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윤리란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료 행위”에서 생긴 문제이다. 여기에서 다룬다는 것은 기존의 목숨을 처분하거나, 연장하는 행위 (낙태, 뇌사, 장기 이식), 새로운 생명 탄생을 돕는 행위 (인공 수정), 한 생명의 모습을 사람이 결정 하는 행위(유전자공학)를 말한다.
윤리란 사람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윤리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낙태를 전혀 해서는 안 되는가? 태아를 사람으로 보는가? 언제부터 사람으로 볼 것인가? 생명 (태아) 와 삶 (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고 태어나거나, 외도로 만들어진 아이, 원치 않는 어머니의 삶 ) 의 문제이다.
이것이 논의 대상이 되는 이유도 사람에게 목숨 못지않게 삶(의미)의 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어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지만 그자체가 절대 가치라기보다는 의미의 장으로 가치를 지닌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목숨이 없으면 삶은 없다. 이러한 상반된 가치의 차이를 가지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의료 행위 중 낙태가 생명 윤리로 가늠해야 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 의료인이 논쟁의 중심이 아니다. 논쟁의 중심은 생명권과 삶의 질을 위한 모체의 자기 결정권이지, 이를 시술 하는 의사가 강제 할 사항은 더군다나 아닌 것이다. 수 세기 동안 생명의 유지와 소멸을 결정할 권한이 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의사에게는 단지 의료 윤리만 존재 할 뿐이다.
최근의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의료 윤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의료윤리는 학문적 체계로써 출발한 분야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의 조건을 둘러싼 위기상황에 처해 시민들의 각성과 함께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기 위해 마련된 분과인 것이다.
인간다운 삶의 질에 관한 물음인 의료윤리는 근본적으로 개인윤리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윤리이며 사회적 합리성의 성장에 기여하는 성찰영역이다. 인문적, 사회과학적, 정책적 사고를 의료문제와 결합시킬 줄 아는 폭넓은 지식활동을 통해 다루어 질 수밖에 없는 학문분야가 의료 윤리이다.
법조계와 의료계는 주요한 공공재를 대상으로 하면서도 공급자와 수요자간의 인식차이가 크다는 점과, 또 이론적으로는 자율성을 높이 사는 직능단체를 축으로 움직이면서도 실제로는 응집력 있는 자율 규범 확보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여러 유사문제를 안고 있지만, 법률가와 의료인의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은 인간다운 삶의 질을 추구하는 물음에서 의료인이 더 직접적인 현장에 있다는 점이다. 바로 사람들의 고통과 위기 상황이라는 그 현장성에 의해 모든 의료적 현상은 근원적으로 도덕적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된다.
의료분야에서도 법에의 호소경향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직업윤리에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했던 이슈들이 점점 법적 논의로 넘어오고 있는 상황은 의료공급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사회를 상대로 한 지적 의사소통의 실패이고, 의료수요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위기의 급박함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인 셈이다.
생명을 둘러싼 과학 기술의 위력이 커지면서 출산과 생명문제에서 전통적으로 정신적 도덕적 길잡이 역할을 해 온 의사들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다. 의료윤리 내지 생명윤리적 관심사의 입법화는 오늘날 세계적인 추세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회 복지 체계 확립으로 의료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함께 규격화추세가 늘어나는 데도 그 원인이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현대과학기술의 발전방향이 인간존엄과 사회제도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법을 부르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법이 할 일과 도덕이 할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리고 법 자체에 내재하는 한계 때문에 생명과학의 발전이나 첨단 의료 기술의 적용이 야기한 제반 사회갈등을 법으로 해결하는 데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고 보는 사람들은 섣부른 법의 개입보다는 신중한 토론을 계속할 것을 권한다.
사실 법은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법체계는 제한된 유용성을 갖는 도구들의 집합이다. 물론 법이 생명과학기술의 발전영역에서 담당해야 하는 일정한 역할은 부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도 자체가 갖는 한계에 대한 일반인 혹은 윤리학자, 과학자들의 이해부족으로 생길 법한 법의 권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경계해야 한다.
학자들이나 윤리학자들, 그리고 의학을 포함하여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법을 너무 단순화시켜 보는 감이 없지 않다. 그들은 법이 사회에서 너무나도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거쳐 나오는 우여곡절의 인간 활동이라는 것을 간과한다. 예컨대 그들은 때로 법을 단순히 규칙들의 집합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법전이나 판례를 들춰 보기만 하면 이 규칙에 따라 2 더하기 2는 4다는 식의 분명한 해답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들은 법은 결국 도덕이라고 생각하여 보통사람들의 도덕적 감수성을 곧 법으로 환원시키고자 한다. 그러면서 법은 도덕적 결손을 보상해 주는 손색없는 장치인 양 생각한다. 아니면 또 이들에 의해 왕왕 법은 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사물에 내재한 원리를 기술하려는 것이 과학자의 관심사라면, 약속이나 보상 혹은 강제를 매개로 하여 인간관계에 개입하거나 사회악을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 법학자의 관심사이다. 이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법률가와 과학자간의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어느 정도는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또 법은 현실 정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법을 곧 정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법은 규칙에 관계하나 규칙만으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며, 도덕을 소중히 여기나 도덕 그 자체는 아니다. 과학을 고려하기는 하나 과학적이지는 않으며,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기는 하나 정치 그 자체는 아니다.
법은 사회에서 이런저런 심각한 난맥상 혹은 대립상황에 처해 어떤 결말이 나야 할 것인가에 대해 미리 모르는 가운데도, 폭력에 호소함이 없이 결정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우여곡절의 절차를 담은 인간 활동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적 결정은 진리에 부합하는 결정이 아니라, 적어도 다른 대안들 보다는 비판당할 여지가 적다는 의미의 결정의 문제인 것이다.
생명과학기술을 둘러싼 갈등문제에서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 법률가를 필요로 한다기보다는, 어쩌면 양당사자 모두에게 어느 정도는 일리 있는 주장이나 권리들 사이의 충돌을 조정하기 위해 법과 법률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요청이 점증하는 이 과학 기술사회에서 과학자와 의학자들은 법의 역할에 대해서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정책입안과정이나 여론형성과정에서 법률가와 과학자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될 경우 사회는 많은 부담을 안게 될 것이다. 예컨대 방어의학, 방어 진료만 해도 이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장애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환자에게 의사가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말해주면 치료효과도 더 좋지만 법적 책임이 무서워 오히려 부정적으로 말해준다면 국민건강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며, 또 방어 진료에 따른 의료비상승문제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의료가 사회적 선이 아니라 시장 구조하의 상품으로 변해가는 추세에서 방어 진료가 관행화된다면 의료비를 아무리 높인다고 하여도 국민들은 결코 만족할 만한 의료서비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informed consent"라는 개념이 있다 . 이것은 의사의 설명의무와 환자의 승낙을 둘러싸고 생기는 법과 의료현실의 갭을 메우기 위해 지난 이십 여 년 이래 미국을 위시하여 서구에서 발전시킨 법 개념이다.
이 개념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없지는 않으나 현대의학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주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처치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 개념은 법과 의료현실의 갭을 끊임없이 좁혀가려는 노력 속에서 계속 다듬어져 가고 있는 개념이므로 우리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법은 고객지향적인 의료모델을 상정하기 쉽다. 즉 법은 환자의 자유와 존엄보호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 첨단의료기술문제와 얽힌 윤리적 이슈에 대한 결정권이 법원이나 국회 쪽으로 가게 되면 법의 속성상 아무래도 일반적 힘의 균형에 있어서 열세에 놓인 쪽의 권리보호라는 관심사와 함께, 가난한 사람과 소수자를 착취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든가, 의사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환자를 죽이게 하는 역할을 맡게 할 수는 없다든가, 장애자를 사회적 무관심이나 증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든가, 체계를 악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고 하든지 등의 원칙을 가지게 되고, 이때 법 종사자들은 미래의 기술발전 가능성보다는 기술이 준 기왕의 고통에 더 비중을 두어 법적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낙태에 관련된 법은 이미 최고의 엄격한 규율과 통제 하에 있다. 하지만 사문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의료의 속성상 수요의 꾸준한 유지를 강제로 억압할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이 법익보다 더 큰데 문제가 있어 이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이 어려운 것이다.
최고의 엄격한 규율보다는 임신 주수별 기준과 낙태의 사회 경제적 이유에 의한 현실을 반영된 법을 통한 규율을 현실화 하는 것이 사회적인 요구라면 이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과정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다면, 이로 인한 법률적 규율방식의 변화가 모색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의 중심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의사는 단지 의료윤리를 준수할 위치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의사도 낙태를 주장하든지 낙태를 금지 해야 한다든지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을 동료의사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의료윤리는 “여성이 어떤 경우라도 임신과 출산으로 사회적 차별과 냉대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낙태 금지를 원한다면 낙태 시술 중단과 처벌 강화 요구부터 할 게 아니라, 고등학교 여학생이 임신하면 퇴학 시키고 있는 학칙에서부터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고, 미혼모를 냉대하고 피임의 실패를 여성에게 책임지우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져야 한다.
일부 의사들의 낙태 근절 운동은 결국 낙태를 줄이지도 못하고 여성들의 희생만 늘릴 것이다. 지난 역사 동안 낙태 불법화는 낙태를 줄이지 못했고 여성들을 비위생적인 ‘뒷골목 낙태’로 몰았을 뿐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매년 불안전한 낙태로 8만여 명의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낙태 현실과 법의 괴리는 크다. 여성들에게 출산과 양육은 삶 전체를 뒤바꿔 놓을 수 있는 문제이므로 원치 않은 임신을 중단시키기를 원하는 여성들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여성들이 낙태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비난 받거나 처벌 받아서는 안 된다. 핵심은 여성의 출산을 여성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기 결정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산과 양육을 책임질 당사자도, 원치 않는 임신으로 평생 고통 받을 당사자도 여성이다. 따라서 낙태를 결정할지 말지는 국가도, 남편도, 의사도 아닌 여성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 현실과 법의 괴리는 법에 여성들의 삶을 끼워 맞추라고 강요해서 해결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삶을 자유의지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이 이루어진다면 이에 따라 시술하는 의사에게는 의료윤리만 존재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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