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이나 단체들이 어떤 의료정책을 제시했을 때, 그것이 단점도 있겠지만 한 편으로 충분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정부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간주하고 불신해 버리는 잘못된 풍조를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제근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우리 의료환경을 올바로 세우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바로 ‘불신의 극복’과 ‘지도적 권위의 확립’에서 찾는다.
의학의 경우는 오랜 역사로 인해 어떤 학문적인 권위란 것이 확립돼 있어 권위있는 학자가 답을 제시하면 그것을 존중하는 풍조가 돼 있지만, 의료정책 분야에는 우리나라에 아직 그런 지도적 권위란 것이 없는 것이 서로간의 불신을 조장하고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의료계에도 미국의 ‘그린스펀’같은 존재 있어야”
“우리 의료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정책 결정을 두고 갈등이 벌어질 때, 정부와 의약단체, 학계가 모두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는 최고의 지성 집단과 씽크탱크(thik tank)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미국 경제계에서의 그린스펀과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바로 각 단체들의 이해관계가 대립됐을 때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을 검증해 주고 공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을 제시해 줄 인재를 키우는 것만이 지금의 혼란스런 의료환경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단지 우수한 몇몇 개인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공정하고 지도적 권위를 인정받는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사회적인 시스템을 갖춰가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오랜 시행착오가 만들어 낸 지적 유산의 축적과 많은 투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의료계는 특히 의약분업이라는 큰 사건을 거치면서 많은 깨달음도 얻고 반성도 했지만 아직도 많은 실수를 하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지금도 의료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외국의 사례를 인용해서 끌어다 쓰는 수준인 경우가 많죠. 우리의 특수성에 맞는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잘못된 의료정책은 의료계도 응분의 책임”
그는 “김대중 정부 이후 우리나라의 의료정책은 미래지향적이지 못하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도, 여기에 대해서는 의료계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바로 위와 같은 공정하고 권위있는 대안을 제시해서 모두를 설득하지 못한 것을 일컬음이다.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제시했을 때 이것을 단지 성토하고 불평만을 늘어놓는 것으로 해결돼지 않습니다. 모두가 수긍할 수 있고 권위를 가진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의료정책 분야에서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최고의 지성집단과 권위있는 지도층을 형성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지제근 소장은 이런 노력들이 “지금 의료계가 벌이고 있는 권익단체로서의 투쟁과는 별도로 이뤄져야 하며,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초를 다진다는 생각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언론의 역할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도 숨어서 꾸준히 보건의료 정책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는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예방의학·역학·산업의학과 같은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 인재들을 발굴해서 키워주는 일은 바로 언론이 할 일입니다. 언론이 이들의 연구 가치를 잘 선별해서 계속 소개해 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해줘야 할 것입니다.”
가장 기뻤던 순간, ‘JKMS, 메드라인 등재’
지난 1985년 간행이사를 시작으로 2003년 17대 회장을 역임하기 까지 근 20여년간을 대한의학회에 몸 담아온 지 소장은 지금까지 활동을 해 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처음 영문 의학회지를 발간할 때라고 회고한다.
바로 처음 간행이사직을 맡고 1986년 첫 Journal of Korean Medical Science의 발간 작업에 그야말로 혼신을 다했는데 이것이 미국의 세계적 의료소식지인 메드라인(MEDLINE)에 등재됐을 때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이야 SCI(Science Citation Index)에도 등재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논문들이 국내에도 넘쳐나지만, 당시에는 우리 연구가 그런 국제적인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죠. 이 때가 아마 우리 의학이 계속 모방과 답습을 거듭해 오다가 처음으로 고유한 우리나라의 의학으로서 자리 잡아가는 신호탄이 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우리 의학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우리 의학도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2만5,000쪽 분량 한글의학사전 발행…“필생의 사업”
비록 지금은 의학회 일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지금도 한 시도 쉴틈이 없다. 바로 2만5,000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한글의학사전을 거의 혼자 힘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지제근 교수니까 가능한 일이다”고 말한다.
“아직 의학용어의 의미를 우리말로 풀어낼 수 있는 정확한 참고서적이 없는 현실입니다. 의협의 용어심의위원회에 관여하기 시작한 이후로 의학용어를 우리 말로 풀어내기 위해 ‘알기 쉬운 의학용어풀이’등 작은 책들을 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국의 돌랜드(Dorland)’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약 5년간의 노력이 이제 오는 2월경이면 결실을 맺게 될 것 같습니다.”
모든 의학도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돌랜드(Dorland) 사전처럼, 일생을 걸고 이 사전의 개정 작업을 ‘죽는 순간까지’ 계속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전에 없던 활기와 웃음이 넘쳐흘렀다.
“직선제 의협회장 운신의 폭 좁아”
의협의 정책에 대한 질문에 지 소장은 먼저 곁에서 의협회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쓰러움을 이야기했다.
“의협회장이란 자리가 직선제이다보니 운신의 폭이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회원들의 의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기 때문에 소신대로 못 하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올해 의협이 2억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출자해서 의학교육평가원을 설립한 것은 우리 의료 발전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의학회에 대한 지원을 더 확대해 줬으면 하는 거에요. 현재도 의학회 재정의 4분의 3은 의협의 보조금이지만 이중 절반 정도는 영문 의학회지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늘 부족한 형편입니다.”
“의사에게 재시험이란 없다”
마지막으로 후배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하자 지 소장은 먼저 한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제 스승중에는 의대생이 시험을 봐서 점수가 미달된 경우 절대로 재시험을 볼 수 없게 했던 분이 한 분 계셨죠. 그 이유인 즉슨 ‘의사가 한 번 잘못 진료해서 환자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다시 진료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요. 의사는 늘 그런 자세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개원을 하고 나면 스스로가 학문과는 담을 쌓고 돈만 번다며 스스로를 비하하고는 하는데, 그러지 말고 늘 공부하는 데 신경을 쓰길 바랍니다.”
“저는 전공의들이 우리 의료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료현실이 급박하게 변화할 때 전공의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뿐더러, 이들이 얼마나 건전한가에 따라 우리 의료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공을 정할 때 너무 좁은 시야로 바라보지 말고 의료시장개방 등 5~10년 이후를 내다보고 결정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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