·설명·문서·감독(제34조) | 없음 |
세 관할 모두 규율의 초점은 사람과 절차에 있습니다. 제품이 내놓는 권고의 형태(권고를 하나로 좁혀 제시할지, 여럿을 제시할지)를 직접 규율한 장치는 미국의 2022년 지침이 유일했는데, 그마저 2026년에 풀렸습니다. 이번 설문 응답의 분포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05 면제라는 거래, 그리고 그 거래가 스스로 깨지는 이유
이 논의가 왜 중요한지부터 짚겠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의료기기'로 분류되면, 미국에서는 환자에게 도달하기 전에 FDA의 시판 전 심사를 거칩니다. 안전성과 유효성을 미리 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런데 앞서 본 치유법은 네 요건을 갖춘 CDS 소프트웨어를 기기 정의에서 빼 주었습니다. 기기가 아니므로 이 심사를 건너뜁니다. 그러면 물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고 심사를 면제해 주는가.
답은 요건 4에 있습니다. 의사가 그 소프트웨어의 답을 스스로 검토하고, 그 답에 주로 의존하지 않는다(not rely primarily)는 것입니다. 최종 판단은 의사가 내리고, 소프트웨어는 참고 자료에 그친다는 전제입니다. 의사가 스스로 판단하는 한, 소프트웨어가 틀려도 그 오류는 의사 선에서 걸러집니다. 그래서 시판 전 심사를 면제해도 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앞 장의 의문 하나가 풀립니다. 제품이 기기로 분류되면 그 성능은 심사를 받습니다. 정확한지, 유효한지를 봅니다. 그러나 비기기 CDS 면제는 그 심사마저 건너뛰는 길이고, 그 대신 세운 안전장치가 '제품의 성능'이 아니라 '의사의 판단'입니다. 앞 장에서 규제가 제품이 아니라 사람을 규율한다고 한 것이, 여기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정리하면 면제는 하나의 거래입니다. 규제 당국은 시판 전 심사를 면제하고, 그 대신 의사의 판단이 오류를 걸러 내기로 한 것입니다. 이 거래에서 하중을 지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성능이 아니라 의사의 실력입니다. 요건 4는 그 사실을 조문으로 못 박아 둔 셈입니다. CDS를 둘러싼 규제가 결국 의사의 '맨눈 실력' 문제로 돌아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2026년 FDA의 규제 완화(단일 권고를 내놓는 소프트웨어까지 심사 없이 통과시키기로 한 결정)가 이 거래에 무엇을 하는지 봅니다. 예를 들어 '항생제 A를 쓰십시오'처럼 하나의 권고로 좁혀 제시하는 소프트웨어도, 이제 심사 없이 시장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의 전제 위에서만 성립합니다. 의사가 그 권고를 다시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도 안전하다는 전제입니다.
FDA도, 개발사도 '이제 의사의 독립적 판단은 필요 없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을 뿐, 결정은 이미 그렇게 움직입니다. 심사를 면제했다는 것은, 의사가 그 권고를 다시 검토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판단했다는 뜻입니다.그렇게 보지 않았다면 면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심사 면제 요건 4와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의사가 답을 다시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그 답에 '주로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면제의 조건인 요건 4는 정반대, 곧 '주로 의존하지 않을 것(not rely primarily)'을 요구했습니다. 이번 완화가 성립하려면 의사가 답에 주로 의존하는 상황을 전제해야 하는데, 바로 그 전제가 면제의 조건을 깨뜨립니다. 조건이 깨지면 그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비기기 CDS가 아니고, 다시 심사받아야 할 기기로 돌아갑니다.
5.1 면제는 왜 스스로를 무너뜨리나
FDA 면제 성립 조건 (요건 4) | 2026년 완화가 전제하는 것 | |
|---|---|---|
의사와 답의 관계 | 그 답을 스스로 다시 검토하고, 주로 의존하지 않음 | 그 권고를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임 |
한 문장으로 | 주로 의존하지 '않는다' (not rely primarily) | 주로 의존'한다' |
그 결과 | 면제 자격 있음 | 요건 4 위반 → 면제 자격 없음 |
이번 완화가 성립하려면 의사가 그 권고에 '주로 의존'하는 상황을 전제해야 하는데, 그 전제가 곧 요건 4('주로 의존하지 않을 것')를 위반합니다. 완화의 논리를 끝까지 밀면, 그 소프트웨어는 스스로 면제 자격을 잃습니다.
이것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구조입니다. 한마디로, 규제를 풀어 주는 근거와, 규제를 풀어도 된다고 보는 이유가 서로 모순됩니다. 면제는 '의사의 독립적 판단이 여전히 살아서 최종 결정을 좌우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합니다. 그런데 완화는 바로 그 판단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고 가정합니다. 면제가 딛고 선 토대를, 완화가 허무는 셈입니다.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 판단, 곧 의사가 AI 없이 스스로 진단하는 실력은 쓰지 않으면 줄어듭니다. 앞의 폴란드 연구가 보여 준 그대로입니다. 면제가 계속 유효하려면 이 실력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실력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확인하지 않는 사이 실력은 약해지고, 면제의 근거도 함께 사라집니다.
06 그래서, 측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른다

요건 4가 면제의 조건으로 삼은 것은 의사의 '비보조 판단 역량', 곧 AI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근거를 따져 결론에 이르는 힘입니다. 이 역량이 지금 어느 수준인지를 측정해 남겨 두어야, 훗날 그것이 유지되고 있는지 판정할 수 있습니다. 'AI 이전에 의사가 홀로 도달하던 수준', 이 값이 기준선입니다. 기준선이 없으면 이후의 어떤 변화도 '변화'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기준선 측정에는 비용이 따릅니다. 측정하려면 그날 검사 일부를 AI 보조 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예로, 보조 대장내시경이 선종 발견율을 높인다는 것은 이미 확립된 사실입니다[12]. 그러니 기준선을 책정하려고 AI 보조 없이 검사하면, 그날 그 환자는 AI가 짚어 주었을 선종을 놓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준선을 책정하는 비용을, 그날 AI 보조 없이 검사받은 바로 그 환자가 부담하게 됩니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서 드러납니다. 비기기 CDS 면제는 시판 전 심사, 곧 안전성·유효성 검증을 생략하는 결정입니다. 그 생략을 정당화한 유일한 근거가 요건 4, 즉 '의사가 독립적으로 판단해 소프트웨어의 오류를 걸러 낸다'는 전제였습니다. 문제는 이 전제가 사실인지를 제도가 한 번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AI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이 이미 무뎌져 있다면, 소프트웨어가 오류를 내도 이를 걸러 낼 의사가 없습니다. 걸러지지 않은 오류는 그대로 환자에게 미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조문 정합성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 안전의 문제입니다. 한 역량을 규제 면제의 조건으로 세워 두었다면, 그 역량이 유지되는지를 주기적으로 측정해야 합니다. 측정하지 않을 것이라면, 그 역량을 안전의 근거로 삼아 심사를 면제해서는 안 됩니다.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안전장치를 신뢰해 검증을 면제하는 것은, 규제가 스스로 세운 전제를 방기하는 것입니다.
반론이 가능합니다. AI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역량은 머지않아 불필요해질 텐데 지금 굳이 보존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현행 의료 AI의 조건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근거는 둘입니다.
첫째, AI는 오류를 낳으며, 현행 규제는 그 오류를 최종적으로 걸러 낼 책임을 명시적으로 의사에게 지웠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심사를 면제받은 대가가 바로 '의사가 AI와 무관하게 스스로 검토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사가 AI 없이 판단하는 실력이 이미 저하되어 있다면, 규제가 상정한 최종 방어선은 실체 없이 이름만 남습니다.
둘째, 그리고 이것이 더 결정적입니다. 그 실력이 정말 불필요해졌는지조차, 실제로 측정해야만 판정할 수 있습니다. 측정을 포기하면 '이제 불필요하다'는 판단마저 근거를 잃습니다.
6.1 결국 문제는 시점이다
항목 | 지금 · 실력이 남아 있을 때 | AI 도입이 완료된 후 |
|---|---|---|
| 의사가 AI 없이 판단하는 역량 | 측정해 기준선으로 남길 수 있다 | 견줄 대상이 없어 측정 불가 |
| 면제의 전제(요건 4) 충족 여부 | 검증된다 | 검증할 수 없다 |
'그 역량, 이제 불필요한가'라는 물음 | 자료로 답한다 | 물어도 답할 자료가 없다 |
세 물음 모두 지금은 답할 수 있고, 의료에 AI가 완전히 도입이 완료되면 답할 수 없습니다. 측정의 창은 지금만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규제를 되돌리자는 것도, AI를 늦추자는 것도 아닙니다. 훨씬 소박하지만 시한이 있는 요구입니다. AI가 진료 현장에 완전히 자리 잡기 전에, 의사가 AI 없이 판단하는 역량을 측정해 기준선으로 남겨 두자는 것입니다. 이 값은 지금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 시점을 놓치면 견줄 대상이 소멸하고, 남는 것은 "이전의 의사는 더 정확했는가"라는 답할 수 없는 물음뿐입니다.
이 제안은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같은 설문의 마지막 문항(Q5)에서, 'de-skilling을 줄이려면 무엇부터 제도로 만들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답이 바로 'AI 없이도 핵심 판단을 할 수 있는지 정기적으로 확인하자'였습니다(25.2%). 현장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다만 그 생각이 제도로 자리 잡기 전에,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이 먼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관통하는 사실은 하나입니다. 설문에 답한 131명도, 미국·유럽·한국의 규제도, 사람은 교육하고 정보는 보강하되 제품이 산출하는 결과 그 자체는 규율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를 저는 여기서 판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의사가 AI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역량을 지금 측정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훗날 그 선택이 옳았는지조차 물을 수 없습니다. 그 물음을 검증할 자료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 이전의 그 역량은 지금 이 순간에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 측정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훗날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끝내 알 수 없습니다.
이 분석은 131분의 응답에서 나왔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추어 자신의 판단을 적어 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이 글도 가능했습니다. 그 귀한 참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
참고문헌
[1] Budzyń K, Romańczyk M, Kitala D, et al. Endoscopist deskilling risk after exposure to artificial intelligence in colonoscopy: a multicentre, observational study. Lancet Gastroenterol Hepatol. 2025;10(10):896-903.
[2] Corley DA, Jensen CD, Marks AR, et al. Adenoma detection rate and risk of colorectal cancer and death. N Engl J Med. 2014;370(14):1298-1306.
[3] Qazi IA, Ali A, Khawaja AU, et al. Automation Bias in Large Language Model-Assisted Diagnostic Reasoning among Physicians Trained in AI Literacy: A Randomized Clinical Trial. NEJM AI. 2026;3(5). doi:10.1056/AIoa2501001.
[4] Regulation (EU) 2024/1689 (Artificial Intelligence Act), Article 14(4)(b).
[5] 자동화 편향과 AI법상 인간 감독에 관한 법학 논의. 예: "Automation Bias in the AI Act: On the Legal Implications of Attempting to De-Bias Human Oversight of AI" (arXiv:2502.10036, 2025).
[6] Digital Omnibus on AI: Council·Parliament 잠정 합의(2026.5.7). 부속서 I(규제 제품 내장, 의료기기·IVD 포함) 고위험 AI 의무 적용일 2027.8.2 → 2028.8.2. 최종 관보 게재 임박.
[7] 21st Century Cures Act §3060 (2016); FD&C Act §520(o)(1)(E)(iv) [21 U.S.C. §360j(o)].
[8] FDA. Clinical Decision Support Software - Guidance for Industry and FDA Staff. 2022.9.28.
[9] FDA. Clinical Decision Support Software - Guidance for Industry and FDA Staff. 2026.1.6 발행, 2026.1.29 재발행(단일 임상적 적절 권고에 대한 집행재량).
[10]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제34조(시행 2026.1.22).
[11] 같은 법 시행령. 디지털의료제품법 등 개별법 의무 이행 시 고영향 인공지능 사업자 책무 이행 간주.
[12] Soleymanjahi S, Huebner J, Elmansy L, et al. Artificial intelligence-assisted colonoscopy for polyp detection: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Ann Intern Med. 2024;177(12):1652-1663.
*작성 및 도구에 관하여
이 글의 주제 선정, 기획, 자료 분석, 논증과 집필은 모두 필자가 직접 수행했습니다. 인용된 문헌·법령·통계의 원문 대조와 확인, 그리고 필자가 설계·지시한 그림 2점의 제작 과정에서 생성형 AI(Claude, Anthropic)를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AI는 필자의 지시에 따른 확인·시각화 보조와 이미지 생성에 국한되었으며, 이 글의 모든 판단과 서술, 그리고 최종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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